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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시론] 민주당은 ‘을’이 될 수 있을까 / 이선근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5. 29.

등록 : 2013.05.27 19:22 수정 : 2013.05.27 19:22

이선근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대표

민주통합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이라는 그전 이름으로 바꾸었다. 김한길 당대표의 첫 최고회의 장소는 망원시장이었다. 그곳에서 김 대표는 ‘을에 의한, 을을 위한, 을과 함께하는’ 정당이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사회경제적 강자인 갑과 사회경제적 약자인 을의 관계가 좀처럼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자가 중용을 군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 데서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로마 공화정은 혈통귀족과 부유한 평민 세력이 강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중산층의 경제기반을 안정화하려 시도했으나 귀족의 지배와 무자비한 사회적 양극화를 돌이키려는 형제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고 로마의 공화정은 결국 제정으로 이전해갔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1987년 이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어야 할 정도로 사회는 분열되었으나 어느 정당 하나 제대로 이 조항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10여년이 지난 뒤에야 민주노동당이 경제민주화운동본부를 설치함으로써 그 헌법조항은 사문화되지 않고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80~90년대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빠져 있던 좌파세력들은 ‘을에 의한, 을을 위한, 을과 함께하는’ 정당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을’이 아니라 젊을 때 그들의 의식 속에 심어둔 ‘깃발’만이 보였고 자파의 ‘깃발’만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며 그 깃발을 강요하였다. 결국 끊임없는 이합집산과 당권투쟁을 거쳐 출발 때보다 훨씬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5년 전에도 주목받지 못했고 10년 늦게 출발한 민주노동당도 시도하다가 끝낸 경제민주화를 위한 정치, 곧 ‘을에 의한, 을을 위한, 을과 함께하는’ 정치를 민주당이 과연 해낼 수 있을까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믿을 구석은 많다고 생각한다. 첫째, 경제민주화 조항을 다시 살려낸 공적이 있다. 둘째, 총선과 대선을 통해 경제민주화의 세밀한 설계도를 완성하였다. 셋째,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을 지키기 경제민주화특위’를 설치하였다.

 

우리 정치는 화려한 공약을 내세웠다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내팽개치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공약을 별로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은 보수 기득권층에게 압력이 되어 말이라도 ‘을’을 보호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게 만들었다. 이 정도의 실천이라면 권력을 다투는 정당을 자처한다면 다시 되물릴 수 없는 입장이 아닐까?

 

그런데 ‘을’의 입장에서 보면 못 믿을 구석도 많다. 첫째, 지역주의 정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민주당에 드리운 ‘갑’의 그림자를 벗어던지는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다. 아무리 ‘을’ 정치를 선언하더라도 ‘을’이 믿고 따라주지 않으면 그냥 포퓰리즘 정치로 끝나게 된다. 게다가 더 큰 절망을 ‘을’에게 남기게 되어 정치허무주의는 강화된다. 케세라 세라! 그곳에 들어올 정치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로마의 정치다.

 

정치인이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사안과 정책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국민의 몫이 아니다. 정치인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여 ‘을’이 자신을 위해 진실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냥 ‘을’의 입장으로 하방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현장을 찾고 정책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책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을’의 처지를 그들의 대표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듣고 현장에서 필요한 고충처리를 할 수 있는 실력과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 과정이 민주당에 드리운 ‘갑’의 그림자를 지우는 길이다. 같은 ‘갑’이면 자기 지역의 ‘갑’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것이 지역주의다. ‘을’이 아니면 다른 지역 정치인과 정당을 ‘을’이 선택할 이유는 어느 하늘 아래도 없다.

 

이선근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