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박 대통령은 방미 동안 세일즈 외교를 통하여 침체일로에 있는 우리 경제에 다소나마 숨통을 틔우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이러한 제안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통령도 사람이다 보니 초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면서 미처 본인이나 측근들이 챙기지 못한 일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통상임금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지난해 3월 “통상임금은 정기적으로 지급된 상여금을 포함해 산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한 것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것이 확립된 판례이다.
대법원의 판결 이후에 통상임금을 대상으로 하는 100여건의 소송이 현재 각급 법원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하급심에서는 개별 사업장의 사정을 고려하여 다소 상이한 판결이 나오고 있다. 통상임금에 관한 문제는 우리나라 1600만 근로자들의 생존에 직접 관련되는 중대한 사안이며, 사법부가 한참 이 문제에 대해 판례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좀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했어야 한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한국지엠이 통상임금과 관련한 소송 당사자라는 점이다.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는 한국지엠의 근로자 강아무개씨 등 1025명이 한국지엠을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사건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담당 재판부는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에 이 소송의 원고가 1000명이 넘다 보니 금액을 산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선고를 연기하였다. 재판부가 고심 끝에 판결을 내리기는 하겠지만 박 대통령의 발언이 분명히 사법부의 판결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1심에서 원고들이 승소했기 때문에 항소심이 다른 결정을 하는 경우 재판의 공정성과 사법의 독립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애커슨 회장을 면담하기 이전에 박 대통령 스스로 이러한 요구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어야 하며, 혹시 대통령이 이를 직접 챙기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측근이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알려서 좀더 신중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했던 대목이다.
박 대통령이 법률전문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법부의 판결을 백안시하는 것은 권력분립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법치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서 두 개의 판결이 존재한다”는 발언으로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결국 박 대통령이 사법부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으로서 초헌법적인 지위를 누리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니 양국 모두에 이익에 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그 흔한 외교적 수사를 발휘하든가, 아니면 “이 문제는 대한민국 사법부가 결정할 일이다”라고 우리나라의 사법주권을 단호하게 강조할 수는 없었는가? 만약, 박 대통령이 미리 지엠 쪽의 의도를 알고도 이러한 답변을 했다면 대한민국의 근로자를 볼모로 삼아 외국 기업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제민주화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기로에 선 경제적 약자를 보듬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진정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대통령을 원한다.
김성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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