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
지난 주말 오후 영화 <지슬>을 봤다. 흑백 화면에 담긴 용눈이오름 등 제주의 겨울 풍광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지슬>을 보는 내내 가슴속이 뭔가 꽉 차거나 막힌 느낌이었다.
“제주바당에~ 배를 띄왕~ 노를 젓엉~ 허저나 가게….” 영화가 끝나자 제작진과 출연진을 소개하는 자막과 함께 제주 민요 <이어도사나>가 흘러나왔다. 어깨춤이 절로 날 만큼 가락은 흥겨웠지만 노래를 듣는 마음은 쓰리고 아렸다.
<지슬>을 본 육지 사람들은 “가슴이 먹먹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동안 “땅 밑에 울음이 묻힌 제주를 오직 관광의 섬으로 바라봤던 것”(오멸 감독)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슬>을 보면서 제주 올레를 걷다 마을 곳곳에서 마주쳤던 낡은 충혼비들이 떠올랐다. 올레 3코스가 시작되는 온평포구 온평리 마을 입구, 올레 8코스가 끝나는 대평포구 근처, 올레 10코스가 시작하는 화순항 근처 마을엔 시멘트로 만든 비석들이 서 있었다. 붉은 페인트로 한자 ‘忠魂碑’라고 적힌 이 비석 뒷면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숨진 이들 마을 출신 군인과 경찰관의 이름과 계급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57년에 만든 화순항 근처 충혼비에는 “아아! 장하다. 조국통일의 멸공성전에 산화하신 순국전우여 그대의 성스러운 충혼은 길이 빛나리. 이에 비를 건립하고 천추명복을 음우하시라”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제주 4·3사건의 비극적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제주 젊은이들도 전쟁터에서 무수히 숨졌다. 대부분 한국전쟁 충혼비는 격전지나 전적지에 있다. 제주를 빼면 다른 지역에선 마을 단위의 충혼비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왜 50년대 제주 사람들은 육지의 ‘멸공성전’에서 숨진 젊은 넋을 위로하는 충혼비를 곳곳에 세웠을까.
물론 한국전쟁 때 참전해 무공을 세운 용감한 제주 사람들이 많았다. 4·3사건 이후 제주는 육지 사람들에 의해 ‘빨갱이섬’이란 낙인이 찍혔다. 제주 사람들은 혹여 끔찍한 ‘빨갱이 사냥’이 다시 벌어질 경우, ‘국군 전사자가 이렇게 많은 우리는 결코 빨갱이 마을이 아니다’란 증표로 충혼비를 만들지 않았을까.
4·3 때 2만5000명에서 3만명가량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도 주민이 30만명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10분의 1가량이 희생된 셈이다. 한마을 사람이, 한집안 식구가 한날한시에 몰살되다 보니 제주 사람들은 “제삿날은 메그릇만 올려도 상이 꽉 찬다”고 말했다.
국가권력이 무고한 제주 양민들에게 준 이 무지막지한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무엇보다 국민 대통합을 강조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이 무겁다. 제65돌 제주4·3사건 위령제를 앞두고 제주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위령제 참석을 요청하고 있다. 제주4·3유족회는 21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제주땅을 빌려 빚어졌던 참혹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에도 제주도민들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위령제 참석은 이러한 위축된 삶을 살아야 했던 도민과 유족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줄 것이다.”
대통령이 제주4·3위령제에 참석한 것은 2006년 제58돌 행사에 참석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5년 내내 4·3위령제에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제주를 방문해 “4·3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희생자와 가족들이 겪은 아픔을 치유하는 길에 저와 새누리당이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새누리당은 ‘4·3 완전 해결’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는 박 대통령이 제주 사람과의 약속을 지킬 때다.
권혁철 사회2부 지역데스크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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