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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크리틱] 마키아벨리와 링컨 / 오길영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3. 30.

등록 : 2013.03.29 18:47 수정 : 2013.03.29 18:47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고전은 널리 알려졌지만 읽히지 않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고전은 곡해되기 쉽다. 근대정치학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식화한 저서로 평가받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그렇다. 마키아벨리즘의 본령에는 관심이 없고, <군주론>에서 제시된 통치전략과 정치공학을 진수인 양 받아들인다. 도의나 명분은 개의치 않고 권모술수와 정치기술만이 정치의 전부라고 곡해한다. 곁가지에 치우친 읽기다.

 

<군주론>이 여러 군주제를 분석하고 참된 군주상을 제시한 주된 목적은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피렌체 등의 도시국가가 지닌 문제였던 과두정치와 외부 침략으로부터 주권과 인민을 지킬 수 있는 유력한 방도로서 통일 이탈리아의 건설과 그 과업을 달성할 군주상의 모색이었다. 그러나 <군주론>은 절대 군주권력만으로는 미흡하다는 통찰도 동시에 제시한다. 그래서 <군주론>의 문제의식은 군주제만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에도 설득력을 지닌다. 민주공화정도 지도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인류는 그동안 온갖 정치체제를 생각해냈지만, 지도자 없는 정치체제는 아직 고안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군주로서 정당과 정치지도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군주론>은 정치지도자의 공적 덕목을 제시한다. 이 책이 근대정치학의 효시가 된 이유는 정치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담대한 능력인 비르투(virtu)가 사적 영역의 덕목과는 구별된다는 걸 명료하게 해명했기 때문이다. 공적 존재로서 지도자는 용맹하고, 단호하고, 군사적으로 탁월해야 한다. 지도자는 인민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낡은 제도를 개혁하며, 엄격하면서도 너그러운 통치술과 동맹의 기술을 갖춰야 한다. 지도자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교활함이라는 동물적 역량도 겸비해야 한다. 그러나 사악함으로는 진정한 영광을 얻을 수 없다. 현명한 지도자는 때로는 차선과 차악을 받아들이며, 좋은 참모의 조언을 구하고, 현명한 정책을 따른다.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을 보면서 정치지도자의 역량을 생각했다. 한 위대한 인물의 삶을 그리는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에서도 링컨을 미화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가정사와 정치의 문제로 격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냉철하고 균형 잡힌 현실감각을 잃지 않는 링컨의 모습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배경인 1865년은 남북전쟁으로 자칫 연방국가 미국이 두 쪽으로 나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국면이었다. 영화에서는 노예제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수정헌법 13조의 통과를 둘러싼 정치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그리지만, 심층에는 미국의 분열을 저지하려는 링컨의 깊은 고뇌가 깔려 있다. 링컨은 인민의 지지를 뒷심으로 수정헌법의 통과를 추진하고, 노예해방과 미국의 통합을 이룬다. 링컨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화하고, 소통하고, 타협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게 정치의 요체라는 걸 <링컨>은 설득력 있게 그린다.

 

모든 정치가는 나름의 정치적 비전, 욕망, 야심을 지닌다. 그것들은 머릿속 관념으로는 멋지고 이상적이다. 그러나 정치는 냉혹한 현실이기에,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고, 이견을 좁히고, 타협안을 이끌어내는 담대한 역량을 필요로 한다. 지도자가 그런 정치의 논리를 경멸할 때, 자신만은 고고한 관념의 영역에서 이상적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자임할 때 국가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걸 <군주론>과 <링컨>은 경고한다. 고매한 정치적 이상을 잃지 않되,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현실의 땀과 피와 눈물이 따라온다는 것. 이런 정치의 진리를 깨친 진짜 마키아벨리스트를 한국 정치에서도 만나고 싶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