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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세상 읽기] 여자가 바지를 입는다는 것 / 김현정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4. 18.

등록 : 2013.04.17 19:18 수정 : 2013.04.18 09:53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2013년, 아시아나항공사가 마침내 여성 승무원에게도 바지 유니폼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지난 2월 내려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한 것이다. 이로써 여승무원에게 치마만을 입도록 규정하는 항공사는 국내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항공사 쪽이 내세워온 치마의 명분은 ‘고급스러운 한국의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인권위가 제시한 권고의 근거는 다른 항공사들이 이미 바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 치마만 입을 경우 비상상황 대응 때 어려움이 있다는 점, 지나친 복장 제한은 성차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1992년, 세브란스는 처음으로 여의사에게 바지 입음을 허용하였다. 응급실에서 어깨가 빠진 환자의 관절을 제자리에 맞추기 위한 지렛대 동작으로 다리를 치켜들어 뻗어야 함을 들어 바지의 필요성을 피력한 의대 여학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수련부의 용단이었다. 이전까지 여의사들은 품위 유지를 위해 의사가운 아래로 언제나 치마를 입어야 하는 엄격한 복장규정을 따르고 있었다. 그해 의과대학을 졸업한 우리 학번 여자들은 최초로 바지를 입고 일하는 여의사가 되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는 파리 여성이 비로소 합법적으로 바지를 입게 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1800년에 제정된 파리 여성의 바지 착용 금지 법안이 213년 만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법안에 따르면 여성이 바지를 입으려면 지역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위반했을 경우 구속될 수 있다고 한다. 그동안 사문화한 법률이었으나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또 다른 뉴스에서는 북한 여성 리설주가 바지를 입고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한의 사회 변화 신호탄이 아니냐는 갖가지 분석도 쏟아져 나왔다. 한때 북한은 조선 여성의 전통적 미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국가적 차원에서 여성이 바지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

 

한편 치마를 버리고 바지를 입어야만 비로소 동등한 일원으로 인정받아 대등한 활동과 교류를 펼칠 수 있었던 일화도 있다. 19세기 유럽 문단에서 본격적 문인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여성 작가 조르주 상드는 남장으로 유명하였다. 70~80년대 여성 국회의원을 지낸 김옥선은 남장을 하고 의정활동을 펼쳤다. 남성들이 주류인 직업에 뛰어든 최초 여성들의 진입 스토리는 이처럼 투쟁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

 

지금은 어떤가? 질시와 견제를 넘어온 선배들의 피비린내 나는 복장 투쟁사를 딛고, 오늘날 여성 국회의원들은 파스텔색조의 의상 또는 심지어 미니스커트까지 자유롭게 입는다.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 역량을 의심받지 않으며 그 역할을 한정받지도 않는다.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는, 그래서 사소하게까지 여겨지는 복장 자유는 그리 녹록하게 얻어진 것은 아니다. 소수자로서의 여성에게 남장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 혹은 치마를 강제하는 조직문화, 이 두 가지 현상은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바닥에 깔린 정서에서 결국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는 여성 대통령을 배출하였지만, 고위직 공무원에서 여성 비율은 고작 4퍼센트이고 대기업에서 여성 임원의 비율은 1퍼센트 남짓이다. 남녀 평균임금의 차이를 보면, 남자가 100을 받을 때 여자는 65 정도를 받는다.

 

선구적 여성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개척자적 삶이 될 수밖에 없던 시대를 살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우리 사회도 남성과 여성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더욱 힘 있게 더 멀리 순항할 것이다.

한쪽 날개여, 마저 약진하라.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