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고 평화롭던 하천, 포로·피난민 넘치면서 구정물로 변해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5-14 19:57:00
- / 본지 6면
미군이 1951년에 찍은 서면 일대의 포로수용소 사진. 왼쪽 아래에 줄지어 선 것들은 군용 막사로 보인다. |
동천은 부산 근대화의 기지, 한국경제의 산실답게 물줄기 구석구석에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동천 중·상류가 복개되면서 추억과 향수가 깃든 이야기들도 어디론가 숨어들었다. '동천 재생&희망'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동천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해 소개한다.
- 거제리~서면로터리 일대
- 인민군 등 최대 14만명 수용
- 빌딩 숲 없어 속살 그대로 노출
-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물줄기
- 후유후유 긴 숨 몰아쉬며 바다로
"바로 앞사람 머리를 보세요." 선생님은 진땀이다. 일 이학년 저학년 아이들은 천방지축이다. 줄을 반듯하게 세우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예! 예!" 대답은 비단결이지만 그때뿐이다. 이내 흐트러진다. 내가 선 곳은 전포초등학교 교문. 운동장엔 저학년 아이들이 운동회 준비 중이다. 저마다 탬버린을 들고서 흔들어댄다. 탬버린 소리에 놀라서 아이주먹만한 새가 등나무 등꽃덤불로 내뺀다.
전포초등학교가 개교한 해는 1956년. 개교 이전엔 무엇이 있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6·25전쟁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수용소 규모는 어마어마해 전포초등을 가운데 두고 거제리에서 서면로터리 일대까지 포로 막사가 세워졌다. 이러한 사실은 작년 공개된 미군 항공사진에서도 입증된다. 미군 공식 사진촬영단이 이 사진을 찍은 날자는 1951년 4월 9일. 6·25전쟁이 일어난 이듬해다.
사진은 흑백이지만 선명하다. 사진 상단은 서면로터리. 당연히 부산탑이 들어서기 전의 로터리다. 부산탑은 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3년 들어섰다. 사진 하단은 집들이 촘촘하다. 고층은커녕 2층집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막사다. 전포초등 자리 막사 공터엔 까만 점들이 몰려 있다. 까만 점들이 포로라고 사진은 설명한다.
사진이 찍힌 1951년은 서면의 하천이 복개되기 전. 서면시장을 관통하는 부전천도 복개되기 전이고 황령산 아래 전포천도 복개되기 전이다. 사진에선 길인지 하천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길을 따라 하천은 이어졌을 것이고 길을 따라 물줄기는 흘러갔을 것이다. 하천 물줄기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수용소 포로들은 고향의 하천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송환포로를 제외한 대다수 포로는 고향의 하천에 다시는 발을 담그지 못한 채 세상을 떴을 것이다.
부산 포로수용소는 언제 어디에 처음 들어섰을까. 1950년 7월 24일 거제리 지금 시청 자리다. 전쟁 초기라 전쟁이 오래 갈 거라 여기지 않았고 당연히 포로가 급증하리란 짐작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러기에 수용 인원은 250명에 불과했다. 7월 여름철이라 24인용 천막을 쳤다. 포로수용소 공식 명칭은 '주한 미8군 제1포로수용소.' 미군식 표기로는 'Camp EUSAK NO.1'이며 통상 제1포로수용소(POW Enclosure)로 불리었다.
한국전쟁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8일 대전형무소 내 대전포로수용소였다. 5명을 수용했다. 전세가 밀리면서 같은 달 14일 대구 효성초등에 '제100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16일과 19일에는 영천과 영동에 미군이 관리하는 수용소가 들어섰다. 그러다가 부산 거제리 지금 시청과 경찰청, 연제구청 일대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섰다. 초기 수용인원은 250명이었으나 천막 막사를 추가하여 500명을 수용했다. 이후 5만 명을 목표로 시설을 확장했다. 그마저도 모자라 전포동 방향으로 뻗어나갔고 외곽으로 뻗어나갔다.
전포동 방향으로 뻗어나간 수용소는 제2, 제3, 제4, 제5를 거쳐 제6포로수용소까지 늘어났다. 작년 공개된 미군 사진에 보이는 막사가 이들 수용소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포로가 늘어나자 수용소를 증설했다. 수영 광안동 옛 인쇄창 부지로 추정되는 곳에 제1, 2, 3 포로수용소를 조성했다. 가야에도 제1, 2, 3 수용소를 조성했다. 수영 수용소는 대밭에 있다고 해서 '수영대밭 포로수용소'로 불리었다.
포로가 넘쳤을 때는 14만 명이나 되었다. 초기 수용인원에서 몇 백 배는 늘어났다. 수용소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유엔군은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 설치를 결정했다. 1950년 11월부터 고현 상동 저산지구 등 1200㎡(360만평) 부지에 포로수용소를 조성했다. 2월 말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1951년 3월 1일 부산 포로수용소 본부와 경비대가 거제도로 이동했다. 포로 이송은 6월 거의 완료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인원은 인민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여자와 의용군 3천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이었다.
부산 포로들이 거제도로 넘어가면서 명칭도 넘어가게 되었다. 거제도 수용소가 '제1포로수용소'가 되었다. 이후 부산 포로수용소는 전방에서 생포한 적군을 인계받아 기초조사 등을 거친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하는 보조역할을 맡았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8월 5일부터 포로가 송환되면서 부산과 거제의 수용소는 폐쇄됐다. 그때가 1953년 8월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돼 당시를 되새김질한다.
포로수용소 막사 사진을 다시 훑어본다. 막사의 하루하루는 삭막하고 살벌했겠으나 사진으로 보는 풍경은 단정하다. 평화롭게 보일 정도다. 들쭉날쭉 고층빌딩이 주는 위화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그럴 것이고 길이 훤하게 드러나서 그럴 것이다. 길이 가리면 마음마저 가리게 마련이다. 길과 함께 이어졌을 서면의 하천도 단정했을 터. 그리고 평화로웠을 터. 발을 담그고 싶고 마음을 담그고 싶은 하천이었을 것이다. 단정하고 평화롭던 하천도 포로가 넘치고 피난민이 넘치면서 종내는 구정물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구정물이 그 시대 속살이었고 다음 세대가 보듬어야 할 상처가 아니었겠는가.
"요즘도 친구들 술자리 건배사는 '개금은? 항구다!' 입니다." 부산요트협회 류재동 부회장은 서면 인근 개금 토박이. 사업체도 개금에 있다. 물길을 터 부산 곳곳에 배가 드나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건배사에 담겨 있다. 참고로 전포동 포(浦)는 포구 포. 자성대 바다에서 문현동에 이르는 동천은 물론 전포천을 따라 배가 드나들었다는 얘기다. 서면 일대가 바다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는 난망하겠지만 상상력은 산을 만들고 바다를 만든다.
포로수용소가 들어서고 늘어나고 하면서 거제리에서 서면 일대는 일대 전환을 맞았다. 지금 시청 자리 애초 포로를 관리하던 군부대는 80년대 말까지 향토보병사단으로 존립했다. 1950년 9월은 유엔군 산하 스웨덴 야전병원이 부산상고 자리에 들어섰다. 뿐인가. 태화쥬디스 자리 뒤편 신신호텔 자리로는 육군형무소가 1955년 7월 들어서 1962년 6월까지 재소자를 구보시켰고 배식 때마다 줄을 세웠다. 그런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을 서면 하천의 물줄기들. 후유후유 긴 숨을 몰아쉬며 바다로 내뺀다. 아이주먹만한 새가 꽃 덤불로 내빼듯.
# 스웨덴 야전병원
- 한국인 중환자·포로들도 치료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옆에 위치한 스웨덴 참전기념비. 국제신문DB |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의료 병력을 보내고 야전병원을 세워준 나라는 다섯이었다. 스웨덴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였다. 스웨덴 야전병원이 최초 있던 곳이 롯데백화점 자리다. 정식 명칭은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1953년 전쟁이 끝나고도 1957년 4월까지 부산에 있었다. 대연동 부경대 자리에 있기도 했다. 적십자 박애정신에 입각해 아군 부상자만 치료하지 않고 포로들도 돌봤다. 민간병원에서 다루기 어려운 중환자들도 입원시켰다. 환자가 늘면서 한국인을 대폭 채용했다. 그때 채용된 한국인들이 노벨상의 나라 스웨덴 선진 의료기술을 접하면서 1968년 국립의료원 탄생의 산파가 되었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후원: (주)협성종합건업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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