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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 재생 4.0 부산의 미래를 흐르게 하자 <4-3> 동천의 기억- 산업을 키워낸 동천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7. 6.

동천의 맑고 풍부한 용수, 국내 굴지 기업들 성장 모유가 되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5-28 19:21:56
  • / 본지 6면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 동천 변에 자리했던 옛 제일제당 공장.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됐던 기업이다.
- 서면분지의 물 동천으로 모이고
- 지하수도 풍부, 공업용수로 사용
- 제일제당·LG 화학 등 성장 원천

- 기업들 마구 뽑아쓰며 고갈 가속
- 공장들 물 부족에 1990년대부터
- 하나 둘 타지나 시외곽으로 이전

- 기업들 사용한 물 값 단 1%라도
- 동천 되살리기에 투자한다면
- 이른 시일 내에 옛 모습 찾을 것

■설탕공장 아가씨

   
지난 2006년 철거된 상태.
세태를 반영하기로 유행가만한 것이 또 있으랴? 라디오 프로에도 '세월 따라 노래 따라'가 있지 않은가. 이들 유행가 중에서도 한때 군대에서만 애창되는 노래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인천에 성냥공장'이다. 가사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 봉 두 봉, 일 년에 열두 봉/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1960,70년대에 군대를 갔다 온 사나이라면, 이 노래는 다 안다. 옛날 인천의 성냥공장이 그만큼 유명했다는 말일 것이다. 이 노래의 2절은 '인천에 성냥공장' 대신 '부산에 설탕공장'으로 바뀌고, 맨 마지막은 '꿀단지'로 끝난다. 설탕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세태를 반영한 것 같다.

이런 유명한 설탕공장이 부산 동천변에 있었다. 바로 제일제당이다.

■사탕수수 수입 대체

   
그후 포스코 더 샵 센트럴스타(아파트)가 들어선 모습. 국제신문 DB
'사탕수수가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에릭 윌리엄스). 사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는 집단 영농방식, 즉 플랜테이션이다. 당초 노동력은 아프리카의 노예들로 충당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본래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남태평양의 뉴기니 지방이었다. 하지만 15세기 이후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쿠바, 멕시코 등지로 퍼졌고, 유럽의 동인도회사들에 의해 노예무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노예무역이 막을 내린다. 이후부터는 고용방식에 변화가 온다. 일례로 1905~1910년까지 우리나라 청년들이 하와이로 사탕수수 이민을 떠났고, 이어서 멕시코로 떠난 애니깽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또한 몇 년 뒤에는 그들의 신붓감으로 한국의 처녀들이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사진 중매를 통해서라고 한다. 예전에는 노예로 노동력을 충당했지만 이 시기에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을 노동자로 고용했던 것이다.

설탕의 인기로 인해 사탕수수 재배도 세계 각처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기후 차이로 사탕수수 재배가 불가능했다. 대신 1953년 제일제당에 의해 국내 생산을 하게 된다. 물론 원당을 수입하여 정제 설탕을 만드는 것이지만, 산업 전반에 미친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식음료 산업, 교통·운수산업, 기계설비, 건설산업 등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전성시대

제일제당 창립과 더불어 많은 공장들이 잇따라 동천변에 들어선다. 1950년대 말부터 신진자동차와 락희공업(LG화학), 대선주조, 진양고무, 대양고무, 동양고무, 흥아타이어 등이 동천 중 상류에 자리를 잡는다. 이들 공장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동천의 풍부한 용수와 편리한 교통 때문이었다.

공장이 잘 돌아가려면 물이 필수다. 물은 제품의 제조과정에서 원재료나 중간제품을 냉각, 세척, 희석, 배합, 착색하는데 없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급탕, 온수, 증기 등을 얻기 위한 보일러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 물을 일러 공업용수, 산업용수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공장은 대개 하천변에 둥지를 튼다.

1950년대 초반, 부산에서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장소로는 동천변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지도를 보면, 동천이 어떻게 태어나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다. 동천은 백양산 일원에서 발원하여 서면을 관통하여 흐르다가 당감천, 부전천, 가야천, 전포천, 호계천 등 지류를 모아 부산 북항으로 흘러든다. 황령산, 엄광산, 백양산 등 굽이굽이 활개를 펼친 능선들, 이들 능선과 산골짜기들로 에워싸인 분지가 바로 서면이다. 이 서면 분지에 모여드는 물이 죄다 동천으로 들어간다. 눈에 보이는 물만이 모두가 아니다. 동천의 유로를 따라 주변 땅속에는 어마어마한 대수층(帶水層)의 존재한다. 바로 지하수이다.

■그 많은 물은 다 어디가고

동천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자연하천이었다. 1910년 성지곡수원지가 상수원으로 개발되면서 수원의 상당량이 수돗물로 전환되지만, 1950~60년대까지도 물은 넉넉한 편이었다. 지하수도 풍부했다. 지하수는 모두가 주인인 공공재지만 옛날에는 먼저 뽑아 쓰는 사람이 임자였다.

기업들은 관정(管井)을 뚫어 동천변의 지하수를 공업용수로 사용했다. 공업용수로는 지하수만한 것이 없다. 동천변의 많은 공장들은 처음에 펌프를 사용했다. 대용량 펌프로 지하수를 무한정 퍼 올렸다. 수돗물은 비싸서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관정은 땅속 깊이 파이프를 박은 우물이다. 지하수는 물론 공짜였다. 당시에는 관정을 규제하는 법이 허술했기에 기업들끼리는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유지됐다. 여기에도 경쟁은 있었다. 만약 한 공장이 지하 100m까지 관정을 뚫으면 주변 공장의 지하수가 마르게 된다. 물이 마른 공장은 다시 더 깊이 150m까지 뚫는다. 그 폐해는 곧바로 주민에게 미친다. 주택가 우물이 마르고, 동네 목욕탕이 문을 닫고, 식당이 피해를 입는다. 지하수 창고가 비는 줄도 모르고 기업들은 물을 퍼댔고, 그 여파로 동천의 대수층이 파괴되어 건천(乾川)처럼 변해갔다.

대신 물이 줄어든 동천에는 공장과 가정의 오폐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동천은 점점 숨쉬기가 어려워졌고, 자연의 물빛을 잃어갔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동천에서 구린내가 진동을 했다. 비가 내리면 물이 불어나 썩는 냄새도 희석될 텐데 왜 그랬을까? 비 내리는 날은 소위 '퍼세식 변소'를 비우는 날이었다. 동천은 앉아서 오롯이 오염물을 받아 안았다. 부산시 위생사업소에서 운영하는 분뇨수거차가 있었는데도 서민들과 사설 수거업자들은 돈을 아끼려고 무단 방류를 일삼았다. 1980년대 동천 하류 성동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지독한 냄새 때문에 공부를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동천을 되살리는 길

성지곡수원지는 1971년 5월 공업용수로 전환된다. 낙동강 물을 끌어들이는 부산시 광역상수도 망의 준공과 함께 상수원으로써 사명을 다한다. 대신 공업용수로 일일 5만 톤을 공장들에 공급했다고 한다. 이는 동천 아래 지하수 상당량이 말랐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부터 동천변의 공장들이 교외로 하나둘 이전하는데, 그 주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지하수 고갈이다.

음수사원(飮水思源). 성지곡수원지의 댐 전면에 있는 글귀이다.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한국 제2의 도시, 해양수도 부산의 근본 바탕을 마련해 준 곳이 어디던가. 바로 큰 어미 동천이 아니던가.

현재 동천변의 기업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들이 서 있다. 동천변의 기업들은 지하수가 고갈이 될 때까지 그 물로 산업활동을 했고, 또한 그 공장터를 비싸게 팔아 돈을 벌었다.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나 다름없다.

   
만약 그들이 무상으로 사용했던 동천변 지하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설탕공장을 위시하여 동천변의 숱한 기업들이 빼내 쓴 전체 물 값의 단 1%라도 동천 되살리기에 보탠다면, 동천은 기대 이상으로 빠른 시일 내에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다시금 동천에서 개구쟁이들이 멱 감고 송사리를 잡는 그날을 그려본다.


◇ 詩 / 열어라 동천!


백양산 두루두루 성지곡을 감돌아
양지 녘 동평현(東平縣) 옛 터전을 적시고
엄광산 새벽이슬 실비단비 다 모아
실팍한 줄기줄기, 당감 가야 부전천이여
황령산 고루 적셔 밭개나루(田浦)로
어허 둥개 막둥이, 얼싸 안는 호계천
이윽고 강이 되는 동천의 물길


횟배 앓던 아지랑이 방죽
물난리에도 신명나던 철부지 누이여
수출입국 공장마다 샘솟던 희망
새나라 융단마냥 아스팔트 깔리던 날
콘크리트 뒤주마냥 가둬버린 그 속에
숨죽여 울던 어미 같은 강이여


버들개지는 물이 올라도
마른 젖무덤 쓸어가며
조선의 일월(日月)인양 키워낸 그 에미,
누구냐, 뒤주 속에 가둔 것도 모자라
하마 신음소리 새나올세라, 다시 또
가면(假面)의 꽃길을 덧씌우는가
'괜찮데이, 에미는 괜찮데이'
그래도 한사코 손사래 치는
부산의 큰어미, 동천을 아시나요?


더 이상 구구한 변명은 없다
속죄의 심정으로 외치는 주문(呪文)
뭐 하노 퍼떡! 열어라, 동천!


박원호 우인엔지니어링 대표·시인(필명 박하)

후원: (주)협성종합건업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