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1876년) 전만 해도 동천에 호랑이 출몰 잦아 범내골 지명 생겨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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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21 21:17:41
- / 본지 6면
1951년 한국전 당시 미군 병사가 촬영한 동천 주변 시가지. 부산공작창 뒤쪽으로 가운데에 동천 물줄기가 드러나 있다. 사진은 당시 통역관인 이종출 예비역 대령이 제공했다. |
- 1469년 富山浦서 釜山浦로 개명
- 개항장이면서 통신사 행선지로
- 일본으로 가는 대표적 관문 역할
- 근세기 초까지 동천 나룻배 다녀
- LG·CJ 등 국내 굴지 기업도 태동
- 산업화 과정에서 오염 하천 변모
■부산항의 첫 개항지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강을 위주로 발전을 해 왔듯이 본래 부산포 동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처럼 길거나 넓지도 않고 물길마저도 깊지는 않았지만 바다와 접하는 하류부근에는 일찍이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부산부곡(富山部曲). 고려시대 특수행정구역으로 정해질 정도로 산과 하천, 그리고 바다가 조화를 이룬 부산포(富山浦)에는 고기를 잡고 밭을 일구며 노역으로 살아가는 천민들의 삶터이었지만 사람 살기에는 그만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포구 주변에는 날로 사람이 모여들었고 주거지가 커져만 갔다.
이에 못지않게 왜구들의 침탈은 날로 극성을 부려 고심거리였다. 마침내 1402년(태종 2년)에는 왜구가 부산포에 쳐들어와서 천호(千戶) 김남보 및 군사 10명을 살해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의 만행을 접하고서 이들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해방강화(海防强化)도 중요했지만 포용정책도 필요했다.
드디어 1407년(태종 7)에 웅천의 내이포와 이곳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하여 왜인의 내왕과 교역을 하도록 개항을 한 것이다. 이후로 이곳은 더욱 유동인구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왜인의 내항도 빈번했다. 1418년(태종 18)에 경상도 수군도절제사가 조정에 올린 정계를 보면 "부산포에 머무는 왜인 상고와 유녀가 일본에서 오는 무역선이 올 때는 선원들과 어울러 놀아나고 바람이 자서 배 떠날 날을 기다린다"고 할 정도였다.
■조선의 해방(海防) 교두보
성종 즉위년인 1469년에는 인근의 부산(지금의 증산)이란 산 이름에 따라 이곳 지명인 '富山浦'(부산포)가 '釜山浦'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 첨사영이 들어서면서 더욱 왜구를 막는 중요한 국토의 변방으로서 자리하였다. 그래서 15세기 중엽 부산포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는 3500명에 달했으며 이 중 수군이 육군에 비해 5배가 많을 정도로 해방(海防)의 임무가 컸다.
이러한 국방의 주요한 길목인 까닭에 임진왜란의 첫 결전지가 바로 부산진성 전투였고 적군도 임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로 정발 장군을 일컬을 정도로 부산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요새지의 하나였다. 이곳이 뚫리게 되면 동래성이 함락되고 한 순간에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임란을 통해 알았기 때문에 더욱 이 지역의 수군을 강화하고 성을 쌓아서 교두보를 만들어야만 했다.
1797년 10월14일 브라우톤 함장이 지휘하던 영국 해군 탐사선 80톤급의 프로비던스호가 부산 용당포에 불시에 도착하여 8일간 머물다 돌아간 적이 있었다. 바다로 나가면 역적이요 바다에서 들어오면 해적으로 보던 해금정책(海禁政策) 시대에 뜻하지 않던 이양선이 들어왔으니 용당포 뿐만 아니라 온 부산포가 난리가 났다. 뒷날 이 탐사선의 함장이 영국으로 돌아가서 그 때 남긴 일기를 책으로 엮었는데 그 당시 부산포에서 있었던 상황을 이렇게 들려준다.
항구 주변에는 여러 마을이 산재되어 있었으며 북서쪽으로는 포 구멍이 보이는 돌담이 둘러싸인 하나의 큰 마을이 보였으며 몇 척의 장크선들이 부두를 보호하면서 그곳에서 가까운 계선장에 정박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들은 몰래 보트를 타고 내항 깊숙이 들어가서 탐사를 했는데 이걸 어느새 수군들이 알고는 '만약에 항내 위쪽 하얀 집(자성대)이 있는 곳으로 상륙을 하게 되면 험한 대접을 받을 것이며 만약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이양선을 해적으로 보고 접근금지 경고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부산포는 당시 동래부의 개항장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것이다. 1609년 6월28일에 체결된 기유약조(己酉約條)로 인해 부산포는 조선통신사의 행선지가 되면서 일본을 통하는 대표적인 관문으로 자리잡는다.
■우리나라 산업의 발상지
범내골은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호랑이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이 범내골 하천에는 개항 전만 하더라도 호랑이가 나왔다고 한다. 인근에 있는 증산이 산세가 험하고 숲이 울창해서 호랑이가 기거할 정도였는데 이들 호랑이가 물을 먹기 위해 이곳을 찾거나 아니면 물을 먹으러 오는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자주 출몰했던 것 같다.
근세기 초만 하더라도 이 동천을 따라서 나룻배가 범내골까지 드나드는 갯마을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적인 개항을 계기로 용두산 쪽으로 힘이 실리면서 일본의 거점도시화가 되며 증산 쪽은 서서히 소외되는 공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엔 조선방직공장 등과 같은 부산을 대표하는 산업시설이 하나 둘 동천 주변으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해방과 더불어 귀환동포가 들어오고,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CJ제일제당과 LG화학(당시 락희화학)등 굴지의 기업들이 태동한 곳도 이곳 동천 일원이었다. 서면을 중심으로 사통팔달의 교통망이 열리고,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동천은 도시산업 문명의 찌꺼기를 받아 안는 오염 하천으로 변해갔다.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곳이 동천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동천은 변함없이 부산항 북항을 향해 흐른다. 예나 지금이나 동천과 부산 북항은 한몸인 것이다. 근대 개항과 함께 동천 하류는 서서히 뭍으로 변하고 그 전날 통신사 선박이 돛을 올리던 선착장은 육지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부산포에 서린 역사의 향기는 왜구에 의해 뭉개진 산봉우리가 없는 증산 주위를 맴돌고 있다.
# 부산 내항 유람선투어 유인, 범내골 동천 선착장 조성을
부산은 뱃길로 세계를 통하는 아름다운 항구다. 그래서 누구나 부산항에 오면 한 번 쯤 배를 타고 항만을 한 바퀴 둘러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이런 욕망을 해소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바로 부산항 투어다. 일반시민이, 그것도 바다를 잘 모르는 외지인이 부산에 와서 관광 차원에서 유람선을 한 번 타보는 것이 쉽지 않다. 문제는 접근성이다. 지금처럼 영도 태종대나 해운대 미포까지 가서 유람선을 탄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오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혹시 폭풍주의라도 발효되거나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어도 운항이 힘들어 지는 등 해상 날씨가 운항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유람선 구조도 부산항 특성에 맞는 불꽃놀이나 야경 등을 보기에 적합한 오픈형이 아니라 스피드와 파도타기에 더 기능이 실린 선박이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부산항은 북항재개발 사업 등으로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올해 안으로 사장교인 북항대교가 개통이 되고 영도대교마저 도개 기능을 살려서 다리를 들어 올리게 되면 한층 부산항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할 것 같다. 특히 야간에 북항대교, 부산대교, 영도대교, 남항대교가 일제히 조명시설로서 불을 밝히게 되면 부산항은 그야말로 다리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 정도라면 부산 내항을 둘러보는 전천후 유람선 항내 투어라도 한 번쯤 욕심을 낼만하다. 이러한 주변 환경 변화에 맞추어서 부산항을 알리고 부산항 유람선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서 도심 속 범내골 동천에 유람선 선착장이라도 하나 만들어 보면 어떨까. 예전에 나룻배가 오르내리던 곳에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이 오가게 되면 정말 생동감이 넘쳐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흐르는 동천에 뱃길을 터주면 물의 흐름이 더욱 좋아 수질개선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 관장
후원: (주)협성종합건업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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