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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편집국에서] 누가 ‘진보’를 두려워하랴 / 강희철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17.

등록 : 2013.01.16 19:06 수정 : 2013.01.16 19:06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 대통령 선거 다다음 날 <레미제라블>을 봤지. 자네도 봤다면서. 그래, 뭐가 제일 눈에 들어오던가. 난 바리케이드 장면이 내내 기억에 남더군. 학생들이 그랬지, 우리가 바리케이드를 치면 민중이 몰려나올 거라고. 그러나 결과는 한참 달랐지. 우리 대선과, 아니지, 그보다는 진보개혁진영의 처지와 겹쳐 보이더군.

 

왜냐고? 대선이 끝나고 나서, 진보진영이 제일 먼저 뭘 들고나왔나. 50대 반란론 아니었나. 그들의 탐욕이 다 이긴 대선을 망쳤다는 식으로. 근데 그걸 뒤집어 보면 ‘투표함을 열 때까지도 우린 50대를 몰랐다’는 고백 아닌가. 모르는 게 어디 50대뿐이겠나. 민주노총의 조직률은 얼마나 되나. 5% 안팎 아닌가. 가뜩이나 많지 않은 전교조 조합원 수는 왜 자꾸만 줄어들까. 시민단체들엔 돈 내는 회원이 얼마나 되나. 사람과 사회의 보수화에 모든 탓을 돌리는 사이 진보진영의 뿌리는 갈수록 부실해지고 있지 않나.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과 생각을 오독할 수밖에. 보수를 ‘깜깜이’ ‘불통’으로 대놓고 야유하기엔 왠지 자격미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대선에서 진 건 민주통합당인데, 왜 진보진영을 걸고넘어지냐고? 후보는 민주당이 냈지만, 진보진영이 보수진영과 그야말로 총력전을 벌인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아닌가. 그러니 책임의 경중은 가리더라도, 민주당과 친노만 일방적으로 닦아세우는 건 자칫 비겁한 처사로 비칠 수 있어. 그른 진단에 바른 처방이 가능하기나 한 소린가.

 

이 대목에서 에릭 호퍼라는 현자가 생각나는군.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던 그는 이런 관찰기를 남겼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분열되어 필사적인 이기주의로 치닫는다. 희망이 결합되지 않는 한, 함께 고통을 겪는 것 자체로는 단결도 서로 베푸는 정신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맹신자들>) 밥줄이 포도청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궁리는 ‘머리’로 하되 설득엔 ‘가슴’을 앞세우라는 가르침인데, 진보진영은 설득 이전에 궁리부터 그르친 것 아닐까.

 

마침 문재인이 대선 패인의 하나로 ‘진영논리’를 짚었더군. 일례로, 진보진영에서 ‘성장’은 일종의 금칙어가 아닌가. 한데, 진보적이라는 어느 신문 신년호를 보니 복지확대 대신 경제성장을 고른 사람이 66%나 되더군. 이제 감이 좀 잡히나. 진보진영에선 선별복지의 ㅅ자만 들먹이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지. 반값 등록금도 좀 사는 집 애들과 그렇지 못한 애들을 차등 지원하자고 하면 의심받기 십상이고.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이쯤 되면 종교고 교리야, 정통과 이단 에 목숨 거는. 환경은 자꾸 바뀌는데, ‘동종교배’만 하던 생물이 종국엔 어찌되던가.

 

“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듯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듯하다.” 뜨끔하지 않나. 조지 오웰이 1930년대에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한 글이지만, 마르크시즘의 세례를 부정할 수 없는 진보진영에겐 여전히 유효해 보여. 사회주의는 몰락했지만, 작풍은 남았거든. 똑똑한 ‘우리’가 그렇지 못한 ‘너희’를 이끌어야 한다는. 정작 ‘너희’의 실체도 모르면서.

 

일껏 시비를 걸더니 기껏 그 얘기냐고 할지 몰라도, 기초체력이 돼야 처방이든 수술이든 할 수 있지 않겠나. <레미제라블>의 무너진 바리케이드 위로 공화정이 세워진 건 자그마치 16년 뒤의 일이라네. 겸허해지라는 말일세.

 

#. 어지럽다. 통음의 기억만 또렷할 뿐 ‘화자’의 얼굴은 가물가물하다. 꿈속인지 생시인지, 그와 나의 대화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적어둘 뿐이다.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은 어쨌든 필요하니까.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