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성 소설가 |
그가 붉은 옷을 입고 얼음 위에 내려섰을 때 이라크에서는 여전히 포탄이 날고 있었다. 셰에라자드 고향 근처. 만년을 살고도 버텨낸 문명의 기억 우르가 무너져 내릴 때, 길가메시와 미트라가 박물관 구석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얼음은 셰에라자드 이름을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춤은 천일 밤과 또 하룻밤에 하루를 더하고 있었다. 포연 가득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 바그다드, 북쪽 쿠르드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얼음이 불타오를 수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천년 전 십자군전쟁 때 술탄 살라흐 앗딘 유수프가 쓰러진 적군 사자왕 리처드 1세에게 전쟁을 녹이는 얼음과자 아이스크림을 보냈던 아르수프 평원이 그 얼음판이었을 게다, 필시. 펄럭이는 붉은 옷자락은 살아나라, 살아나라 비손하는 기도가 되어 평화를 춤추고 있었다. 셰에라자드가 밤을 잇는 이야기로 술탄에게서 저 밤의 목숨들을 건져냈듯. 천사가 흰색인 줄 알지만 그날은 빨간 옷을 입고 찾아왔던 걸 천일 밤도 더 지난 지금껏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에 목숨을 건 밤이든, 정염에 청춘을 차압당하는 나날이든, 모든 죽음은 직선이다. 그 빠른 직선이 곡선으로 휘감아 올라가는 게 죽음의 춤이다. 150년 전 잭슨 헤인스가 발레 동작과 음악을 얼음 위로 끌고 온 것은 기필코 그를 위한 것이었다. 두꺼운 부츠 바닥에 날을 박고 앞쪽에 톱니를 만들어 발끝으로 뛰어오르게 한 토 점프에 실린 죽음은 그의 몸을 빌려 대중의 고독 앞으로 날아올랐다. 죽음의 춤은 애초에 저 흑사병 따위 광란에서 태어났다. 음악과 어우러진 거듭 꺾이는 그의 목과 손짓과 눈빛은 악마적 설화를 문명사회 조명 아래 눈부시게 부활시켜 냈다. 항생제 덕분에 거의 사라진 듯한 전염병 대신 등장한 광폭한 자본의 위세, 긴 불황, 피곤한 정치에 주눅 든 대중에게 그의 움직임은 깨어나라, 깨어나라 속삭이고 있었다. 한 가지에서 벋어난 죽음과 생명이 새로 만나는 곳에 대중의 눈이 있었다. 생상스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게다. 제 선율이 제 선율보다 강하게 죽음 사이를 직각의 바이올린 스타카토로 헤집어 죽음과 생명의 환희, 운동과 예술을 그토록 하나의 몸짓으로 조형해내리란 것을. 죽음이 혀를 내밀어 농밀하게 핥은 자리마다 셰에라자드야, 신묘한 너의 밤은 되살아났다.
그리고 레미제라블이 있었다. 인간은 어쩌다 신과 교접할 때가 있다. 그것은 오직 시와 음악과 섞인 몸짓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훈련을 거듭한 사람의 육체가 때로 영혼에 가까울 수 있음을 그는 언 물 위에서 다시 황홀하게 입증해 보였다. 레미제라블은 그날 위고의 펜끝을 떠나 그의 발끝에서 새로 태어났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에포닌의 눈물은 파리만이 아니라 그대의 서울 거리 구석구석 얼어붙은 바리케이드에서 꼭 한번 이렇게 녹아내렸다.
세 가지 얼음춤은 근육운동의 최정점으로 전쟁과 흑사병 같은 날들과 저 레미제라블과 이 레미제라블을 관통해갔다. 그는 종족적 자부심을 넘어선 21세기 이후 두어 사람 중 하나다. 한낱 스물 남짓한 이에게 어김없이 과분한 이 말은 허투루 내뱉는 언사만은 아니다. 그가 딛고 있는 얼음이 그러하듯 그는 세 가지 또 다섯 가지 얼음춤으로 벌써 한 생을 살아냈다. 앞으로 또한 셰에라자드이리라. 다만 자본의 굴레에서 한 뼘 남짓 뛰어오르기를. 그 약동하는 이름을 끝에 밝혀 놓는다. 김연아!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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