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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공작소 <4-3> 부산 중구 스토리텔링- 팩션 - 양산박에서 문화의 108두령을 만나다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2. 19.

그곳은 인정과 예향이 흐르는 문화 창조의 공간이었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2-18 19:20:23
  • / 본지 6면
   
부산 중구 동광동 골목에는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술집이 몇 군데 남아 있다. 분위기가 예전같진 않지만 '부산포'와 '강나루', '양산박'이 그런 곳이다. 이곳들은 알게 모르게 지역 문화사랑방 기능을 수행한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어스름해지면, 양산박에 시인 소설가들이 고기떼처럼 몰렸다
수령은 요산도 향파도 아닌 영생당 이승희였다

내 우산 속에서 완월동까지 걸어온 그녀가 말했다
"김 작가, 호리병에 갇힌 새를 구원할 방법은 정말 없을까?"

그 누구도 정복한 적 없는 여신의 몸과 이층을 만들었고, 절정의 순간 호리병은 깨졌다

그날 이후 영생당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롱박 안에 든 새를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을까?"

김성학이 처음 양산박에 들렀을 때 영생당 누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린 새끼 새를 조롱박 안에 넣어 모이를 주며 키웠는데 몸집이 아주 커졌다. 그런데 조롱박을 깨뜨리지 않고 그 큰 새를 끄집어내는 방법이 뭐냐는 것이다. 명랑하면서도 묘하게 슬픔에 젖어 있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조롱박에 갇힌 새처럼 답답한 삶을 살던 어두운 시대에 던진 멋진 질문이자 화두였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마치 불교의 무(無)자 화두처럼 생각할수록 막막했다.

양산박은 김성학이 사는 광복동의 포장마차였다. 달랑 리어카 하나에 막걸리와 소주를 파는 곳이었지만, 어스름해지면 부산의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무용가, 기자 등 문화관계 종사자들이 집어등 아래 모여드는 고기떼처럼 몰려들었다. 자유롭게 말하기가 힘들었던 그때 그곳에서 많은 예술인들이 술을 마시며 말하고 울고 웃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명멸했다.

김성학은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백일장 대회에 나가 시와 산문부에서 장원을 여러 번 했다. 낭만적인 문학도가 부산의 B대에 진학하면서 과격한 문학전사가 되었다. 그가 경험한 부마항쟁은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그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고, 5·18 광주사건 이후에는 매일같이 지하골방에 들어가 반정부 유인물과 대자보를 썼다. 총학 문화부장으로 갈고 닦은 필력으로 소설을 써 민족문학계열이었던 C잡지에 응모해 신인문학상으로 당선되었고, 이듬해 나온 창작집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제법 명망 있는 대학생 작가가 되었다.

   
'강나루'
그 즈음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하고 있었다.

첫째, 대학을 졸업하면 얼른 조롱박 속같이 답답한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간다.

둘째, 퇴폐적이고 낭만적인 예술판(?)과는 결연하게 절연한다. 전투적 리얼리스트는 속물적 예술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적어도 양산박에서 영생당 누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대학 3학년 말인가, 남포동 야간시위가 끝난 뒤 갈증이 나 양산박에 들러 목을 축이고 있었다. 구석에서 술 취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자해보까?"

"예?"

그는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한분 자해보자니까."

술이 잔뜩 취한 여자였으므로 무시하고 막걸리 잔만 뒤집은 뒤 일어섰다.

"아, 거참 영생당 누나가 한번 잘해보자는데 일어나면 예의가 아니지."

양산박의 주인 윤진상이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도 유명한 소설가였다. 그러자 영생당 누나의 주변에 서너 명의 주객이 앉아 참섭을 하기 시작했다.

"영생당이 조매 안 그러는데 오늘 총각이 맘에 들었는갑다. 앉아봐라."

"이거 영생당이 오늘 영계 한 마리 잡는 거 아이가."

그러나 그는 단호히 일어섰는데 영생당의 말이 뒤통수에 꽂혔다.

"니 이 동네 사는 대학생 소설가 아이가. 배추 겉절이 같은 놈!"

나를 소설가로 알아보는 것보다 '배추 겉절이 같은 놈'이라는 말이 나의 발을 꽉 잡았다.

"니 글 읽어봤다. 우선 먹기 좋은 겉절이 같이 달달하더라. 그러나 양산박의 이 묵은 김치처럼 깊은 맛은 없더라."

영생당의 그 말에 김성학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뭔가를 반박하려고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반백의 노인이 말했다.

"일마야, 나도 니 소설 읽어봤데이. 기백은 있으나 여운이 없더라. 소설 책은 딱 덮었을 때 에밀레종 소리가 나야 하는 기라. 두우우웅 두우~웅 긴 여운이 남아야 하는기라."

그는 부산 문단의 중심이자 낙동강의 파수꾼인 요산 김정한 선생이었다. '사하촌'과 '모래톱 이야기'는 영어와 일어로 번역되어 일본과 중국, 미국과 유럽에서도 읽히고 있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작가였다.

"마, 시대와 불화하는 정신은 좋다. 언제 젊은 네 놈이 여기에 나타나나 우리 모두 기대하고 있다."

요산 선생과 함께 부산 문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향파 이주홍 선생이었다. 이들은 이미 김성학의 작품을 읽었고 자연스레 양산박에서 즉석 합평회를 한 셈이 되었다. 통성명을 하고나서야 김성학은 양산박에 모인 술꾼들이 그가 오래토록 사숙해온 문단의 대가들이라는 걸 알았다.

양산박은 이름 그대로 수호지의 산채였으며 이 산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내로라하는 문화적 두령이었다. 그런데 이 양산박의 수령(首領)은 요산도 향파도 아닌 영생당 이승희였다. 그 여자는 김성학보다 12살이나 많은 띠 동갑이었다. 이화여대 무용과 출신이라는 그녀는 양산박 술집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여왕벌처럼 좌중을 지배했다. 아리따운 여신급 미모와 출중한 언변, 그리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 밝은 얼굴에 물안개가 어려 있는 묘한 우수의 눈빛은 주변의 남자들을 모두 영생당 교주의 교도로 만들어버렸다.

영생당은 수호지 양산박의 급시우 송강과 같은 존재였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있으면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과 같은 자도 화(花)화상 노지심 같은 이도 그녀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고분고분해져서 애교를 떨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그날 양산박은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비 내리고 공치는 날이었다.

아무튼 양산박에서 즉석 합평회를 한 뒤로 김성학은 양산박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목에 깁스를 하고 뻣뻣하게 다니던 김성학은 양산박의 두령들 앞에서는 술자리의 말석을 지키며 다소곳해졌다.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문화계의 108 두령들이었다.

연극 '오구'를 만들어 한국 연극을 세계에 알린 이윤택, 미국 라이프지에 그의 사진이 실렸던 세계 10대 사진가 중 한 명이었던 최민식, 우리나라 동시를 시적 지평까지 끌어올린 최계락 그리고 영생당은 우리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미국에까지 소개하는 무용가라고 했다. 그런데 특히 최화수가 논픽션 '양산박'을 써서 신동아에 당선되고 난 뒤 리어카 양산박은 예술 명소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자, 6·25 때처럼 전국의 예술가들이 양산박으로 몰려들었다. 난타의 송승환, 소리의 마법사 김벌래, 사물놀이 김덕수도 마치 성지순례하듯 양산박을 다녀갔다. 이제 양산박은 전국화 국제화되기 시작했다.

그날은 비가 내리는 날인데도 갈증이 나 김성학은 양산박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그날따라 그 많은 두령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양산박에 산채가 하나 더 생겨 원래 있던 산채는 소설가 윤진상의 성을 따 윤산박이 되고 새로 생긴 산채는 임명수 시인의 성을 따 임산박이라 하여 이름 그대로 양(兩)산박이 되었다.

그날 윤산박에 오로지 영생당만이 앉아 소주를 마시며 까무룩거리고 있었다. 임산박을 거쳐 왔으니 전작이 꽤 된 셈이었다.

"김 작가, 비도 오는데 우리 걷자."

"아, 좋지요."

그녀는 내 우산에 들어와 광복동에서 자갈치 바닷가로 해서 충무동으로 걸어갔다. 늘 선배들과 그녀를 두고 눈치를 보며 경쟁했던 김성학은 기다리다보면 오늘 같은 날도 오는가 싶었다. 비의 냄새와 간조름한 자갈치 바다의 냄새를 맡으며 걸어가며 영생당은 부산의 예술주막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 6·25때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내려왔는지 아니? 남쪽이라면 마산도 있고 진주, 여수, 목포도 있었는데 말이야."

"대마도가 가까우니까 일본으로 도망가기 위해서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 부산에 영도다리가 있기 때문이야. 한국사람 치고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 그래서 남으로 내려가면서 무조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한 거야."

영생당은 6·25때 부산의 예술센터였던 광복동의 밀다원과 르네상스 다방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김동리는 '밀다원시대'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그 소설에서 이중구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밀다원'의 분위기를 '층계를 반쯤이나 올라갔을 때부터 다방에서 나는 사람들의 소리가, 닝닝거리는 꿀벌떼 소리 같이 고막을 울렸다'고 말했다. '밀다원'에 있어서의 '蜜'은 글자 그대로 '꿀'을 의미한다. 밀다원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문인들이 전쟁의 아픔을 잊고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덮여주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구상 등이 밀다원에서 안식을 찾았다면 천재화가 이중섭은 르네상스 다방에서 안식을 찾았다. 그는 다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은박지 그림을 그렸으며 그곳에서 그림 전시회를 했다.

"이중섭의 대표적인 그림 '황소'가 르네상스 다방에서 전시된 뒤 쌀 한 말에 팔렸지. 지금은 수백억 원대를 호가하지만."

나는 영생당을 통해 부산 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이 다방이든 술집이든 인정과 예향이 흐르는 창조의 공간이었다.

우리는 걷고 걸어 어느덧 충무로2가인 완월동 앞까지 와 있었다. 비가 오는데도 유리관 안에 아가씨들은 곱게 몸단장을 하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힛빠리(호객꾼)들이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리관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영생당이 유리방에서 곱게 화장하고 앉아 있는 아가씨들을 한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김 작가, 정말 호리병 안에 갇힌 새를 구원할 방법은 없는 걸까?"

"결국은 호리병을 깨뜨려야 하지 않을까요?"

"호리병은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런 조건 자체가 잘못된 거죠. 왜 그것만은 안 된다는 거죠?"

그날 밤 김성학은 영생당을 거칠게 모텔로 밀어부쳤다. 양산박에 출입하는 그 누구도 정복을 하지 못했다는 여신의 몸과 이층을 만들었다. 절정의 순간에 호리병은 깨어지고 호리병 속에 갇힌 새는 하늘을 날았다.

영생당은 그날 이후 양산박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김성학은 영생당이 사라진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찾았으나 오리무중이었다. 다만 몇 가지 괴소문이 들렸다.

"영생당 남편이 빨갱이로 무기징역 받고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이 있던데."

"맞아. 남편이 들어가고 난 뒤 영생당은 하야리아 부대 앞에서 춤도 추고 술도 따르는 양색시가 되었다더라."

"그런데 얼마 전에 미군 장교를 만나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더라."

"영생당이라는 예명의 뜻이 뭔지 알아? 남편이 하던 한약건재상 이름인데 공산주의 지하당 조직 이름이기도 하단다."

김성학이 그녀를 수소문하면 할수록 알맹이는 없고 소문만 벌초하지 않은 무덤처럼 무성했다.


◆ 양산박과 다락방

- 부산 예술 발원지…영감·애환·담론 생산
- 리어카 한 대, 또는 5평짜리 조그만 주막이 전국의 문화 주도한 허브 역할

   
'양산박'
부산시민들은 부산을 '문화의 불모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부산 밖을 나가보면 모두들 세계적으로 성공한 부산국제영화제와 광안리 불꽃축제, 자갈치 시장의 활력을 보고 부러워한다. 부산의 이러한 문화적 활력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나는 부산의 예술가들의 삶과 영감, 애환과 담론을 생산해낸 낭만적인 예술주막과 다방이 있었기에 부산이 세계적인 문화 예술의 도시가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중구 광복동에 위치했던 양산박과 다락방은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나아가 동아시아와 세계 문화의 허브(Hub) 역할을 했다. 그런데 양산박이 리어카 한 대에 조그만 포장마차에 불과했고, 다락방은 겨우 5평에 불과했다는 것을 믿기나 할는지. 여기서 우리는 예술이야말로 양이 아니고 질이며, 하나에서 무한대를 창출하는 불가사의한 힘임을 알 수 있다. 낙동강의 1300리의 발원지가 태백의 작은 연못이듯이 이들 조그만 예술주막에서 장대한 부산의 문화예술이 흘러나온 것이다.

중구가 뒤늦게나마 백산상회 일대의 거리를 '문인의 거리'로 조성하려는 것은 잘한 일이나 부산문화의 발원지인 양산박, 다락방, 강나루, 계림, 부산포를 복원하고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브해 실질적으로 활성화된 문인의 거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면의 바보주막, 만덕의 강촌별곡 등 지금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예술주막들을 네트워크화하고 벨트화 해 제2의 밀다원시대, 양산박 르네상스가 다시 한 번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필자 김하기 약력

   
김하기 소설가
부산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부산대 대학원에서 '황석영과 이문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산대 부경대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창작과 비평에 '살아있는 무덤'으로 등단해 '완전한 만남' '천년의 빛' '식민지 소년' 등 16권의 책을 썼다. 소설가, 작가, 칼럼니스트로 한국인의 창의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 방위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김하기 소설가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중구,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