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의 시민 봉기는 지금도 그 성격이 혼란스럽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조선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일어난 대구폭동이라고 매도했다.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학계와 관련자들은 대구항쟁으로 성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정의 토지 및 식량 정책 실패와 일제 부역 경찰의 과잉 진압이 빚은 시민 봉기라는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도 조심스러웠던지 ‘대구 10월 사건’이라는 중립적 이름을 취했다. 다만 공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된 사람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상을 권고했다.
이런 현실에서 부산지법이 대구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대구사건에 직접 혹은 가족이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경찰에 연행돼 살해됐으니, 국가의 배상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과거사위가 2010년 조사 결과 발표에서 국가 배상을 권고한 희생자만 60명에 이른다. 게다가 사건 당시 7500여명이 체포 구금돼, 취조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거나, 석방 뒤 경찰 및 우익단체에 의해 가옥과 재산을 파괴·몰수 당했다. 그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 오랜 동안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당장 명예회복과 배상이 이뤄져야 하나 현재의 구조로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과거사위조차 정리하지 못한 대구사건의 성격도 하루빨리 정립해야 한다. 진정한 명예회복은 사건의 제대로 된 성격 규정 위에서만 가능하다. 재판부는 대구사건이, 미군정의 친일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및 강압적인 식량공출 시행 등으로 말미암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보았다. 대구 봉기는 10월3일 계엄군의 진주로 사실상 진압되지만, 10월6일까지 경북 전역으로, 12월 중순까지는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재판부의 판단대로 대구 시민의 불만은 전 국민의 불만이었다. 심지어 군경 및 극우단체의 과잉 진압과 무차별 테러가 일부로 하여금 야산대를 조직하고 빨치산에 합류하도록 했다고 재판부는 보았다.
대구 10월 사건은 해방공간의 비극을 폭발시킨 도화선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큰아버지인 박상희씨도 그 와중에서 피살됐다.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로당에 가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런 사건에 대해, 피해자 가족이 일일이 법정 소송을 통해 명예를 구할 순 없다. 특별법 제정을 통해 성격을 바르게 정립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일괄 치유하고, 역사적 교훈으로도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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