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원공무원으로, 2005년부터 인터넷신문과 블로그 등에 법조 관련 글을 써오고 있다. 언론에서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판결에 대한 분석, 판사 인터뷰, 사법 개혁과 관련된 글을 주로 발표했다. 어렵고 딱딱한 법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글쓰기 능력으로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2010년 1월 <생활법률상식사전>(위즈덤하우스), 2011년 5월 <생활법률해법사전> 을 펴냈다. [페이스북, 트위터, 전자우편(야후)은 jundorapa]
예비군 훈련을 대신 받는 일로 용돈 벌이를 하는 천달수(박중훈). 의뢰인이 송금한 사례비 5만 원을 찾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가 100억 원이 통장에 입금된 사실을 확인한다. 천달수는 그 돈을 찾아서 물 쓰듯 쓰기 시작하는데…….
오래된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의 한 장면이다. 어느 날 내 통장에 거금이 들어왔다면? 혹은 길거리에서 돈을 줍거나 지하철에서 고가의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외국에 회사를 차린 A씨. 의욕을 갖고 시작한 사업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적자는 쌓이고 직원들 월급은 밀리고 거래처의 빚 독촉은 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A씨는 은행 잔고를 확인해보고 깜짝 놀랐다. 정체불명의 돈이 4억이나 입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웬 횡재인가 싶었다. 돈을 송금한 사람은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도 해봤지만 일단 쓰고 보기로 결정했다. 거래처의 빚을 청산하고 직원들 월급을 줬다. 그렇게 숨을 좀 돌리고 나니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송금한 사람이 고소를 한 것이다.
잘못 입금된 통장의 돈은 돌려주는 게 맞다. A씨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사상으로는 반환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이게 형사처벌 대상인지 따져보자. 크게 3가지 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절도, 횡령, 점유이탈물횡령죄.
먼저, 절도죄의 법조항은 이렇다.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절도는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는 행위”이다. 형법에서 절취란 남의 물건을 주인 의사에 반해 가져와야 성립한다. 이씨는 통장에 이미 들어온 돈을 써버렸을 뿐 남의 돈을 빼앗아 온 것이 아니므로 일단 절도는 아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횡령과 점유이탈물횡령죄다. 두 죄를 비교해보자.
횡령-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그 반환을 거부한 때
점유이탈물횡령-유실물, 표류물 또는 타인의 점유를 이탈한 재물을 횡령했을 때
횡령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보관하는 사람이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을 기본으로 한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직원이 회사 돈을 몰래 빼돌리는 것이다. 또한 할인해주겠다고 받은 약속어음을 자기 빚을 갚는 데 써버린다거나, 팔아달라고 부탁받은 보석을 판매한 후 돈을 챙겼을 때 횡령죄에 해당한다.
점유이탈물횡령은 어떤 죄일까. 주인의 손을 떠난(점유를 이탈한) 물건 등을 챙겼을 때 성립하는 죄이다. 예를 들어 잘못 배달된 편지나 택배를 받았다가 돌려주지 않거나, 가게에서 거스름돈을 많이 돌려받은 것을 알고도 챙겼을 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노트북이나 가방 따위를 몰래 가져왔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도 엄연한 점유이탈물횡령이다. 징역 1년 또는 벌금 300만 원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
사례에 나온 A씨의 경우를 보자. 1심과 2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A씨를 점유이탈물횡령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횡령죄에서 재물의 보관이라 함은 위탁관계가 있어야 한다”며 “피해자의 돈은 점유를 이탈해 우연히 이씨의 계좌에 입금된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입금된 돈은 점유이탈물”이라는 것이다. 즉, 우연히 입금된 돈에 대해 계좌 주인이 재물을 보관할 지위에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검찰은 법원의 판단에 수긍할 수 없었다. 유사한 판례에 비추어 볼 때 횡령죄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검찰이 염두에 둔 사례는 2005년 사건이었다. 내막은 이렇다.
B씨는 자신의 부동산을 C씨에게 7억 원에 팔기로 하고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현씨는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으로 나누어 지급하기로 하고, B씨는 잔금 지급일에 부동산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약속대로 계약금과 중도금을 이미 보내 준 C씨는 마지막으로 잔금 3억 원을 B씨에게 보냈는데 직원의 착오로 2번 입금하는 실수를 했다. 그런데 B씨는 이 돈을 돌려주지 않고 모조리 써버렸다. 오히려 “나는 정당하게 받은 돈이며 남은 돈도 없다”며 배짱을 부렸다.
이때 법원은 “착오로 송금된 3억 원에 대해 B씨는 신의성실의 원칙상 돈을 보관하는 자의 지위에 있다”며 “이 돈을 임의로 소비한 행위는 횡령죄”라고 판단했다. B씨는 이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은 A씨와 B씨의 사례가 같은 사안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B씨와 C씨 사이에는 계약관계가 있었던 반면, A씨는 생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입금을 받았기 때문에 ‘보관자’로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까지 왔다. 대법원은 이렇게 정리를 했다.
어떤 예금 계좌에 돈이 착오로 잘못 송금되어 입금된 경우에는 그 예금주와 송금인 사이에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보관관계가 성립한다. 송금 절차의 착오로 입금된 돈을 임의로 인출해 소비한 행위는 횡령죄에 해당한다. 송금인과 별다른 거래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거래관계가 있건 없건 통장에 들어온 돈은 잘 보관할 의무가 있다는 결론이다. 결국 A씨와 모두 횡령죄가 적용됐다. 통장에 정체불명의 돈이 입금됐다면 함부로 쓰지 말자. 어떤 이유가 됐건 간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할 돈이다. 마음대로 썼다가는 횡령죄가 된다. 공금에 손을 대는 것만 횡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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