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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그 형사도 법정에서 증언하다 말고 울었다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20.

그 형사도 법정에서 증언하다 말고 울었다

등록 : 2012.12.28 19:14 수정 : 2013.01.20 10:46

2009년 1월20일 새벽, 경찰이 서울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점거농성중인 용산구 한강로 3가 한 빌딩에서 강제진압에 나서자 망루가 화염에 뒤덮이고 있다. 진압작전에 나섰던 특공대원들 중엔 철거민들이 망루 안에서 아예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이들이 있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27> 용산참사 사건(상)

아직 해가 오르기 전,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엔 잿빛 구름이 떠 있다. 배경이 된 시커먼 고층빌딩 창문엔 불빛들이 보인다. 그 앞 누런 타일을 붙인 4층짜리 용산 남일당 건물. 그 옥상 위에 함석으로 지은 남색 망루가 진홍빛 화염 속에서 활활 불타고 있다.

“저 안에 사람들이 있어요. 저 안에 사람들이 있다구요. 아아, 이걸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엉엉…. 야, 이 개새끼들아. 내려가 이 개새끼들아. 엉엉….

안에 계신 분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건 아닙니다. 엉엉….”

인터넷 티브이 방송 <사자후>에서 진행자가 진압 상황을 생중계하다가 화염 속 망루가 무너지는 걸 보며 엉엉 울어댄다. 그리고 정신없이 소리치고 또 경찰을 욕한다.

이건 이 시대의 지옥도였다. 우리 모두가 만든 무간지옥 (無間地獄).

 

볼 때마다 눈물 나는 동영상, 이건 아니다

 

무간지옥에서 우리 모두는 옥졸들에게 살가죽이 벗겨져 그 살가죽에 꽁꽁 묶인 채 불에 던져지고, 벌겋게 단 쇠스랑에 팔도 끼워지고, 배도 끼워지고, 다리도 끼워질 게다.

나는 용산재판을 하면서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져 불이 났다는 검찰 주장을 반박하느라 이 동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제 속도로도 보고 2배, 4배, 8배 느리게 해서도 보고, 수도 없이 보았다.

3년이 지나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에서도 또 보았다.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이건 아니다.

그래도 이 무간지옥에도 희망은 있다.

남의 동네 딱한 형편 도와주러 왔다 갔다가 여럿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냥 망루 짓는 거 도와주고 자신들 동네로 돌아갔다면…. 그중 셋은 불에 타 죽었고, 몇몇은 3, 4년째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김창수도 그들 가운데 하나다. 자기 동네도 다 쫓겨나게 생긴 판에 용산 철거상인들 도우러 왔다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심 최후 진술에서 이랬다.

“용산참사 이후 철거민들을 테러집단, 폭력집단, 반정부단체라고 낙인찍은 경찰과 정치인들에 의해서 저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분노와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같은 처지에 있는 철거민들과 서로 돕고 함께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용산 이충연 위원장이 방송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 ‘저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저희들 동지 이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동지들 욕하지 마세요’ 하는 대목에 공감이 갑니다.

두세시간만 도와주면 그들의 희망을 세울 줄 알았습니다. 만 하루 만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그들의 희망을 산산이 깨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2심에서 4년형이 선고되자 김창수의 처가 노모와 어린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사무실에 찾아왔다. 그 자리에는 전국철거민연합 간사와 용산대책위 박래군도 함께했다. 그 처 자신도 같은 동네 철거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였는데도, 막상 남편이 무려 4년을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현실이 감당이 안 되었나 보다. ‘왜 용산 사람들은 애들 아빠를 죽을 자리에 불렀느냐’고 하소연했다.

박래군이나 전철연 간사나 모두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역시 이전에 남의 일 돕다가 몇 번씩 감옥에 갔었다. 박래군은 그 뒤 ‘남의 일’인 용산대책위 일로 다시 붙잡혀 갔다.

김창수는 나중에 순천교도소에서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여기 교도관들이나 수용자들도 생각보다 자세하게 용산참사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써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수고로움도 거의 없습니다. 진압 당시를 티브이로 보면서 가슴 아파 했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모습을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테러리스트쯤으로 짐작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무도 평범한 시민이고, 이웃 아저씨들이었는데도 정부와 언론에서 그렇게 나쁜 이미지로 포장하고 만들었다고 여겨집니다.

변호사님 안타까워하셨던 눈빛이 제 기억에 선합니다. 이렇게 된 것, 아마 이겨내고 나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겠지요.’

 

 

 

2009년 1월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한나라당 최고·중진 연석회의 참석자들이 철거민들의 폭력 장면이 담긴 용산참사 사건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용산참사의 책임 소재를 철거민들에게만 돌렸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높은 자리 공무원들을 대신해
한 말단형사가 속죄하면서
본청 정보과 자리를 버리고
경찰서 도보순찰대로 내려갔다
그리고 법정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급 특공대원들도 그랬다
제일 말단의 ‘방패조’들은
철거민들이 아예 망루 안으로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 했다
검찰 기소내용과 전혀 달랐다

 

 

 

저 죽으려고 화염병을 던진단 말인가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의 지팡이가 되려고 애쓴 경찰도 있었다. 그렇다, 지팡이.

그는 서울경찰청 정보과 형사였다. 망루가 불타기 전 날, 아침부터 용산 현장에 가서 철거민들과 조합, 구청 사이를 중재해 보려고 뛰어다녔다. 하지만 협상을 위해 경찰을 뒤로 물려 달라는 철거민들의 요청을 지휘부가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래도 형사는 포기하지 않고 밤까지 네댓번이나 철거민과 만나 어떻게든 협상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애썼다. 망루가 탈 때도 건물 아래서 다른 철거민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1심 법정에 검찰 쪽 증인으로 나왔다. 검사는 화재 현장에서 철거민들에게 폭행을 당한 거 아니냐고 유도를 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화재 직후 (철거민) 회원들이 나에게 살려내라고 했고, 부녀자들이 내 옷을 잡는 바람에 옷이 찢어졌는데 폭행한 것은 아니고 한풀이를 한 것 같습니다.”

그 뒤 우리 사무실 신동미 변호사와 이렇게 문답했다.

“문: 증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협상의 중요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답: 한번쯤은 모든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고 이후에 저는 서울경찰청에서 양천경찰서로 자원하여 가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문: 증인이 협상을 중재하는 사람으로서 참담한 결과가 나오자 회의가 들어 양천경찰서로 자원했다는 것인가요?

답: (감정이 복받쳐 대답하지 못하였다.)”

법원 서기는 ‘감정이 복받쳐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짧게 적었다. 하지만 그 형사는 어떻게 협상 한번도 없이 사람이 여섯이나 죽었냐며 1분여를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결국 법정 밖으로 나가 마음을 추스르고 한참 만에 들어왔다.

방청객들도 나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이 5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평범한 아저씨, 할아버지들 다섯에, 앞날이 창창한 30대 경찰 하나. 이 여섯 목숨이 불에 타 죽었는데도 ‘나는 모릅니다. 내 잘못이 아닙니다. 저 철거민들이 테러범들입니다’ 이렇게 일관한 경찰청장이며 현장 지휘부들. 대통령, 판사들, 대법관들….

그 높은 자리 공무원들을 대신해 한 말단 형사가 속죄하면서, 물 좋다는 본청 정보과 자리를 버리고 경찰서 도보순찰대로 자원해 내려갔다. 그리고 법정에서 눈물을 흘렸다.

무간지옥에 연꽃이 피었다.

명령에 따라 무서운 망루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던 하급 특공대원들도 그랬다. 계급이 높아질수록, 법정에서 모르쇠와 거짓말로 자리보존을 꾀했지만, 하급자 젊은 경찰들은 그래도 진실을 말했다.

화재 원인과 관련해서 그들은 가능하면 철거민들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미루는 것이 본인들 신상에도 이로웠다. 과잉진압 탓이라는 비난이 버거울 거였다.

그래도 많은 특공대원들이 화재 직전 자신들은 화염병이 날아오는 걸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방패 들고 맨 앞에서 치고 올라가야 했던 제일 말단 ‘방패조’들 중에는 철거민들이 아예 망루 안으로는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고 단언한 이들도 있었다.

철거민들이 망루 안 4층에서, 2~3층 계단을 오르는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져서 불이 났다는 검사의 기소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지! 살려고 올라간 망루에서 철거민들이 저 죽으려고 망루 안으로 화염병을 던진다는 말인가.

재판 내내 경찰 진압이 적법한 공무집행이었는지 여부와 함께, 과연 철거민이 화염병을 망루 안으로 던져서 참사가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다투었다.

나는 30년 가까이 수많은 재판을 하면서 큰 사건 무죄도 제법 받았다. 그중에도 제일 힘들었던 무죄는 치과의사모녀 살해사건이었다. 용산참사는 거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무죄받기가 쉬운 사건이었다.

우선 저걸 적법한 공무집행이라고?

그리고 <사자후> 동영상에는 화재 경과가 한눈에 보인다. 불똥들이 망루 4층 지붕 처마 밑에서부터 벽 모서리 틈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린다. 불똥들이 옥상 바닥에 닿으면서 그곳에 대량으로 떠다니던 세녹스에 불이 붙고, 그와 동시에 망루 안에 가득 차 있던 세녹스 유증기에 인화되면서 거의 폭발 수준으로 불길이 망루 전체에 솟구친 거였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이 사건에 경찰이나 이명박 정권의 안위가 걸리지 않았더라면, 무죄를 받을 수 있었으리.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재심에서 무죄를 받겠노라 나에게 다짐한다.

내가 이렇게 자신을 하는 건, 당시 철거민들과 함께 지옥에 몰렸던 하급경찰들의 증언 덕이다. “나는 망루 안에서는 철거민들이 화염병 던지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2009년 1월20일 아침 뉴스에서 용산참사 소식을 들었다. 나는 6개월 전인 2008년 5, 6월, 광우병 피디수첩 보도로 광화문을 덮었던 촛불들을 떠올렸다. 용산참사의 책임소재가 제대로 밝혀지면 이 정권이 버티기 어렵겠구나.

그런데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의 턱없는 과잉진압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모든 게 용산 철거상인들의 테러 수준 폭력행위 때문인 걸로 몰아갔다. 그 배후에 있는 전철연은 반정부 막가파 단체.

1989년 돈암동. 동소문동 산동네, 세입자 박순덕이 죽은 전농동, 도화동, 월간 <말>지 사건 등 수십년을 계속해서 내가 도왔던 전철연이었다.

난감한 변호 요청, 왜 내가 맡아야 하나

용산참사 직후부터 민변 후배 변호사들은 열심히 진상조사도 하고, 철거민들에게 법적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 검찰에서 수사기록 3천쪽을 내지 않아 재판이 파행에 빠졌다. 1심 재판부가 이 기록 없이 그냥 재판을 강행하려 하자 변호인들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서 재판이 중단되었다.

그때는 광우병 피디수첩 제작진들이 잡혀가는 등 한창 분위기가 달구어져 있던 터라 변호인이었던 나는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 용산재판은 잊고 있었다.

그런데 9월 초 어느 날 용산대책위 박래군과 김덕진이 찾아왔다. 민변 변호사들이 전부 사퇴해서 국선 변호사가 선임되었다며 나더러 변호를 맡아달라는 거였다.

난감했다. 후배들이 이유가 있어 그만둔 사건을 내가 다시 맡아서 한다는 게 적절치 않아 보였다. 마침 피디수첩 재판도 시작되고 있었다.

용산재판 경과를 알아보니 조합과 용역회사 사람들 신문한 거 빼고는 실제로 증거조사를 진행한 게 별로 없었다. 재판이 이제 막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심 만료기간은 겨우 한 달 반 정도밖에 안 남아 있다니 이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수많은 증인들을 신문하고 유리한 증거들을 확보해 낼 건가.

용산대책위와 구속자 가족들은 꼭 좀 변호를 맡아달라고 거듭거듭 간청을 했다.

고민 끝에 나는 구속자들을 만나보고 정하기로 했다. 듣기로는 9월1일 6회 공판 때 피고인들이 일제히 뒤를 보고 돌아앉아 재판을 거부했다고 했다.

나는 서울 구치소로 피고인들을 찾아갔다. 만약 본인들 뜻이 확고해 재판거부를 결정한 거라면 굳이 내가 변호를 맡아 후배 변호사들이나 피고인 본인들의 의사를 거스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