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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8년째 고시 ‘사랑은 사치’…게임서 사이버 결혼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2. 5.

 

등록 : 2013.02.04 21:35 수정 : 2013.02.05 16:53

1일 오후 국내 최대 공무원·고시학원 밀집 지역인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한 피시방이 이용객들로 붐비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2013 기획 격차사회를 넘어 ⑥ 노량진 피시방
고시폐인, 왜 피시방 붙박이가 되었나
‘바늘구멍’ 공시에 지친 자들의 탈출구…“게임이 차라리 정직”
고시촌 PC방 청년 52% “공정한 취업 기회 안주어져

현재 전국에는 2만여개의 피시방이 영업중이다. 잠깐의 게임을 위해 찾는 피시방은 일종의 문화공간이자 젊은이들의 놀이터다. 하지만 대낮에 피시방을 찾아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갈 곳 없는 청년 실업자들에게 피시방은 과거 명예퇴직자들이 낮 시간에 찾던 ‘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청년들이 가장 싼 값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한겨레> 신년기획 ‘격차사회를 넘어-밀려난 삶의 공간’이 여섯 번째로 찾은 곳은 양질의 일자리에 접근하지 못한 채 각종 경쟁에 내몰리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공간, 피시방이다. 등장인물들이 신원 노출을 원하지 않아 모두 가명을 썼다.

 

 

지난달 21일 낮 12시 무렵, 국내 최대 공무원시험·고시 학원 밀집 지역인 서울 노량진. 원룸 고시촌이 즐비한 골목 한쪽의 ‘ㅅ피시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일 낮인데도 전체 100석 가운데 절반가량이 차 있다. 앳돼 보이는 여자 ‘알바생’이 “어서 오세요” 하며 시큰둥하게 쳐다본다.

 

입구에 들어서면 이달의 이벤트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용료를 가장 많이 낸 손님의 순위를 매겨 백화점 상품권을 지급하는 행사다. 30위까지 이용자의 아이디를 매일 출력해 벽에 붙여 놓는다. 1등의 이용료는 벌써 27만5000원이다.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피시방에 머물렀다는 의미다.

 

주식투자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고전 게임’을 하러 온 양복차림의 직장인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오후 1시께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8년차 백수’ 박상균(가명·37)씨가 들어왔다. 서울 소재 법과대학을 졸업한 박씨는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사법시험에 매달렸다. 목표는 중간에 행정고시로 바뀌었다가, 7급 법원직 공무원을 거쳐, 지금은 일반직 9급 공무원으로 ‘조정’됐다. 그는 자신을 “고시 폐인”이라고 불렀다. 박씨에겐 강원도 고성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보내주는 용돈 70만원이 월 생활비의 전부다. 월세·통신비·식비 등을 빼면 커피 한잔 사먹을 돈도 남지 않는다. 부모님은 아들이 아직도 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줄로만 안다.

 

서울 강북의 월세 25만원짜리 옥탑방에 사는 박씨는 오전 11시께 일어나 대충 ‘아점’(아침 겸 점심)을 먹고 노량진행 지하철을 탄다. “왠지 피시방도 노량진 쪽이 더 편하다”고 그는 말했다. 피시방 입구에서 공짜 자판기 커피를 하나 꺼내 든 박씨는 늘 앉는 흡연석으로 향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피시방 회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모니터가 열렸다. 그가 피시방에 오는 것은 온라인 게임 ‘리니지’를 하기 위해서다. 이미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게임이지만, 박씨는 ‘리니지’를 떠날 생각이 없다. 이 게임을 한 지 벌써 5년째다. 연이은 낙방에 괴로워하던 박씨를 고시원 친구가 “게임이나 하자”며 피시방으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하루 한시간씩 머리 식힐 겸 하던 것이 결국 밤을 새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늦게 일어나서 방 천장을 보면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친구들도 하나둘 떠나갔고요. 그래도 게임 안에는 아직 친구들이 많아요. 외롭지 않기 위해서 더 게임에 빠지는 거 같아요.” 박씨는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은 쉴 새 없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 “게임이 사회보다 정직하다”
천천히 둘러본 피시방 안에는 20~30대 청년이 대부분이다. 100여평 공간에 여성은 아르바이트생 한명뿐이다. 흡연석 쪽에는 매캐한 담배 연기가 코를 찌른다. 이곳에선 나이가 좀더 들어 보이는 ‘아저씨’급 청년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들 옆자리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엘오엘’(LOL)이라고 부르는 ‘리그 오브 레전드’, 그다음은 ‘아이온’이다. 모두 판타지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롤플레잉게임’(스스로 주인공이 돼 각종 임무를 수행하는 게임)이다. 롤플레잉게임은 여러 ‘퀘스트’(임무)를 완료하면서 ‘경험치’를 쌓아간다. 이 과정에서 무기와 같은 각종 ‘아이템’도 얻는다. 경험치가 쌓이면 자신의 ‘레벨’이 올라간다.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최고의 레벨을 ‘만렙’이라고 하는데, 피시방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만렙’의 경지였다. 만렙과 각종 무기로 무장한 게임 속 주인공은 현실의 ‘나’와는 완전 다른 대접을 받는다. 사람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임에 집중한 이들은 말을 걸면 대뜸 인상부터 썼다. “됐어요”, “바빠요.” 이들에게서 한마디라도 들으려면 화장실로 가는 길목의 의자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김희균(28)씨에게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김씨를 붙잡아 커피 한잔 하자며 말을 걸었다.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7급 공무원 시험을 2년째 준비중인 김씨는 하루에 4~6시간 게임에 몰두하는 게임광이다. 그는 ‘아이온’을 한다. 활을 무기로 하는 ‘궁성’이라는 캐릭터인데, 김씨는 65레벨을 꽉 채운 ‘만렙’ 유저다. 김씨가 게임에 빠진 건 공무원시험 준비의 허탈감 때문이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며 피시방에 오는 사람들의 심정은 다들 비슷하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학원은 최대 1년 정도면 한번 내용을 다 훑을 수 있어요. 그다음부턴 계속해서 반복이에요. 이 반복의 과정이 너무 지겨워요.” 아는 내용을 계속해서 보고 문제를 반복해 푸는 과정에서 많은 ‘공시생’(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게임에 빠진다는 것이다.

 

“어차피 공무원시험은 1~2문제 차이로 당락이 갈려요. 결국 운 좋은 사람이 붙는 거죠.” 김씨는 게임에 몰두하더라도 그게 시험 당락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공무원시험 교재는 보고나면 지겹잖아요. 그런데 게임은 달라요. 매번 새로운 퀘스트가 주어지고, 그걸 완료하면 경험치가 올라가면서 레벨이 높아져요. 남들보다 세지는 거죠. 가끔 레어템(얻기 힘든 아이템)을 얻기도 하고요. 이건 전적으로 시간 투자와 비례해요.” 이씨는 “차라리 게임이 사회보다 정직하다”고 했다.

 

김씨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진영(28)씨도 역시 같은 아이온 만렙 유저다. 캐릭터는 칼을 사용하는 ‘검성’이다. 정씨는 “현실이 괴로워서 잊으려고 게임을 한다”고 했다. 정씨도 7급 공무원 시험 수험생이다. 공무원시험 준비 전에 잠깐씩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결론은 ‘공무원’이었다.

 

“제일 괴로운 것은 주위의 눈총이에요. ‘남들은 좋은 데 취업했는데 넌 뭐하냐’는 생각들을 하는 거 같아요. 고향이 강화도인데, 명절에 집에 안 간 지가 꽤 됐어요. 그나마 피시방에서 친구들하고 게임할 때가 제일 즐겁죠. 게임 안에선 그래도 꽤 잘나가는 편이어서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요. 적어도 게임 안에선 차별이 없어요.”

 

정씨는 게임을 하는 동안 가장 짜릿한 때가 새로운 ‘인던’(인스턴트 던전)을 정복했을 때라고 말했다. 던전은 게임 안에서 나오는 지하 감옥을 말하는데, ‘인던’은 보너스처럼 새롭게 주어진 지하 감옥을 말한다.

 

“인던에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길도 있고 새로운 보스도 있어요. 이걸 클리어(완료)했을 때 제일 재밌죠. 계속하다 보면 언젠간 되거든요.”  삶에 지친 젊은이들은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모니터 속의 지하 감옥에서 찾고 있었다.

 

7급 공무원 시험 준비 28살 김씨

서울소재 대학 나와 2년째 공부
“1~2문제 차이로 당락…운 좋아야
게임은 시간 들이면 아이템 얻어”

 

고시→7급→9급 수험생 37살 박씨
부모에 고시 공부한다 속이고 생활
‘사랑은 사치’…게임서 사이버 결혼
“컴퓨터 끄면 혼인 끝…뭘 해야할지”

 

2년째 ‘완전 실업’ 상태 32살 이씨
“지방대 스펙으론 대기업 어림없어”
단기 알바 전전하며 구직 공고 검색
공공기관 계약직→정규직 전환 꿈꿔
 

 

 

■ “시험 붙은 사람들이 이 시스템을 바꿔야 하지 않나”
‘딩동’. 알바생 모니터에 알림이 떴다. 손님이 간식을 주문했다는 메시지다. 이곳은 앉은 자리에서 클릭 몇 번으로 간식을 주문할 수 있다. 햄버거, 컵라면, 볶음밥 등 다양한 메뉴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건 매운 치킨볶음밥이다. 소금과 후추를 뿌린 뒤 전자레인지에 3분간 돌리다가 밥을 한번 휘저어주고 다시 1분간 돌리면 완성된다. 가격은 3000원이다. 게임에 열중한 사람들은 볶음밥 한 숟갈 떠먹고 다시 마우스에 손을 댄다. ‘쩝쩝’ 소리와 ‘클릭’ 소리가 뒤섞인 식사시간이다.

 

대개는 오로지 게임을 위해 찾아오지만, 이곳에서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도 드물게 눈에 띄었다. 이명근(32)씨는 구직정보 사이트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다지 게임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이씨는 “게임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돼요.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안 나잖아요. 사는 게 괴로울 텐데…”라고 말했다.

 

대전의 4년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이씨는 2007년 졸업 뒤 원래 살던 서울 상도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직까지 부모님에게 ‘빈대 붙어서’ 산다. 부모님은 동네 어귀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다 지난해 11월 문을 닫았다. 대기업 계열의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동네에 들어온 뒤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렸다.

 

이씨가 피시방에 오게 된 건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 때문이다. 친구가 게임을 하는 동안 이씨는 주로 구직정보를 살펴본다. 물론 집에 컴퓨터가 있지만 부모님 눈치가 보여 잘 켜지 않는다. 잠도 일부러 늦게까지 자는 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보통 오전 11시 넘어 일어난다. 대충 점심을 때우고 도서관에 가거나 친구와 함께 피시방에 와서 시간을 보낸다.

 

국문학을 공부할 때만 해도 작가가 꿈이었다. 아직 그 꿈을 버린 건 아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먹고사는 인생은 너무 불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직장을 잡아 보려고 서울의 한 미용직업전문학교에서 미용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취업은 되지 않았다. 다들 ‘어린’ ‘여자’ 직원만 원했다. 미용실 취업은 포기하고 구청과 도서관 등을 오가며 단기계약직으로 일했다. 대부분 문서 복사 같은 단순 업무였다. 월급은 한 달 80만원에 그쳤다.

 

“내가 월급 100만원 넘는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요?” 이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차별도 많이 겪었다.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어른들이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구청에서 일할 때였는데, 제 자리를 일반 직원들과 완전히 격리해놓더라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한번은 단기계약직으로 일한 미술관에 경력증명서를 떼러 갔더니 “아르바이트는 해당이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회가 야속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고 이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기업 정규직에 지원을 하고 싶지만 엄두가 안 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때도 놓친데다, “지방대 나온 스펙으로는 어차피 어림도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1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피시방에서 한 청년이 게임 캐릭터로 가득 찬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이씨는 2011년 11월부터는 잠깐씩 하던 일도 그만두고 완전한 실업 상태로 지내고 있다. 노는 시간이 길어지니 요즘은 ‘돈’이 무서운 걸 새삼 깨닫는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친구들도 점점 떨어져 나가는 거 같아요. 친구들 만나서 차 마시고 밥 먹어도 돈이 들잖아요. 예전엔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러 도전도 했는데 세상은 바뀌지 않더라고요.” 이씨가 피시방에서 제공하는 공짜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무한경쟁 같은 이런 사회에서는 계속 낙오자가 생기잖아요. 사람 두 명 쓸 거 한 명 쓰면서 이윤 높이려는 과정에서 나오는 낙오자라고 생각해요.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공무원시험에도 합격하고 높은 자리에 가는 건데, 공부 잘하는 애들이 이런 시스템을 바꿔야 하지 않나요?”

 

최근 이씨는 취업 전략을 바꿨다. 어차피 좋은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안 뒤로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냈다. 바로 ‘선 입사, 후 정규직 전환’이다. 공공 부문의 정규직 전환이 잘된다는 뉴스를 듣고 식품 관련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돈이 없어 학원은 못 가고 독학으로 준비하고 있다. 일단 관공서 구내식당의 단기계약직으로 들어가 정규직 전환을 기다릴 계획이다.

 

취업을 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한 번도 못 가본 해외여행도 가고 싶고요.” 이씨가 피시방 모니터의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 사랑·결혼은 온라인에서나…
피시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옷차림도 비슷했다. 대부분 ‘추리닝’(트레이닝복) 차림이다. 추운 날씨임에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도 더러 있다. ‘맨발족’들은 대개 피시방 근처 고시원에 산다. 두꺼운 패딩과 추리닝 바지, 그리고 슬리퍼는 고시원 생활자들의 ‘트레이드마크’다. 젊은이들이지만 연애와는 담을 쌓은 듯한 모습들이다. 사실 청년 실업자들에겐 사랑도 사치다. 더구나 게임에 빠지기 시작하면 오프라인에서의 연애는 사실상 끝난 것과 다름없다.

 

이명근씨도 기간제 교사와 잠시 연애를 했다. 하지만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그는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서히 멀어졌다.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김희균씨와 정진영씨의 경우도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면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공무원시험 준비하면 90%는 깨진다”는 게 김씨의 말이다. 학원과 도서관에 박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멀어진다는 것이다.

 

피시방 사용시간 이벤트에서 1위를 차지한 한상진(30)씨는 하루 12시간씩 게임에 몰두한다. 경찰 순경 공채를 준비중인 한씨의 최종 꿈은 “평탄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하지만 낮에는 게임, 저녁에는 공부에 빠지다보니 연애는 엄두를 못 낸다. “게임 안에서의 인연이 더 편하고 좋다”고 한씨는 말한다. “오프(일상생활)에서는 사람하고 친해지기 어렵잖아요. 서로 이런저런 색안경을 끼고 본다고 해야 하나…. 게임 안에선 그런 게 없어요. 생각 없이 친해질 수 있어요.”

박상균씨는 아예 게임 안에서 결혼을 했다. 물론 게임의 캐릭터끼리 맺는 가상 혼인이다. 게임을 하면서 좀더 긴밀한 협업관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지만, “좋은 아이템이 생기면 게임 ‘배우자’에게 주고 싶다”고 박씨는 말했다.

 

박씨는 게임 속의 아내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보면 서로 실망할까봐 만남이 꺼려진다. 궁금하기도 하지만 게임 속 아내도 ‘오프 만남’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박씨가 컴퓨터를 끄는 순간 결혼 생활은 끝난다. 다시 ‘고시 폐인의 삶’으로 돌아갈 때다. 그를 기다리는 건 차디찬 옥탑방이다.

 

30일 밤 9시, 주섬주섬 짐을 싸서 피시방 문을 나서던 박씨는 “나라를 원망해야 할지, 어른들을 원망해야 할지, 나를 원망해야 하는 건지, 이제는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자챙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이 보였다. 수요일이지만 박씨에게는 휴일 같은 하루였다. 1988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던 탈주범 지강헌이 들려달라고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피시방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딩동.’ 그 순간 알바생의 컴퓨터에 매운 치킨볶음밥 주문을 알리는 메시지 창이 떴다.

 

 

이정국 김선식 기자 jglee@hani.co.kr

 

 

 

 

20대가 78%…월세 주거 58%
“PC방 이용시간 6시간 이상” 40%
열에 다섯명 “생활수준 낮은 편”
“월 생활비 70만원 미만” 42%
다수 “새 정부, 취업걱정 없게”

 

고시촌 피시방에 출입하는 청년층의 절반 이상은 청년들이 공정한 취업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등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한겨레>가 지난달 28일부터 닷새 동안 서울 노량진 ㅅ피시방을 드나든 청년 50명을 대상으로 ‘세대격차’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청년들에게 공정한 취업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52%는 ‘아니다’(‘매우 아니다’ 10% 포함)라고 답했다. ‘보통’이라는 답이 40%였고, 공정한 취업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는 응답은 8%에 그쳤다. 한국 사회의 평등 수준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에도 절반에 가까운 46%가 ‘불평등하다’(‘매우 불평등’ 6% 포함)고 답했다. ‘중간’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48%인 반면, ‘평등하다’는 대답은 6%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상당수는 본인들의 생활수준이 낮다고 보고 있었다. 생활수준을 묻는 질문에 ‘낮은 편’이라고 답한 이가 52%에 달했다. ‘하층’이 42%였고, 스스로를 ‘최하층’이라고 자리매김한 이도 10%나 됐다. ‘중간층’이라고 답한 이들이 42%로 가장 많았다.

 

 

1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피시방에서 한 청년이 모니터를 주시하며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고시촌 피시방에 오는 이의 평균상은 ‘부모님에게 70만원 미만의 용돈을 받아 월세를 사는 20대 남자 대학생’으로, 하루 6시간 이상 피시방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 생활비를 묻는 질문에 70만원 미만이라는 응답이 42%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70만∼150만원이라는 응답이 26%였고, 150만~200만원 미만이 28%였다. 주요한 생활비 조달 경로는 부모님이 주는 용돈(50%)이 가장 많았다. 직장(30%), 아르바이트(14%)가 뒤를 이었다. 주거형태를 묻자, 절반을 넘는 58%가 월세라고 대답했다. 월세 금액은 20만~70만원으로 평균이 43만원이었다.

 

현재 직업은 대학생(휴학생 포함)이 34%, 회사원·자영업자가 28%, 공무원 시험·고시 준비생이 24%였다. 일반기업 입사 준비를 하는 이가 6%, 대학원 준비생 등 무직이 8%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나이는 만 26살인데 20대가 78%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루 피시방 이용시간은 ‘6시간 이상’이 40%로 가장 많았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역시나 일자리였다. 박근혜 정부에 바라는 점을 묻는 주관식 질문에 “청년실업자가 없으면 좋겠다”거나 “취업걱정이 없으면 좋겠다”는 답변이 다수 나왔다.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취업 기회를 주길 바란다”고 답변한 이도 있었다.

 

이밖에 “재분배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소득 차는 더욱 커진다”며 소득 재분배와 복지와 같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제기됐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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