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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철거 위기, 노량진 노점상들 밥벌이 전쟁 도 넘어…‘컵밥’ 1순위?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2. 1.

등록 : 2013.02.01 15:21 수정 : 2013.02.01 16:05

 

노량진 학원가 컵밥 포장마차 거리 르포. 초상권보호를 위해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음.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르포
컵밥 논란 노량진에선 ‘뜨거운 밥전쟁’
노점·분식·대기업·편의점까지 가격인하 경쟁

개찰구를 나서자마자 ‘전쟁터’가 펼쳐졌다.

 서울 도시철도 9호선 노량진역 3번 출구. 지난달 30일 새벽, 개찰구 앞 커피숍에 붙은 가격표에 눈이 갔다. ‘아메리카노 테이크아웃 990원, 아이스아메리카노 1450원, 생과일주스 2900원.’ 노량진 학원가로 향하는 첫 관문인 이곳에서부터 재수생과 고시생의 얇은 지갑을 공략하기 위한 상인들의 치열한 ‘가격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본보기 철거 이어 최종 선전포고
 

 

 

동작구청은 지난달 23일 컵밥집과 호떡집 등 노점 5곳을 강제 철거한 데 이어, 노량진역과 학원가 주변 노점 전체(50곳)에 대해 31일까지 노점을 자진 철거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자율정비가 되지 않을 경우, 도로법 제65조, 제101조 등에 의거 강제수거, 과태료 부과 등 행정조치 예정”이라는 ‘선전포고’를 겁내는 사람은 없었다. 컵밥·토스트·김밥 등을 파는 노점상들은 이날도 새벽부터 손님을 맞고 있었다. “철거되면 철거되는 거지 뭐.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뭐 방법이 있나. 내일 철거를 한다고 해도 당장 오늘은 장사를 계속해야지 어쩌겠어.”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노점상이 말했다. ‘휴전’의 불안 속에서 달걀프라이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식빵이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노량진로 옆구리로 난 노량진로-16길. 소형 트럭 한 대만 지나가도 행인들이 몸을 돌려야 할 만큼 비좁은 이 골목이 바로 지난달 23일 단속반과 노점상의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골목길 안엔 그날의 ‘전흔’이 생생했다. 골목 초입 호떡 노점 자리는 철거반이 아예 컨테이너박스를 들어내 휑하게 비어 있었다. 컵밥 노점 한 곳은 아예 부서진 채 주저앉아 버렸다. 그나마 컵밥 노점 3곳의 마차 모양새는 온전했는데, 천막 귀퉁이엔 ‘동작구청은 무자비한 철거를 중단하라’는 붉은 글들이 나붙어 있었다. 이 컵밥집 가운데 한 곳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다시 영업을 재개했다. “이젠 할 말 없어. 언론들이야 일 터지면 잠깐 반짝 관심을 가졌다가 사라지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 뭐. 이젠 얘기하기도 힘들어.” 손님이 뜸한 틈을 타 인사를 건네자 노점 주인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밥’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아이엠에프(IMF) 직후인 1990년대 후반부터 노량진 학원가 일대에 노점상이 형성됐지만, 그간 점포를 낸 영세 상인들과 노점상 사이에 표면화된 큰 갈등은 없었다. “노점들이 주로 떡볶이나 어묵 같은 간식을 파니까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다”는 게 상인들이나 노점상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갈등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다. 다양한 식사 메뉴를 저렴한 값에 제공하는 컵밥집이 증가하면서, 영세 음식점 주인들이 상권을 잠식당하고 있다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실제로 2009년 두 군데 정도밖에 없던 컵밥 노점은 최근 13곳으로 늘어났다. 이 지역 전체 노점(50곳)의 30% 수준이다.

 

 “식당 주인들이 모이면 80~90%가 학생 손님인데 노점상에 뺏겨 마진도 안 나온다고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점심 ‘일전’을 앞두고 잠시 담배를 태우러 나왔던 철판볶음밥집 사장 김갑수(54)씨가 대여섯 발자국 앞 노점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대료에 전기세, 수도세까지 한 달에 230만원 정도가 나가는데, 요샌 종업원과 둘만 일해도 인건비도 잘 안 나와요. 밥값은 비슷한데 임대료나 세금을 안 내니까 저 사람(노점상)들이 우리보다 형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그는 “얼마 전 같은 건물에서 식당을 하던 동료가 손해를 보고 가게를 폐업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근의 한 대형 고시식당의 주인은 “우리도 어려운데 노점상 철거 이후 공연히 (식당 주인들만) 이기적인 사람들로 지목되는 것 같다”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량진 학원가 컵밥 포장마차 거리 르포. 초상권보호를 위해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음.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작년엔 컵밥값 500원 인상으로 타결
 

 

 

식당 주인이 아니더라도 ‘노점상을 무조건 약자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는 노량진로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장사가 잘되니까 자꾸 늘어나는 거 아니겠냐”는 게 대표적인 반응이었다. “내 나이가 올해 예순이에요. 그런데 나는 20년째 아픈 남편을 병수발하느라 보증금 1000만원짜리 월세 집에 살아요. 지금 이렇게 부동산에 나와 있지만 지난해부터 거래가 뚝 끊겨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노점상은 권리금이 5000만원에서 1억원은 간다는 얘기가 있대요. 게다가 아르바이트생 두고 큰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고…. 그 사람들이 생존권 얘기를 하면 나같은 사람들은 좀 허탈해지죠.” 노량진로의 한 부동산 직원 허아무개(60)씨의 얘기다.

 

 그는 계산기를 직접 꺼내, 컵밥 노점상들이 쓰는 계란 수를 어림잡아 이들이 하루에 벌어들일 돈을 계산해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길은 좁은데 노점들이 꽉꽉 들어차서 다니기가 얼마나 불편한 지 몰라요. 여름철 음식 냄새와 열기는 또 어떻고요. 집 보여주러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엔 아주 그냥 싹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허씨의 비판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려고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20대 여성이 “월세 35만원 정도의 원룸을 보여달라”고 얘기할 때까지 계속됐다.

 

 인근 식당 등의 지속적인 민원으로 동작구청은 지난해 4월 “노점에서 밥을 팔아서는 안 된다”며 컵밥 노점상들에게 자진 정비를 요청하는 지침을 보냈다. 효과는 없었다. 컵밥집 단속을 반대하는 고시생의 응원에 힘입어 컵밥의 가격을 500원 정도 올리는 수준에서 갈등은 봉합됐다. 그 사이 컵밥집 수도, 컵밥집 단속을 요구하는 민원도 함께 늘었다. 구청은 지난달 23일 “민원이 제기된 만큼 집행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제 철거에 나섰다.

 

 “솔직히 우리(노점상)가 우리 발등을 찍은 측면도 있어. (컵)밥집이 너무 많아졌거든. 컵밥 장사가 좀 된다 싶으니까 식당 앞에서 도너츠, 핫바 팔던 노점들까지 전부 밥으로 (메뉴를) 바꾸면서 이 사달이 난 거지 뭐.” 큰 길에서 2009년부터 김치볶음 컵밥을 팔아왔다는 황아무개(60)씨가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그는 “불법으로 도로를 점유하고 장사를 하고 있으니, 나는 할 말 없는 죄인”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는 불법이란 잣대를 들이대며 노점상 탓만 하는 식당 주인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고 했다. “우리더러 자꾸 불법, 불법 그러는데 식당들도 밥 한 그릇은 카드도 안 받잖아. 카드를 받는다고 해도 부가세라면서 돈 없는 학생들에게 1000원을 더 올려받는 경우들도 있고. 그건 뭐 적법한 일인가?”

 

 

민주노점상전국연합(민주노련)의 양용 노량진지역장도 “노점이 아니더라도 노량진은 이미 박리다매형 대형 식당과 작은 식당의 출혈 경쟁이 심했던 곳”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큰 길가에서 떡볶이와 닭꼬치를 판매하는 그가 10년 넘게 봐온 노량진 학원 상권은 “수많은 이들이 희망을 갖고 들어왔다가 절망을 안고 나가는 곳”이었다.

 

 양 지역장의 표현대로 노량진 학원상권은 영세상인들이 쉽사리 성공하기 힘든 환경이다. “이 지역은 상권이 오래된 데다 업체 밀집도는 높고 장사가 되는 것에 견줘 임대료와 권리금이 비싼 지역이다. 게다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학생이 80~85%의 고객층을 형성하고 있어 저가 음식점이나 주점 등의 밀집도가 높은 편”이라고 창업컨설턴트인 서정헌 세움넷 대표가 설명했다. 실제로 소상공인진흥원의 ‘업종밀집정보’를 보면, 주요 상권의 평균 업종 밀도를 1로 봤을 때, 이 지역 상권의 지난해 분식업 밀집도는 2.61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서울 전체는 1.37 수준이니 어느 정도인지 예상이 가능하다.

 

 

노량진 학원가 컵밥 포장마차 거리 르포.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음.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오늘은 무사히 넘겼지만 내일은… 

 

 

이곳에선 영세식당과 노점상 뿐만 아니라 중소식당과 대기업까지 가세해 ‘밥’을 팔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량진로 16길을 중심으로 살펴봐도 이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4곳의 컵밥집은 2500~3000원짜리 각종 볶음밥을 팔고, 300여m 떨어진 김밥집과 분식집에선 1000원짜리 김밥과 3000원짜리 김밥+라면을 메뉴로 내놓고 있다. 분식집에서 제일 비싼 음식이래봤자 4500원짜리 뚝불고기가 고작이다. 큰 길로 나오면 인근 대형 부페 고시식당이 한끼에 4000원, 석달 유효기간인 10장짜리 식권을 3만3000원(한끼 3300원)에 판다. 그뿐이 아니었다. 외국계 대형 패스트푸드점 맥도널드에선 불고기버거 등 2000원짜리 메뉴 3종을 판매하고 있다. 또 편의점에선 노량진 컵밥을 흉내 낸 더 싼(1700~2200원) 컵밥들이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수험생들에겐 천국일 수 있는 이곳은 자영업자들에겐 ‘악!’소리 나는 지옥이나 다름 없다.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은 저마다의 이해를 앞세운다. 구청에선 중재에 나서려고 해도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 지역은 워낙 가게 주인들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제대로 된 상인회가 없어요. 개별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곤 하죠. 노점상과의 대화를 중재하려고 해도 대화 주체가 없는 상황이지요. 지난 1월23일 철거 이후엔 누구는 철거하고 누구는 안 하냐며 이참에 전부 철거하란 말까지 나와요. 재량권은 없고… 이 문제를 ‘상인 대 상인’의 문제가 아니라 ‘불법이냐 적법이냐’의 문제로 볼 수밖에 없어요.” 동작구청 건설관리과 관계자의 말이다.

 

 

노점상이 똘똘 뭉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노련에선 지난해 인근 식당들과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노점 영업 시간을 오전 9시~밤 9시까지로 정하는 규약을 만들었어요. 반경 50m 안에선 같은 품목을 판매하지 않고, 한 사람이 세를 주는 방식을 통해 노점 2곳을 운영하지 못하는 내용도 담았고요. 하지만 그러면 뭘해요. ‘새벽부터 장사해서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데 시간을 정해놔서 못마땅하다’고 (민주노련에서) 탈퇴하고, ‘장사 잘 되는 다른 업종으로 바꾸기 위해 또 탈퇴하고…. 50m 안에 똑같은 메뉴가 없다는 이유로 노량진 길거리 음식이 명물로 떠올랐는데, 이젠 그 다양성마저 사라지고 있어요. 이게 다 욕심 때문이에요. 너도 나도 돈 되는 장사만 하려고 하고, 상인이나 노점상이나 똑같이 먼저 양보하라고 하니 문제가 어디 풀리겠어요.” 양용 지역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자진 정비 시한인 31일, 노량진역 학원가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점과 식당들은 여느날처럼 제각기 영업을 계속했다. 동작구청은 “법과 원칙에 기반해 한 두군데씩 점진적인 정비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휴전’만 계속된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