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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편집국에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 여현호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9. 2.

 

등록 : 2013.09.01 19:03 수정 : 2013.09.01 19:03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국가정보원의 내란음모 사건 수사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안쓰러움이 앞선다. 안쓰러움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에게로 먼저 향한다. 그들은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미 지나온 30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쓰는 용어부터 말투, 생각까지 옛날의 생경한 모습 그대로다. 여전히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대학 친구를 십수년 만에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머물러 있는 것이 꼭 잘못은 아니다. 뭔가를 지키는 것은 아름답기도 하다. 하지만 지킬 뿐 가꾸지 않으면 썩게 된다. 더욱이 혁명이든 정치든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뭔가를 이루려는 집단은 변화하고 발전하지 않으면 갈수록 옹색하고 누추해진다.

 

‘이석기 그룹’은 바뀐 세상을 공부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읽으려고 하지 않은 듯하다. 전쟁이 나면 뭘 할 것인지 논의했다는 ‘5월 모임’부터가 그렇다.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난봄의 안보 위기는 남이나 북 어느 처지에서 봐도 전쟁까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의아스러울 정도로 우리 국민이 태평했던 것도 그런 인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겠다. 그런데도 이석기 그룹은 전쟁 준비를 말했다. 대비책이라고 거론한 것들은 가능한 일도 아니고, 유치하기까지 했다. 말대로 혁명가 집단답게 스스로 정세를 분석하고 세상의 흐름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면 그런 식의 논의는 없었을 것이다. “북은 모든 행위가 다 애국적”이라고 말한 것처럼, 정말로 북한의 강경한 언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머리 없이 귀만 남은 채 울타리 안을 맴돈 꼴이니, 두렵다기보다 딱하다.

 

안쓰럽기는 국정원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내란음모라는 30~40년 해묵은 죄를 들이댔지만, 반응은 살벌한 죄명만큼 심각하진 않다. 80만원짜리 장난감총을 개조하면 된다는 ‘이석기 녹취록’ 대목에선 헛웃음들만 나온다. 같은 내란 예비·음모 혐의가 적용됐던 1974년 제2차 인혁당 사건 때와 같은 공포 분위기는 적어도 아니다. 더구나 국정원이 그동안 내놓았던 공안사건의 상당수는 시작은 창대하되 결말은 미약했다. 인천 지역에서 방송국 점거 등을 꾀했다는 왕재산 사건이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은 애초 충격과 달리 재판에선 주요 혐의에 무죄가 선고됐다. 이번이라고 크게 다를까.

 

심상한 반응은 이번 일의 속내가 그만큼 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들 국정원의 다급한 사정은 짐작하고 있다. 하필 이 시점에 국정원이 비공개수사의 관행 대신 보란듯이 공개수사에 나서고 몰래 언론에 수사 정보를 흘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것은, 국정원의 선거 개입 혐의가 분명해지고 국내 파트 축소 등 국정원 개혁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다. 국가기관이 조직 보호를 앞세워 피의사실 공표 등 위법 시비나 눈총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형국이다. 딱하고 꼴사납다.

 

사실, 이번 사건은 그저 안쓰럽게만 여길 일은 아니다. 이번 일의 현실적 해악은 당장은 물론 장래의 문제다. 국정원은 입만 가진 정당과 달리 정보와 수사력을 갖춘 공룡 조직이다. 그런 조직이 댓글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보유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맞불을 놓더니, 이번엔 대공사건 수사를 앞세워 국면 전환을 시도하고 나섰다. 조직 보전과 정국 주도권 장악에 물리력이 동원된 셈이다. 금기가 깨어졌으니 어디까지 갈지 짐작할 수도 없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가 저질렀던 공공연한 공작정치 정도만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제지하지 않으면 피해는 더 커진다.

 

이는 야당은 물론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당장의 분위기에 머뭇거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이석기 그룹의 시대착오는 법적 판단에 앞서 이미 광장에서 정치적 대표의 자격을 심판받고 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