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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권석천의 시시각각] 국정원 청문회의 검투사들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8. 21.

 

 

[중앙일보]
입력 2013.08.21 00:29 / 수정 2013.08.21 00:29
권석천
논설위원

 

 

법이란 무엇이든 단호하게 주장하고 그럴듯하게 우기는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 부통령을 지낸 변호사 애런 버(Aaron Burr)가 남긴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무엇이든 유리한 쪽으로 주장하고 끝까지 우기는 것인가.

 지난 16, 19일 국회에서 진행된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국정조사 청문회는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핵심 증인들은 증인 선서 거부권과 가림막 뒤에 숨었고, 여야 의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맞는 증언을 취사선택했다. 여와 야, 어느 쪽 책임이 클까. 전직 국회사무처 간부의 얘기다.

 “국정조사계획서에 나오는 ‘조사의 목적’을 기준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봅시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과 축소수사 의혹 및 폭로과정의 의혹 등에 대해 그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 재발을 방지하고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기 위한….”

 빼고 보탤 것도 없이 조사의 목적에서 멀었던 건 새누리당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9명의 새누리당 특위 위원 중 5명이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검사 출신이란 사실이다. 권성동·김재원·경대수·김도읍·김진태 의원. 나는 헌법과 형법을 배운 이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최소한 이 정도 말은 나올 줄 알았다.

 “국정원이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관한 인터넷 활동을 한 것은 잘못이다. 검찰이 제시한 국정원장 지시·강조 말씀이 사실이라면 직무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조직적 선거 개입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현실은 달랐다. 국민의 눈으로 진실을 찾아야 할 자리에서 엉뚱하게 형사재판의 무죄추정원칙을 내세우며 변호인을 자임했다. “취임사에서 엄정 중립을 강조했는데 맞는가요?”(권성동), “대한민국을 전복해서 적화시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제도권에) 들어오는 게 맞습니까. 대선에서 이겨야 되겠습니까. 그런 걸 막자고 있는 게 국정원 아닙니까.”(김진태)

 의혹의 실체에 접근해 보려는 의지도, 종북 세력과 야당 지지자를 구분하는 분별력도, 법을 다루는 이로서의 균형감도 보이지 않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건강을 걱정하다가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아집이 심하고 독선적”이라고 몰아세웠다. 새누리당의 공격은 ‘권은희 청문회’를 부각시키는 역효과를 냈다.

 나 자신도 원 전 원장에게 정치관여죄를 넘어 선거법까지 적용하는 게 옳은지는 의문이다. 검찰이 수사 결과를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경찰 디지털증거분석팀의 대화 내용을 일부 편집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본다. 다만 법률가라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본을 흔드는 국정원 탈선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같은 비중으로 다뤄야 하는 것 아닌가. 보수주의자를 자처해온 한 재야 학자의 말이다.

 
 “청문회 생중계를 보는 내내 궁금했어요. 저렇게 다른 의견, 다른 생각을 듣는 자세가 돼 있지 않다면 과거 검찰에 있을 때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학창시절 정의를 고민했던 기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 우리 사회가 진영논리와 정치 과잉에 흔들리는 데는 법의 잣대를 쥔 자들의 탓이 크다. 법은 보이는 그대로를 보고, 어느 것이 무겁고 가벼운지 따지는 것이다. 그래서 잣대가 중요하다. 저울의 잣대[衡]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균형(均衡)이고,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평형(平衡)이다.

유권자들이 법조인을 국회에 보내는 건 배우고 익힌 대로 사회의 균형과 평형을 잡아달라는 뜻인데 정작 그들은 정당·진영의 특급 검투사를 꿈꾸는 듯하다. 그러니 “만약 검찰을 시민단체 조직으로 바꾸잖아. 그럼 금방 그 일도 잘할 사람들이다”(김어준, 『닥치고 정치』)는 비아냥을 듣는 것 아닐까.

 이제 청문회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물을 것이다. 법을 배운 자들이 저러할진대 누구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할 건가. 법도 끝까지 우기면 되는 건가.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그런 수군거림이 무섭고 두렵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