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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종북 사냥’의 속셈은?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9. 5.

등록 : 2013.09.03 18:46 수정 : 2013.09.04 13:51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나는 8월26일 아침에 희귀한 체험을 했다.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서 <한겨레> 누리집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눈에 띈 것은 ‘내란음모’라는 큼직한 글자들이었다. ‘내란음모’… 나는 이 말을 보는 순간 심장이 떨어졌다. 나에게 ‘내란음모’는 한국사 교과서에서 가장 비극적인 꼭지들의 이름이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재판이라는 조작극의 결과로 사형에 처해진 김대중은 다행히 생명을 부지했지만, 말로 묘사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해 거짓 진술을 강요당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다 보면 지금도 분노를 느낄 뿐이다. 내가 한국 현대사를 가르치는 관계로 생생히 기억하는 또 하나의 ‘내란음모’ 사건은 1975년에 ‘인혁당 멤버’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내란음모’ 사형 판결이다. 최근에 와서 인혁당도 실체가 없었고 ‘내란음모’의 흔적도 없었다는 사실 등이 다 밝혀졌지만, 그 당시 사형을 내린 대법원장 민복기(1912~2007)나 조작극의 주범인 중앙정보부 부장 신직수(1927~2001) 등은 지금도 각각 그들이 속했던 조직 속에서 “문제가 있긴 있어도 근본적으로 존경스러운 선배”로 추앙받고 있지 않은가? 국가범죄가 저질러져도 국가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인 범죄자가 제대로 단죄받고 처벌되는 법이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니, 이 나라에서 언제든 또다시 ‘내란음모’ 명분으로 인권유린이 저질러질 것이 쉽게 예상돼 불안과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언론에 흘러나온 이야기로 보면, 이석기 의원 등 ‘좌파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일부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이 약 130명 규모의 ‘혁명조직’을 만들어 남북한 전쟁 발발 때의 행동 요령, 곧 남한군 전쟁 진행을 해할 목적으로 통신·유류시설의 파괴 등을 논의했다고 국정원은 주장한다. 최근의 ‘왕재산 간첩단’까지, 알고 보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직’들을 하도 잘 만들어내는 곳이 국정원인지라 그러한 논의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선뜻 신뢰하기 어렵지만, 만약 통합진보당 일부 당원 사이에 이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가 오갔다면 나는 그저 그분들의 상식을 의심할 뿐이다. 발발만 되면 불가피하게 중·미가 끼어들 남북한 전쟁의 실질적 상황을 한번 제대로 상상해보라. 수백만명이 포탄·폭탄 밑에서 죽고 다치는 그 와중에 일체 징집연령 남성들을 총동원할 군은 민간행정까지 맡을 것이고, 그 병영질서 속에서 수십명의 아마추어들이 아무리 통신·유류시설 파괴를 시도한다 한들 과연 반대쪽에 약간이라도 보탬이 되겠는가? 진짜 문제는, 그렇게 할 경우에 본인들에 대한 총살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급운동에 대한 총체적인 궤멸적 타격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만 해도 남한의 평민이 미국과 남한 지배계급을 위한 총알받이가 될 일이 없다고 확신하고, 혹시나 전쟁이 터질 때 국내에 있게 되면 다른 동지들과 함께 무슨 형벌이라도 당할 각오로 전쟁에 대한 결사반대와 병역거부를 선언하려고 한다. 희생이 있더라도, 전쟁 그 자체를 거부하기 위한 희생이라면 차후 한반도의 화해와 공생의 밑바탕이라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좌우간 국정원의 주장에 일말의 사실이 담겨 있다면 통합진보당의 일부 사람들이 선택하려고 했던 전쟁 반대의 방식은 결코 최적의 방편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데 국정원이 엿들었던 이야기들이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전시의 시설 파괴’와 같은 허언장담이라 해도, 이를 ‘내란예비음모’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리수에 속한다. 형법 87조의 ‘내란’의 정의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행위”인데, 대한민국 일부 영토를 떼어서 불법적 정권을 만들거나(국토 참절), 국헌을 문란케 할 만큼 전국적인 폭동을 일으키려면 그중의 상당수가 무기도 다룰 줄 모르는 약 130명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는가? ‘간첩 단체’에 대한 소설 격의 이야기를 제조하는 것이 국정원의 특기(?)인 셈인데, 이 정도면 ‘비(非)과학 판타지 소설’로 봐야 할 듯하다. 그러면 국정원이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책’을 들고 전국 무대에 등장하려 한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근인과 근본적 원인을 구별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에 대한 각종 불만이 쌓이고, 정권의 명분이 약화되고, 거기에다가 국정원 국내 파트 개혁 이야기가 나올 때쯤 되면 빠짐없이 나오는 카드는? 맞다, 바로 새로운 ‘간첩단’의 발견이다. 하도 익숙해진 순환이다 보니 거의 기시감이 들 정도다.

 

근인이야 뻔하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라는 사실은 박근혜 정권의 명분 자체를 의문에 빠뜨린다. 촛불집회의 열기가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가 불을 더 지피는 것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누적이다. 예컨대 저성장기에 불가피한 부동산시장 침체 등으로 인한 전월세 대란은 정부가 아무리 대책을 세운다 해도 내 집 없는 수백만명의 생계를 본격적으로 위협한다. 또 ‘빚내서 집 사라’는 식의 대책은 빈민층이 확대되어 천문학적인 가계부채 피라미드가 경제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민중의 처지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삶에 대한 각종 불만이 쌓이고, 정권의 명분이 약화되고, 거기에다가 국정원 국내 파트 개혁 이야기가 나올 때쯤 되면 빠짐없이 나오는 카드는? 맞다, 바로 새로운 ‘간첩단’의 발견이다. 하도 익숙해진 순환이다 보니 거의 기시감이 들 정도다.

 

근본적 원인은 약간 더 깊은 데에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사회갈등 지수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훨씬 높지만, 아직까지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신뢰하며 제대로 된 계급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예컨대 2009년의 영국 공영방송의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응답자의 43%, 멕시코 응답자의 38%, 브라질 응답자의 35%, 우크라이나 응답자의 31%가 자본주의가 이미 파산했으며 공공성 위주의 대안적 경제체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는 남유럽이나 동유럽, 남미에서 꽤나 일반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을 만나보기가 어렵다. 한국 같으면 보수층까지도 가세해 2013년의 여론조사에서 약 81%가 빈부격차의 완화를 요구했지만, 아직도 대기업의 공유화와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경제운영계획의 수립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다수는 아직까지 ‘경쟁’, 곧 재산가들의 이윤추구에 바탕을 두는 경제·사회 체제를 당연시하고, 현장에서 기업주와 투쟁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당면 경제이익을 위해서 기업 단위의 투쟁을 벌일 뿐이다. 정규직화, 곧 해당 기업의 완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을 벌이는 비정규직들의 투쟁은 이와 같은 의식과 행동양태의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수백만명에 이르는 포괄적 의미의 ‘사회 주변인’들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하는 체제를 과연 언제까지 신뢰할 것인가? 체제가 장기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종북 사냥’을 대대적으로 벌여 체제에 대한 모든 반대에 미리미리 ‘종북’과 같은 색깔을 뒤집어씌우려 한다.

 

 

그런데 과연 오늘과 같이 민중이 체제에 포섭되는 상태는 영구적일까? 박정희 이후로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드는 이 잔혹한 체제를 합리화해온 것은 무엇보다도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경제성장인데, 그 성장률은 지난해 이후로 사실상 1~2%대에 멈춰서고 말았다. 세계공황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고 중국 등 한국이 여태까지 의존해온 신흥 자본주의국가들의 고속성장이 이미 끝나가고 있기에 (경제성장률이) 더 오를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이는 장차 부동산시장의 장기침체·하락, 그리고 영세 자영업자들의 파산의 가속화를 의미할 것이다. 지금 한국 자영업의 실패율은 80%이며, 자영업자들의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임금노동자의 두 배인 160%다. 쉽게 이야기하면 빚에 시달리는 가난뱅이들은 창업과 폐업을 반복하면서 장사가 안될 때 저임금 노동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꾸린다. 가면 갈수록 더 많은 대졸자들이 취업에 실패해 이 도시빈민의 대오에 합류한다. 미래에 하등의 희망을 볼 수 없는 수백만명에 이르는 포괄적 의미의 ‘사회 주변인’들은, 그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하는 체제를 과연 언제까지 신뢰할 것인가? 그들에게 언젠가 계급적 각성의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체제가 장기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종북 사냥’을 대대적으로 벌여 체제에 대한 모든 반대에 미리미리 ‘종북’과 같은 색깔을 뒤집어씌우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좌파 민족주의자들을 본보기 삼아 두들긴다고 해도, 언젠가 이 나라를 덮어버릴 주변화된 다수의 불만의 해일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