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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book)/역사

투키디데스가 의심받는 이유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6. 3.

등록 : 2013.06.02 20:39 수정 : 2013.06.02 22:36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도널드 케이건 지음, 박재욱 옮김
휴머니스트·2만원

한번 만들어진 권위에 도전하기란 쉽지 않다. 1947년 조지 마셜 미국 국무장관은 프린스턴 대학 연설에서 “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대와 아테나이(아테네)의 몰락을 적어도 한번이라도 되새겨보지 않은 사람이 현대 국제관계의 기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제관계나 전쟁을 연구하면서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지 않을 이 누가 있으랴.

 

지난 2400년 동안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논의를 지배해왔다. 에드워드 핼릿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 서술 뒤에 숨은 역사가를 주목하라고 강조했지만, 역사가의 주장을 의심하는 맥락에서 투퀴디데스는 대상이 되지 않았다. 기원전 431~411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정보의 원천이었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가르치고 연구해온 도널드 케이건은 1969년부터 20년에 걸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부작을 펴냈다. 이후 20년 동안 은 좀더 읽기 편한 축약본을 낸 데 이어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를 내놓았다. 이번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자체가 아니라 그 전쟁을 서술하고 해석한 투키디데스가 탐구 대상이다. 이 책에서 케이건은 ‘역사의 시조’로 받아들여지는 투키디데스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린다.

 

투키디데스가 누구인가. 그는 상당히 부유한 아테나이의 귀족으로 기원전 460~455년 사이에 태어났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20대였고 기원전 424년에 장군으로 선출됐다가 스파르타가 암피폴리스를 기습 점령하자 패배한 죄로 20년 동안 추방당했다. 즉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사료를 뒤진 역사가가 아니라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이다. 지은이는 “냉정한 서술 뒤의 정열적인 개인”을 직시하며 투키디데스를 수정주의 역사가라 칭한다.

 

우선 투키디데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나이의 세력이 증대했고 이를 스파르타가 질투하고 두려워해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서로 불신하기는 했지만 충돌을 피하려 노력했으며, 전쟁은 스파르타 내 호전적 정파의 아테나이에 대한 적개심, 동맹국이었던 포테이다이아에 대한 아테나이의 강경한 대응 등 아테나이, 스파르타, 코린토스 모두 분노, 복수심, 오만에 눈이 멀어 연이어 내린 잘못된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투키디데스가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지만 사실상 페리클레스라는 제1시민이 통치했으며 그의 사후에 아테나이는 조무래기 정치가들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은이는 아테나이는 그 시기 확고한 민주정이었고 페리클레스 사후에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이 과감한 정책을 실행해 아테나이를 구했다고 평가했다. 지은이는 투키디데스가 추방자로 사는 동안 민주정을 혐오했고 때문에 당시 시민들의 지지를 받던 클레온을 무능한 겁쟁이로 묘사했다고 분석했다.

 

케이건은 투키디데스를 의심하면서도 끊임없이 찬사를 보낸다. “우리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연구한 뒤 투키디데스와 다른 결론에 이른다 해도 이는 그의 업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결국 역사가에 대한 숭배에서 벗어나 위대한 역사가와 40년 넘게 그 역사가를 연구한 학자,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책의 의도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