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동·남포동이 술에 취할 때…부산문화 화들짝 꽃피었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3-11 20:01:03
- / 본지 6면
시인·소설가·화가·기자 등 통술집·대폿집 술추렴으로 개똥철학 풀어내며 밤새워 새로운 문화재생산의 공간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랑방들 1980년대 동광동 시대 열어 양산박·산마루 등이 대표적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주인장 바뀌고 상호만 유지 문화불씨 다시 타올랐으면 광복동과 남포동. 이 두 지역을 두고 흔히 '광포동'이라 부른다.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를 아우르는 말로써 문화예술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두 지역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과 애정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인데, '부산문화 1번지'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이 광포동은 내로라하는 부산문화예술인들에게 있어 '정신적 거처'였다. 부산의 모든 문화가 광포동에서 화들짝 꽃이 피고, 새로운 경향의 예술 또한 광포동에서 도도한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때문에 광포동은 해방 이후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줄곧 부산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주로 드럼통 탁자의 통술집이나 막걸리 대폿집에서 삼삼오오 술 추렴으로 문화적 허기를 달랬다. 이른바 '문화사랑방'이라 통칭되는 이 술집들은, 문화를 사랑하는 지식인들과 문화애호가, 문화를 생산하던 언론·예술인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부박한 문화를 개탄하고, 경직된 세태를 우려하며, 자신의 개똥철학과 예술관을 피력하면서 밤을 기꺼이 지새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만의 새로운 방식의 '문화 재생산 공간'이 아니었을까 판단된다.
그 시작은 자갈치 건어물시장 입구의 '남포집'이라고 이야기 한다. 적산가옥에 남포관으로 술청을 열고 막걸리에 자갈치의 생선으로 만든 회무침과 장어내장 술국을 끓여 팔았다.
■광복동 입구, 광포동 시대 시작
광복로 입구 일광카메라 맞은편 좁은 골목에는 막걸리 주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3~40여 미터 정도의 골목 양쪽으로 갓집, 대학촌, 왕대포, 마산집, 양산집, 골목집 등이 어깨동무 하듯 마주하고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을 자처했다.
'대학촌'은 막걸리와 명태안주를 팔았는데, 부산의 대표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임호, 김봉진, 추연근, 김종식, 김원명, 한국화가 이석우, 이규옥과 미술평론가 김강석 등이 단골이었다. 향파 이주홍, 요산 김정한 선생도 최해군, 윤정규 소설가를 대동하고 드나들었다. 또한 김규태, 송재근, 최봉경 등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도 기사거리를 만들기 위해 자주 찾곤 했다고 한다.
'갓집'은 주로 정종을 팔았는데, 유리병 속에 바둑돌을 넣어 잔술을 계산했다. 부산시향 식구들이 연습을 마치고 모여서 술을 마시던 곳이다. 당시 예총회장이던 김창배와 유신, 고태국, 제갈삼 등이 자주 모였고, 무용 평론가 김이문 등도 드나들었다.
'왕대포집'은 주인장이 무쳐주는 가오리무침이 맛깔스럽고, 철철 흘러넘치게 담아내는 막걸리도 넉넉한 집이었다. '마산집'과 '양산집'은 막걸리에 부침개를 팔았기에 주머니가 가벼운 예술인들과 기자들이 드나들었고, '골목집'은 가난한 젊은 예술인들이 제각각 모여 앞날을 의논하고 술 추렴을 하던 곳이었다.
미화당 맞은편 할매회국수집 옆에는 '수복센터'가 둥근 드럼통 탁자에 따뜻한 정종 잔술을 팔았다. 주로 김규태, 허만하 등 문인들과 이광우, 송재근 등 신문사 기자들, 구철회, 정재훈 등 멋을 아는 의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지금도 주인만 바뀌었을 뿐 60여 년을 그 자리에 남아,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소가 되고 있다.
젊은 문학인들은 미화당백화점 뒷골목의 고갈비 골목을 배회하고 다녔다. '남마담집', '맘보집', '할매집' 등 10여 집을 밤늦도록 옮겨 다니며 젓가락 장단에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금은 남마담집과 할매집이 그 골목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만족시키던 문화사랑방은 광포동의 한 시대를 풍미하다 운영난으로 폐업의 길을 걸었다.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하나둘 지리멸렬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양산박과 동광동 주막시대
1980년대 들어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광복동 입구 백조다방(한화생명) 골목의 '양산박'이다. 양산박은 정용해 시인을 돕기 위해 문화인들이 십시일반 마련한 포장마차인데, 정 시인이 운영을 고사하자 소설가 윤진상이 맡아서 운영을 했다. 그러다 시인 임명수에게 장소를 넘기고 그 옆 건물(취미양복 건물)로 옮겨 같은 상호로 영업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양산박은 임명수의 '임산박'과 윤진상의 '윤산박'으로 나뉘어 각각 문화예술인들의 '문화 교류의 장터' 역할을 담당했다.
광복동을 떠난 문화사랑방은 동광동 동광초등학교 주위에서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주자가 '산마루(부산호텔 뒤 동남빌딩)'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의 부인 강정자 여사가 대구집을 시작으로 다락방, 산마루 등 상호와 장소를 옮겨가며 문화예술인들을 반겼던 사랑방이었다. 산마루는 먼구름 한형석, 율관 변창현, 천재동 등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계 어른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이곳에는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이 좌장으로 늘 자리하고 있었기에 성창순, 임동창 등 국악계 대가들과 심우성 등 민속학자, 수많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들이 부산에 오면 필히 들러 주흥에 겨운 거방진 놀음을 한판씩 벌이곤 했다.
백산기념관 아래 골목에는 인근의 골목집을 운영하던 주모 이행자가 '그냥 갈 수 없잖아'를 새로이 열었다. 원래 한형석 선생 18번 노래 제목을 간판으로 사용한 것. '부산포'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중견 화가들과 김규태 시인 등이 참여했던 목요 모임, 서세욱 등 부산을 가꾸는 모임 회원들이 자주 찾았다. 지금은 타워호텔 아래 골목으로 옮겨 성업 중에 있다.
■동광동 문화사랑방 골목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동광초등학교(용두산공원 공영주차장) 골목 앞으로 '문화사랑방'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계림, 한길, 강나루, 양산박, 수미산, 죽림헌 등이었다. 현재는 강나루, 계림, 양산박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강나루는 부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이상개 시인의 부인인 목경희 여사가 주인장으로, 부산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간간히 시 읊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하는 그야말로 '시인 사랑방'이다.
'계림'은 순박한 촌부 이매자 여사가 운영을 했었다. 주로 영화 관계자들이나 연극배우, 젊은 음악인들이 자주 들리던 곳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서울의 영화 관계자들이 대거 몰리기도 했다.
'수미산'은 시립극단 배우인 정행심이 운영했던 곳. 주로 극단 관계자와 성악가들이 자주 모였다. 가끔 가곡과 오페라의 한 장면들이 한바탕 연출되기도 하는데, 좋은 노래를 듣고 난 후면 서로 맥주를 몇 병씩 몰아주는 인심도 발휘되던 곳이었다.
'양산박'은 광복동의 '임산박'이 이곳으로 옮겨 명맥을 잇다가 주인장이 부산을 떠난 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상호만 유지하고 있다.
현재 광포동 범주의 문화사랑방 중 남아있는 곳은 수복센터와 부산포, 동광초등학교 앞 골목의 강나루 정도이다. 문화예술인이 떠나자 문화예술인들이 머물던 자리도 사라졌다.
그래도 이곳을 출입했던 이들에게는 '문화의 향유와 교류, 그리고 확대 재생산'의 풍족함에 만족해하고, 그런 장소를 제공한 이곳을 아직도 사랑하고 추억하고 있다. 광포동의 '문화 사랑방'은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광포동의 '문화사랑방 르네상스'가 다시 찾아오고, 문화의 작은 불씨가 '들불'처럼 활활 다시 부활하기를 기대해 본다.
# 사랑방 가득 예술인들의 삶과 고뇌, 추억·조명하자
- 원로들의 고증 통해 기념관 건립
- 체험프로그램 개발도 검토 가능
- 스토리 발굴·기록·보존 필요성도
광포동의 문화사랑방은 부산의 큰 문화자산이다. 해방 이후 한국동란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문화인의 예술과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낭만과 추억의 장소가 세월의 더께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잊혀져가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을 살뜰히 챙기고 거둬 먹였던 주모들도 유명을 달리하거나 일선에서 물러나 앉았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문화사랑방의 스타급 문화예술인들도 무심한 세월과 함께 피었다 졌다.
광포동의 문화사랑방은 서울 명동과 어깨를 견줄 만큼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문화 거처였다. 이들의 예술적 행보와 삶의 흔적들은 부산문화의 역사가 된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들의 뒷 이야기와 에피소드들을 발굴, 채록, 보존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들을 추억하고 재현하고 조명하는 장소도 아울러 필요하다.
예를 들면 '광포동 문화사랑방 기념관' 같은 공간이 그것이다. 문화사랑방을 드나들었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고증을 통해 유명했던 주막과 다방 등 문화사랑방을 그대로 재현, 전시하고, 일선에서 은퇴한 주모나 마담에게 이를 운영 관리케 하여 문화사랑방의 원형과 그 문화적 역할을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문화사랑방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문화예술인들과 함께하는 '광포동 문화사랑방 골목 답사', '광포동 문화사랑방 강좌' 등 문화교실 개설, 문화예술인들의 예술적 삶과 고뇌, 에피소드 등을 무대에 올리는 상설연극 공연 등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들의 이야기를 발굴, 채록하는 학예연구사를 두어 이 모든 기록을 아카이브 하고, 나아가 예술사적인 조명과 관련 학문의 기초자료로서 가치를 가지는 '원천스토리 발굴의 산실'로 확대해 나갔으면 한다.
# '산마루' 주모 강정자 여사
- 음식솜씨·미색 겸비 여장부, 주당들의 사랑 한몸에
- 30대 후반 '대구집' 인수, 사랑방 시작
- 가난한 예술인에겐 공짜술에 용돈도
- 술주정엔 가차없이 빗자루 몽둥이질
- 칠순에 남은 건 추억과 외상장부뿐
'산마루'의 주모 강정자(69·사진) 여사는 '문화사랑방의 여장부'로 유명하다. 30대 후반에 동광초등학교 골목의 대구집을 인수하여 문화사랑방을 시작했는데, 워낙 미색도 뛰어나고 음식 솜씨가 좋아 이곳을 드나드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거제 하청이 고향이라 갯것 재료의 음식은 그야말로 일미를 자랑했다. 홍어는 남도예술가들에게도 소문이 자자해, 그 맛에 반해 드나드는 이들도 있었다. 조기와 가오리는 상자 째 사서 찜을 하는데, 주흥이 도도할 때쯤이면 동이 나 주당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곤 했다.
가끔씩 '조기 맛 있게 먹기' 경연도 하고 그 부상으로 호기롭게 술상을 새로 내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대여섯 평의 공간에 사람들이 몰려와 줄을 서거나 인근 다방에서 기다리다 자리를 잡는 진풍경도 벌어지곤 했다. 다락방 시절에는 가게 앞에 맥주 박스를 놓고 쟁반을 얹은 즉석 술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때문에 화장실도 즉석(?)에서 해결되기 일쑤였다.
맛있는 음식에 호기로운 여장부 주모가 주흥을 더하다 보니, 수많은 예술인들이 즉석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는데, 춤과 악기, 소리 등이 어우러진 신명난 자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졌다. 이 신명을 강 여사는 주방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특히 될성부른 젊고 가난한 예술인들을 잘 챙겼는데, 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투정도 잘 받아줘 인기가 좋았다. 이들에게는 그저 퍼주다시피 할 정도로 음식 손도 커, 가끔씩 밑지는 장사도 감수할 줄 아는 대범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전시회를 하거나 공연을 할 때는 밥값이라도 찔러주고,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는 말없이 그들의 작품을 떠안아 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던, 큰누님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술주정으로 사랑방 분위기를 흐린다거나 옆 술청에 방해가 되면 가차 없이 쫓겨나거나 빗자루나 대걸레 자루로 치도곤을 당하곤 했다. 문화계 어른들도 술 기운에 경우 없는 말을 했다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강 여사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산마루를 끝으로 업을 접은 강정자 여사. 칠순에 닿은 연배에 이제 남은 것은 문화예술인들과의 추억과 그들이 남기고 간 외상장부 뿐이다. 장부는 외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드나들던 사람과 그 아름다운 기억들을 추억하기 위해 보관 중이란다. 광포동 문화사랑방 시대를 오롯이 함께한 노(老) 주모의 눈에는 그저 아련함만 가득하다.
■ 필자 최원준 약력
-1987년 문예지 '지평'으로 시인 등단
-시집 '오늘도 헛도는 카세트테이프', '금빛 미르나무숲', '北邙'
-공저 '부산, 장소를 꿈꾸다-스토리텔링집' 등
-현 문화공간 수이재(守怡齋) 대표, (사)최계락문학상재단 사무국장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중구, 국제신문
이 광포동은 내로라하는 부산문화예술인들에게 있어 '정신적 거처'였다. 부산의 모든 문화가 광포동에서 화들짝 꽃이 피고, 새로운 경향의 예술 또한 광포동에서 도도한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때문에 광포동은 해방 이후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줄곧 부산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주로 드럼통 탁자의 통술집이나 막걸리 대폿집에서 삼삼오오 술 추렴으로 문화적 허기를 달랬다. 이른바 '문화사랑방'이라 통칭되는 이 술집들은, 문화를 사랑하는 지식인들과 문화애호가, 문화를 생산하던 언론·예술인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부박한 문화를 개탄하고, 경직된 세태를 우려하며, 자신의 개똥철학과 예술관을 피력하면서 밤을 기꺼이 지새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만의 새로운 방식의 '문화 재생산 공간'이 아니었을까 판단된다.
그 시작은 자갈치 건어물시장 입구의 '남포집'이라고 이야기 한다. 적산가옥에 남포관으로 술청을 열고 막걸리에 자갈치의 생선으로 만든 회무침과 장어내장 술국을 끓여 팔았다.
■광복동 입구, 광포동 시대 시작
1990년대 초반 동광동 '다락방' 술집에서 흥을 주체 못하고 춤을 추는 주당들과 즉흥연주를 펼치는 모습이다. 최원준 시인 제공·일부 국제신문 DB |
'대학촌'은 막걸리와 명태안주를 팔았는데, 부산의 대표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임호, 김봉진, 추연근, 김종식, 김원명, 한국화가 이석우, 이규옥과 미술평론가 김강석 등이 단골이었다. 향파 이주홍, 요산 김정한 선생도 최해군, 윤정규 소설가를 대동하고 드나들었다. 또한 김규태, 송재근, 최봉경 등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도 기사거리를 만들기 위해 자주 찾곤 했다고 한다.
'갓집'은 주로 정종을 팔았는데, 유리병 속에 바둑돌을 넣어 잔술을 계산했다. 부산시향 식구들이 연습을 마치고 모여서 술을 마시던 곳이다. 당시 예총회장이던 김창배와 유신, 고태국, 제갈삼 등이 자주 모였고, 무용 평론가 김이문 등도 드나들었다.
'왕대포집'은 주인장이 무쳐주는 가오리무침이 맛깔스럽고, 철철 흘러넘치게 담아내는 막걸리도 넉넉한 집이었다. '마산집'과 '양산집'은 막걸리에 부침개를 팔았기에 주머니가 가벼운 예술인들과 기자들이 드나들었고, '골목집'은 가난한 젊은 예술인들이 제각각 모여 앞날을 의논하고 술 추렴을 하던 곳이었다.
미화당 맞은편 할매회국수집 옆에는 '수복센터'가 둥근 드럼통 탁자에 따뜻한 정종 잔술을 팔았다. 주로 김규태, 허만하 등 문인들과 이광우, 송재근 등 신문사 기자들, 구철회, 정재훈 등 멋을 아는 의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지금도 주인만 바뀌었을 뿐 60여 년을 그 자리에 남아,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소가 되고 있다.
젊은 문학인들은 미화당백화점 뒷골목의 고갈비 골목을 배회하고 다녔다. '남마담집', '맘보집', '할매집' 등 10여 집을 밤늦도록 옮겨 다니며 젓가락 장단에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금은 남마담집과 할매집이 그 골목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만족시키던 문화사랑방은 광포동의 한 시대를 풍미하다 운영난으로 폐업의 길을 걸었다.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하나둘 지리멸렬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양산박과 동광동 주막시대
1980년대 들어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광복동 입구 백조다방(한화생명) 골목의 '양산박'이다. 양산박은 정용해 시인을 돕기 위해 문화인들이 십시일반 마련한 포장마차인데, 정 시인이 운영을 고사하자 소설가 윤진상이 맡아서 운영을 했다. 그러다 시인 임명수에게 장소를 넘기고 그 옆 건물(취미양복 건물)로 옮겨 같은 상호로 영업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양산박은 임명수의 '임산박'과 윤진상의 '윤산박'으로 나뉘어 각각 문화예술인들의 '문화 교류의 장터' 역할을 담당했다.
광복동을 떠난 문화사랑방은 동광동 동광초등학교 주위에서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주자가 '산마루(부산호텔 뒤 동남빌딩)'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의 부인 강정자 여사가 대구집을 시작으로 다락방, 산마루 등 상호와 장소를 옮겨가며 문화예술인들을 반겼던 사랑방이었다. 산마루는 먼구름 한형석, 율관 변창현, 천재동 등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계 어른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이곳에는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이 좌장으로 늘 자리하고 있었기에 성창순, 임동창 등 국악계 대가들과 심우성 등 민속학자, 수많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들이 부산에 오면 필히 들러 주흥에 겨운 거방진 놀음을 한판씩 벌이곤 했다.
백산기념관 아래 골목에는 인근의 골목집을 운영하던 주모 이행자가 '그냥 갈 수 없잖아'를 새로이 열었다. 원래 한형석 선생 18번 노래 제목을 간판으로 사용한 것. '부산포'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중견 화가들과 김규태 시인 등이 참여했던 목요 모임, 서세욱 등 부산을 가꾸는 모임 회원들이 자주 찾았다. 지금은 타워호텔 아래 골목으로 옮겨 성업 중에 있다.
■동광동 문화사랑방 골목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동광초등학교(용두산공원 공영주차장) 골목 앞으로 '문화사랑방'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계림, 한길, 강나루, 양산박, 수미산, 죽림헌 등이었다. 현재는 강나루, 계림, 양산박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강나루는 부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이상개 시인의 부인인 목경희 여사가 주인장으로, 부산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간간히 시 읊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하는 그야말로 '시인 사랑방'이다.
'계림'은 순박한 촌부 이매자 여사가 운영을 했었다. 주로 영화 관계자들이나 연극배우, 젊은 음악인들이 자주 들리던 곳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서울의 영화 관계자들이 대거 몰리기도 했다.
'수미산'은 시립극단 배우인 정행심이 운영했던 곳. 주로 극단 관계자와 성악가들이 자주 모였다. 가끔 가곡과 오페라의 한 장면들이 한바탕 연출되기도 하는데, 좋은 노래를 듣고 난 후면 서로 맥주를 몇 병씩 몰아주는 인심도 발휘되던 곳이었다.
'양산박'은 광복동의 '임산박'이 이곳으로 옮겨 명맥을 잇다가 주인장이 부산을 떠난 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상호만 유지하고 있다.
현재 광포동 범주의 문화사랑방 중 남아있는 곳은 수복센터와 부산포, 동광초등학교 앞 골목의 강나루 정도이다. 문화예술인이 떠나자 문화예술인들이 머물던 자리도 사라졌다.
그래도 이곳을 출입했던 이들에게는 '문화의 향유와 교류, 그리고 확대 재생산'의 풍족함에 만족해하고, 그런 장소를 제공한 이곳을 아직도 사랑하고 추억하고 있다. 광포동의 '문화 사랑방'은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광포동의 '문화사랑방 르네상스'가 다시 찾아오고, 문화의 작은 불씨가 '들불'처럼 활활 다시 부활하기를 기대해 본다.
# 사랑방 가득 예술인들의 삶과 고뇌, 추억·조명하자
- 원로들의 고증 통해 기념관 건립
- 체험프로그램 개발도 검토 가능
- 스토리 발굴·기록·보존 필요성도
광포동의 문화사랑방은 부산의 큰 문화자산이다. 해방 이후 한국동란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문화인의 예술과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낭만과 추억의 장소가 세월의 더께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잊혀져가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을 살뜰히 챙기고 거둬 먹였던 주모들도 유명을 달리하거나 일선에서 물러나 앉았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문화사랑방의 스타급 문화예술인들도 무심한 세월과 함께 피었다 졌다.
광포동의 문화사랑방은 서울 명동과 어깨를 견줄 만큼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문화 거처였다. 이들의 예술적 행보와 삶의 흔적들은 부산문화의 역사가 된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들의 뒷 이야기와 에피소드들을 발굴, 채록, 보존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들을 추억하고 재현하고 조명하는 장소도 아울러 필요하다.
예를 들면 '광포동 문화사랑방 기념관' 같은 공간이 그것이다. 문화사랑방을 드나들었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고증을 통해 유명했던 주막과 다방 등 문화사랑방을 그대로 재현, 전시하고, 일선에서 은퇴한 주모나 마담에게 이를 운영 관리케 하여 문화사랑방의 원형과 그 문화적 역할을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문화사랑방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문화예술인들과 함께하는 '광포동 문화사랑방 골목 답사', '광포동 문화사랑방 강좌' 등 문화교실 개설, 문화예술인들의 예술적 삶과 고뇌, 에피소드 등을 무대에 올리는 상설연극 공연 등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들의 이야기를 발굴, 채록하는 학예연구사를 두어 이 모든 기록을 아카이브 하고, 나아가 예술사적인 조명과 관련 학문의 기초자료로서 가치를 가지는 '원천스토리 발굴의 산실'로 확대해 나갔으면 한다.
# '산마루' 주모 강정자 여사
- 음식솜씨·미색 겸비 여장부, 주당들의 사랑 한몸에
- 30대 후반 '대구집' 인수, 사랑방 시작
- 가난한 예술인에겐 공짜술에 용돈도
- 술주정엔 가차없이 빗자루 몽둥이질
- 칠순에 남은 건 추억과 외상장부뿐
거제 하청이 고향이라 갯것 재료의 음식은 그야말로 일미를 자랑했다. 홍어는 남도예술가들에게도 소문이 자자해, 그 맛에 반해 드나드는 이들도 있었다. 조기와 가오리는 상자 째 사서 찜을 하는데, 주흥이 도도할 때쯤이면 동이 나 주당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곤 했다.
가끔씩 '조기 맛 있게 먹기' 경연도 하고 그 부상으로 호기롭게 술상을 새로 내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대여섯 평의 공간에 사람들이 몰려와 줄을 서거나 인근 다방에서 기다리다 자리를 잡는 진풍경도 벌어지곤 했다. 다락방 시절에는 가게 앞에 맥주 박스를 놓고 쟁반을 얹은 즉석 술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때문에 화장실도 즉석(?)에서 해결되기 일쑤였다.
맛있는 음식에 호기로운 여장부 주모가 주흥을 더하다 보니, 수많은 예술인들이 즉석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는데, 춤과 악기, 소리 등이 어우러진 신명난 자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졌다. 이 신명을 강 여사는 주방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특히 될성부른 젊고 가난한 예술인들을 잘 챙겼는데, 그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투정도 잘 받아줘 인기가 좋았다. 이들에게는 그저 퍼주다시피 할 정도로 음식 손도 커, 가끔씩 밑지는 장사도 감수할 줄 아는 대범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전시회를 하거나 공연을 할 때는 밥값이라도 찔러주고,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는 말없이 그들의 작품을 떠안아 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던, 큰누님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술주정으로 사랑방 분위기를 흐린다거나 옆 술청에 방해가 되면 가차 없이 쫓겨나거나 빗자루나 대걸레 자루로 치도곤을 당하곤 했다. 문화계 어른들도 술 기운에 경우 없는 말을 했다가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강 여사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산마루를 끝으로 업을 접은 강정자 여사. 칠순에 닿은 연배에 이제 남은 것은 문화예술인들과의 추억과 그들이 남기고 간 외상장부 뿐이다. 장부는 외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드나들던 사람과 그 아름다운 기억들을 추억하기 위해 보관 중이란다. 광포동 문화사랑방 시대를 오롯이 함께한 노(老) 주모의 눈에는 그저 아련함만 가득하다.
■ 필자 최원준 약력
최원준 시인 |
-시집 '오늘도 헛도는 카세트테이프', '금빛 미르나무숲', '北邙'
-공저 '부산, 장소를 꿈꾸다-스토리텔링집' 등
-현 문화공간 수이재(守怡齋) 대표, (사)최계락문학상재단 사무국장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중구,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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