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서 건너온 여신, 임란의 참상 본 뒤 민초 아낙으로 현신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2-11-20 20:12:33
- / 본지 20면
영도 스토리텔링의 샘으로 통하는 봉래산 자락의 아씨당 입구와 아씨당에 모셔진 여신(작은 사진). 이곳의 아씨는 제주의 여신으로 생활력 강한 영도 아지매의 현신이다. |
- 절영도에서 말 기르다
- 백성 도륙 전쟁 목격
- 절망 맞서는 여인 현신
- 50리길 왕복 어물 행상
- 조선소 깡깡이 아지매
- 출가 해녀 등으로 변신
- 억척스레 가족을 부양
- 아씨의 포용력 덕인지
- 영도엔 온갖 신이 좌정
- 젊은 자갈치 아지매서
- 그녀의 모습 엿보기도
제주 여신이 영도에 지번(地番)을 얻어 살고 있다. 봉래산 서북쪽, 신선동 산3-6번지에 좌정한 '산제당 아씨'가 그 신위다. 타지의 더부살이가 다소 구차해 보이지만 신도 때로 사랑에 빠지면 객지생활을 감수해야 한다. 아씨의 본명은 '칠원성군'- 고려시대에 제주도에서 건너 온 사연 많은 여신이다. 옥황상제에게 죄를 지어 탐라국 여왕이 되었고, 최영 장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그의 첩이 되었다. 다시 최영 장군이 신돈에게 모함당해 절영도에 유배되었단 말을 듣고 찾아왔다 죽어 그만 객지의 고혼이 되었다.
물론 그 스토리는 실제 역사와 다르다. 역사에서의 신돈은 1371년에 죽었고, 제주민란은 이듬해인 1372년에 일어났으며, 최영 장군은 1376년에도 홍산대첩에서 여전히 용맹을 떨쳤다. 스토리텔링이란 언제나 그렇다. 마음 짠한 후과(後果)가 있으면 언제든 앞의 내용이 바뀌게 마련이다. 민초들 누구나 상상력을 발휘해 줄거리를 바꾸는 게 스토리텔링의 매력이다. 문제는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정발 장군 꿈에 나타난 아씨
영도의 절영마 조형물. 영도가 말을 키우는 목마장이 된 것도 아씨당이 돌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아씨는 장군에게 청했다. "나의 사당을 지어주면 군마는 무병장수하고, 주민도 소원성취 할 것"이라고. 장군이 상소를 올리자 조정은 즉각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명을 내려 아씨당을 신축하고 제사를 올리게 했다. 제당 자리는 지금의 신선1동 영도초등학교 뒤편으로, 영도 군마를 육지로 나르는 대풍포와 부산포가 바라보는 봉래산 발치였다. 그곳에 당을 짓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검은 수퇘지를 잡아 정성껏 치성을 올렸다.
그렇다면 그 제사는 효험을 봤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른바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며 어린아이며 쥐새끼까지 찾아 남김없이 도륙한 임진란 첫 번째 비극은 저들의 뜻대로 진행됐다. 그런즉 부산 첨사의 꿈에 제주 여신이 현몽했다는 일화는 아마 뒷날 만들어진 스토리텔링일지 모른다. 역사는 가정을 용납하지 않지만, 그런 역사 또한 용납하기 어려웠던 민초들이 마음을 모아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었을 테다. 그 끔찍한 초량진 전투의 참상을 목도한 산제당 아씨는 분노했다. 봉래산 제당으로 돌아가 말이나 기르고 억새풀밭을 거닐며 세월을 보낼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 점지된 자신의 역할을 되짚어본 아씨는 백성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임진년 그 해에는 기왓장을 던지며 왜군과 싸운 동래성의 아낙이 되었다가 왜적에 붙들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기둥으로 굳어진 초량의 아낙이 되기도 했다. 현신을 거듭하면서부터는 신분이나 호칭이 중요하지 않았다. 절망과 체념에 맞설 더 강한 운명애(運命愛)를 지닌 모습만이 필요했다.
■경상도에 이주해온 제주 해녀들
영도에 정착한 제주 해녀들도 아씨당의 사연과 무관하지 않다. |
그런 현신 중에서도 아씨가 기뻐하며 자청한 역할이 제주에서 온 '잠수', 곧 '출가 해녀'였다. 1880년경부터 제주 본가에서 뭍으로 건너와 일본 해녀와 경쟁해가며 뿌리를 내린 제주 '잠수'는 사실 오래전 아씨 자신의 백성들이었다. 고무 옷도 없던 시절, 입은 옷 그대로 영하의 물속에 뛰어들어 3분 넘게 숨을 참는 그녀들은 일본인 객주를 사로잡았다. 1910년대에만 4000여 명이 경상도에 이주해 온 '출가 해녀'는 저마다 제주에 남은 식솔들을 위해 바다를 건넜다. 물론 공업 원료인 우뭇가사리를 노리고 한반도에 모여든 일본인 객주와 해조상인의 적극적 유인책도 큰 몫을 했다.
■생활력 강한 영도 아지매들
영도 봉래산 기슭의 산제당 내 장군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등산객들. 국제신문DB |
그런 와중에 자신들을 괴롭히던 어촌계 간부를 설복시키거나 현지인과 어울려 오순도순 살게 된 화합의 계기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특히 1970년 한때 주민의 8할이 '제주계(系)'였던 영도는 도처에 보이는 '제주○○' 간판처럼 제주문화가 깊게 스민 곳이지만, 아쉽게도 그걸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무튼 '어물행상'에서 '깡깡이 아지매'로, 다시 '출가 해녀'로 모습을 바꾼 현신은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6.25 직후 아씨는 피난길에 남편 잃고 부산까지 흘러온 젊은 과수댁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어쨌거나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살아있는 몸뚱이로 뭔들 못해!" 막상 나서고 보니 체면이나 염치, 가문이나 학벌 따위는 사치품이었다. '몸뻬' 입고 공판장 생선을 '다라이'에 받아 좌판을 펼쳐놓고 보니, 봉래시장, 남항시장, 자갈치시장이 온통 내 세상이었다. 그 위에 참한 총각 하나 구해 고기비늘 다듬고 회까지 떠서 내놓으면 금상첨화였다. 평생 남 앞에 나서본 적도 없던 양갓집 규수로선 다시 태어나기보다 어렵던 그 변신(變身)의 멘토가 바로 제주 해녀였다. 그렇게 시작해 수십 년간 간장게장 담느라 손이 연탄처럼 검게 변해도 '자갈치 아지매'는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
김정하 한국해양대교수 |
다시 그것은 순환과 재생, 부활과 변신의 법칙을 지닌 신화법칙에 의해 가능한 터이고, 그 법칙이 담긴 '산제당 아씨 전설'은 마르지 않는 스토리텔링의 샘이다. 이를 잘 응용하면 첨단 유행과 풍속, 축제 모티프와 애니메이션 소재 뿐 아니라 그로부터 찾아낸 교훈과 재미로 우리네 팍팍한 삶에 '신명'을 지피기에 그만이다.
그런데 정작 아씨 자신은 꼬여버린 의문을 풀지 못한 채로 지내왔다. 자신을 영도에 오게 하고도 벌써 육백 년 째나 감감무소식인 '최영 장군'은 대체 누구인가. 영도가 섬겨야 할 '어업의 신'인가, 아니면 '산제당의 부군(夫君) 신'인가. 오래전부터 산제당 윗쪽에는 산신이 좌정해 있었고, 2대째 당주인 장운표(54) 씨 역시 그 산신이 아씨의 부군이라 믿는다. 부정 탈 얘기지만 제 아무리 최영 장군신이라도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
그러다 삼십여 년 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야 아씨는 깨달았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 고기-"
고래 고기보다도 못한 서울내기라…. 그것은 온갖 사단을 저질러놓고도 책임은 백성에게 떠넘겨온 서울의 정치인들을 꾸짖는 소리였다. 그 노래에 아씨는 이웃 통영에서 신출귀몰 왜구를 물리치다 중앙 관군의 계략에 말려 비참하게 죽은 '설운 장군 전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최영 장군 역시 어쩔 수 없는 중앙의 인물 아니던가. 그제야 아씨는 최영 장군과의 인연보다 영도주민의 기원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져먹었다.
■신의 섬, 영도의 포용력
지난 주말, 녹물 든 오솔길을 따라 찾아간 신선동 산제당에는 육백 년의 적요(寂寥)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적요에 담겨 아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걱정 말아라. 그 지난한 세월도 이겨왔는데, 까짓 아들 낳게 해달라는, 돈 벌게 해달라는 지청구쯤 못 들어주랴.' 그런 아씨의 위안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모양이다. 요즘도 그곳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9월 보름에 마을 사람이 힘을 모은 제사가 치러지고, 영도 뿐 아니라 먼 타지에서까지 찾아와 안녕과 소원을 빈다고 한다.
산제당 아씨의 포용력 덕분인지, 영도는 어느덧 신의 강역(疆域)이 되었다. 봉래산을 가운데로 봉래산 할매를 비롯해 당산할배가 여섯, 당산할매가 셋이나 좌정해 있다. 진작에 고려말 나옹화상이 창건했다는 신선동 복천사 외에 1868년 탄압을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가 숨어살던 청학성당이 들어섰고, 1893년 일본에서 들어온 천리교도 동삼동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대교 옆 봉래동 입구에 일본풍의 지장보살이 남아있는가 하면 길 건너편 삼층건물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마조신이 모셔져 있다.
내쳐 신의 흔적만 찾아다니다 보니 이번엔 사람이 그립다. 영도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서는 참에 해거름 녘의 자갈치 시장을 찾았다.
"밑으로! 밑으로!"
나이 이제 막 서른이나 됐을까. 라텍스 앞치마를 야무지게 두르고 고무장갑으로 무장한 아낙의 목소리가 당차다. 어설프게 들이댄 이편의 카메라 각도를 얼굴에서 좌판 쪽으로 내리라는 요구다. 그 외마디에 외부의 시선에 대한 '자갈치 아지매'의 감정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자갈치 아지매'로는 4대가 될 그녀가 오늘은 '산제당 아씨'의 또 다른 현신이다. 아씨도 유행에 맞게 성형수술을 했는지, 모자 아래 오뚝한 콧날이 맵다. 왠지 잃어버렸던 육친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찔끔 돋는다.
글·사진=김정하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영도구,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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