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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영도구/영도구

이야기 공작소 <2-3> 영도 스토리텔링 보물 캐기- 영도 조선소 테마거리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15.

100년 넘은 조선소 찾아가는 10리 길은 근대 추억의 파노라마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2-11-13 20:27:27
  • / 본지 18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영도의 옛 다나카 조선소. 해방 후 대양조선, 남양조선, 유진, 에스엔케이라인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근대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 최부림 부산관광컨벤션뷰로 실장
- 1887년 한국 최초의
- 근대식 목선 조선소
- 다나카 조선소 세워져
- 이름 바뀌었지만 아직 역사의 현장 지켜

- '바람 피하는' 대풍포에
- 전용선착장 만들 때
- 사유지 어이없이 뺏겨

- 일본 할매 모신 용신당
- 영도다리 공사 때 죽은 혼령 위로한다는 설도

- 크고 작은 수리소엔 '깡깡이 아지매' 비지땀
- 영도도선장에서 보는 남항 등 풍경도 이국적

이른 아침,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지만 피부에 닿는 바람은 아직 상쾌하다. 한창 공사 중인 영도다리를 넘어 걷는다. 영도경찰서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든다. 바다가 보이면서 쌉소롬한 바닷내음과 메캐한 쇠가루 냄새가 조화를 이루며 코를 간지럽힌다.

대풍포구가 나온다. 주위에는 선박 엔진과 부품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크고 작은 각종 어선과 선박들이 선류장에 가득 정박해 있다. 멀리 조선소 크레인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대풍포를 살짝 지나면 영도 대평동과 중구 남포동을 이었던 도선 터미널인 영도도선장을 만난다. 지금은 뱃길이 끊겨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이곳에서부터 대평북로 길에는 50여 개의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버선 모양의 해안을 따라 쭉 들어서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STX 부산조선소와 영도다리 토목공사 때 사고로 죽은 영혼을 기리는 용신당을 지난다. 곧이어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들이 해안을 준설하고 군선을 숨긴 사츠마보리다. 내친김에 해안길을 따라 남항 홍등대까지 걷는다. 바다 건너편에는 백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가 과연 어디일까? 100년이 넘은 근대의 추억이 눈앞에 펼쳐진다.

■국내 최초의 근대 조선소

   
전통 있는 조선소들이 밀집해 있는 영도 대평동 일대의 골목길.
조선소 성가대에 서서 부산항을 보고 있는 일본인 다나카 사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흐른다. 얼마나 많은 일본 조선업체들이 조선 진출을 원했던가! 황금어장인 조선 앞 바다에 자신이 만든 목선을 타고 일본 어선들이 조선 앞바다를 장악할 것을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더구나 자신이 조선에 일본 업체로서는 제일 처음 진출했으니….

영도는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요람이며 해운입국의 모태이자 중심이다. 신라 해상왕 장보고, 고려의 최무선, 조선의 이순신을 잇는 조선(造船) 전통이 영도에서 꽃을 피웠다. 이를 기념하듯, 1989년 조선실업인 단체인 '반류회'는 남항동 2가 대평초등학교 교정에 '한국 근대조선 발상 유적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일제 침략기인 탓에 타율적인 개항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유서깊은 자취다.

1887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목선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대평동 대풍포 일대에 세워진다. 다나카 조선공장 설립 이후 대풍포와 대평북로 길에는 크고 작은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60여개 들어섰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해군 공창의 관할 하에 요코스카, 오노하마 등의 조선소를 대거 만들었고, 도쿄의 쓰키지, 구레 조병창 등에서 대형 군함과 선박을 건조한다. 조선 목수들과 배를 만드는 우리나라 업체들은 사실상 세계적 수준의 조선 기술을 가진 일본 업체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진다.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지 50년 후인 1937년 국내 최초의 철강 조선소인 조선중공업(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이 일본인에 의해 건립되면서 영도는 자의든 타의든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중심이 된다. 다나카 조선소는 해방 후 대양조선, 구일조선, 남양조선, 유진, 에스엔케이라인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근대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바람을 피하는 포구 '대풍포'

대풍포는 바다에 바람이 일어 파도가 높을 때면 어선들이 피항하기 좋았다. 그래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포구'란 뜻의 '대풍포(待風浦)'란 이름이 붙었다. 1887년 이후 대풍포 갯가 일대에 일본인 조선소가 하나 둘 들어서면서 일본 조선업체들은 대풍포를 그들의 전용 선착장으로 만들 궁리를 한다. 때마침 부산에 온 조선 정부 고위 관리에게 부산주재 일본영사를 통해 대풍포에 전용선착장을 마련해 줄 것을 간청한다. 대풍포의 입지 조건을 확인하지도 않은 정부 관리는 일본 영사의 말만 믿고 덜컥 허락한다. 대풍포 갯가 땅 중 대부분은 사유지여서 땅 주인들이 땅문서를 들고 동래부를 찾아 항의했지만 이미 대풍포 주변 땅들은 일본인 조선거류민단 소유가 되어 땅문서는 휴지조각이 돼 버린다.

대풍포 주변에 있는 대동대교 맨션은 영도의 근현대사와 함께 해 왔다. 1909년께 부산은 물론 영도의 산업시설과 공장은 거의 일본인이 운영하였는데, 이런 틈바구니 속에 부산의 선각자 박기종이 이곳에 미국계 스텐다드 석유대리점을 설립한다. 해방기 이후 이 자리에는 대교동 부산대교(영도다리) 아래에 지어진 20여 채의 창고 중의 하나인 승리창고가 들어선다. 승리창고는 '승리창고 조청 빼먹던 재미'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유명했다. 1935년에는 로프(줄)공장이 들어섰고 그 후에는 솥공장, 간장공장, 주정공장(양조장)이 뒤를 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대풍포에서 보이는 대동대교 맨션 1층은 아직도 배 수리공장과 배 부품 가게들이 입주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주공복합 아파트(?)라는 사실이다.

■일본 할매 신 모신 용신당

영도구 남항동 옛 수산진흥원 자리 뒤에는 일제시기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용신당(龍神堂)'이 있다. 용신당에서 모신 할매는 '카미(神)사마'로서 일본 할매다. 영도에 일본 할매신이 모셔진 것은 남항동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고, 어업기지 및 수산관계 기관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용신당은 1959년 태풍 사라호에 의하여 무너진 후 다시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것으로, 영도다리 토목 공사 때 죽은 혼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츠마보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사츠마(가고시마의 옛 지명) 수군들이 군선을 숨기기 위해 해안을 준설해 만든 ㄷ자형 포구였는데, 일제 강점기에 주위 일부를 매립했다. 화해와 교류의 상징인 절영도 왜관이 있던 곳도 바로 여기다. 지금은 어선보다 작업선들이 많으며 남항 어촌계가 관리하고 있다.

■영도 조선소 10리 테마길 만들자

   
최부림 부산관광컨션뷰로 실장
이처럼 영도 대풍포 일대 옛길은 스토리텔링의 보고다. '100년 넘은 조선소를 찾아가는 10리 길'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오직 영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100년 전의 조선소가 남아 있다는 자체도 흥미거리다.

큰 배에 매달려 녹을 깍아내는 '깡깡이 아지매', 쉼 없이 오가는 바다의 택시인 통선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평북로 조선소 길에 있는 크고 작은 수리 조선소 사이로 보이는 원도심 풍경은 실로 장관이다.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배, 지금까지 큰 감흥 없이 본 용두산공원과 부산타워도 새롭다. 영도 도선장에서 보이는 남항과 자갈치시장, 공동어시장의 풍경은 이국적이다. STX 부산조선소는 배 건조 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산업 관광코스로 제격이다. 내년에 영도다리가 재개장되면 이야깃거리는 하나 더 늘어난다.

'100년 넘은 조선소 찾아가는 10리 길'에서 옛 영도 사람들의 삶과 근대 부산의 추억을 되살린다면, 명품 스토리텔링 테마 걷기코스가 탄생한다. 영도를 먹여 살릴 이야기 프로젝트의 구체적 실행 전략을 짜야 할 때다.


# 대평동 터줏대감의 조선소 이야기

- "54년간 조선소 밥 먹어… 배 만들고 수리 다 해봤다 아잉교"
- 대양조선에 첫 입사 후 다시 이곳에 돌아왔제
- 조선소 이름 모두 기억

- 다나카 사장 자녀 일행, 작년에 이곳 방문해
- 기술자 우대하는 풍조, 꼭 만들어야 합니데이

   
영도 대평동의 터줏대감으로 통하는 에스엔케이라인 조선소 서태숙(오른쪽) 직장과 이 회사의 김영도 대표.
영도 에스엔케이라인(주)에서 일하는 서태숙(69) 직장은 영도 대평동의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그는 근대 조선소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다나카 조선소의 역사와 이후 변화 과정을 꿰뚫고 있었다. 그를 만나 영도 조선소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선소에서 근무하신 지는 얼마나 되시는지요?

▶1958년 대양조선(구 다나카 조선소)에 입사해 계속 조선소에서만 일해 왔으니 올해로 54년 조선소 밥을 먹고 있제. 처음에는 목선을 만드는 목수로 시작해서 지금은 철강으로 만든 배를 수리하는 기술자로 일한다 아잉교.

-54년 동안 근무한 조선소 이름은 다 기억하시는지요?

▶아, 알지. 대평동에서만 55년을 살았으니 눈 감고도 이곳 지리는 훤하지. 맨 처음에 대양조선에 첫 입사를 한 후 구일조선, 강남조선, 남양조선, 진해조선, 삼화조선, 다대포조선에 다니다가 여기 에스엔케이라인까지 왔제. 진해조선과 다대포조선만 빼고 모두 이곳 대풍포 주변에 있는 조선소에서 일했응게. 대양, 구일, 남양, 에스엔케이라인은 다나카 조선소 이름이 바뀐 게야.

-다나카 조선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왜정 시대에 제일 큰 조선소라고 하데. 해방 이후 한미석유 대표인 이 모씨가 인수해 대양조선 이름으로 운영했다지. 이 모씨는 자유당 말기에 국회의원까지 한 유명 인사 아잉교. 작년에 다나카 사장의 아들과 딸 등 일행 4명이 이곳을 방문해 여기 저기를 돌아보고 갔어.

-첫 입사한 대양조선은 지금의 에스엔케이라인과 같은 자리인지요?

▶그러지. 입사해 들어와 보니 공장에는 재제소, 배를 들어 올리는 성가대, 부품공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다나카 조선소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하더라구.

-60년대 대풍포는 어떠했습니까?

▶1958년께 대풍포 우림해운(옛 동아조선철공소) 앞에 숯과 장작을 쌓아 놓고 팔았지. 숯과 장작은 육지에서 돛단배로 싣고 온 것이라고 하지. 또 옛 동아조선철공소 앞에서 주민들이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씻을 때 바닷물로 씻고, 밥을 안칠 때는 민물을 썼는데 좀 짭짤한 것이 밥맛이 좋았어.

-오랫동안 조선소에 근무하신 소감은요?

▶내가 조선소에서 기술자로 일하는 마지막 세대지 아마. 54년 동안 조선소 밥 먹었으니 내가 최고 아잉교.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자를 우대하는 풍토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데이. 기술이 있어야 조선 산업도 살아남고, 대풍포에 있는 수리조선소들도 살아남아요. 그것을 우찌 좀 해 보이소.


글·사진=최부림 부산관광컨션뷰로 실장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영도구,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