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상징, 옛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날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2-11-06 19:05:28
- / 본지 18면
1934년 11월23일 영도다리 개통식 때 운집한 시민들. 이날 처음으로 다리를 건넌 사람이 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국제신문 DB |
- 소규모 도선 5척 전부
- 주민 요구 높아지면서
- 해안매립·가교 등 검토
- 곤돌라 매단 형식에서
- 도개교로 방향 틀어져
- 가동교 특허 갖고 있던
- 야마모토 우타로 설계
- 2년 7개월간의 공사 후
- 1934년 11월 23일 준공
- 우량아동 124명 선두로
- 당일 5만명 다리 건너
■재탄생을 위한 해체
"쿵쿵, 쿠웅쿵!"
굴삭기가 길바닥을 쿵쿵 하고 내리찍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이 조금씩 패어 나오기 시작했다. 벌써 매서운 바람이 바다에서 다리 위로 불어오고 있었다. 굴삭기 기사는 깊은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다시 땅 바닥을 내리 찍었다. 그 때였다. 콘크리트 바닥이 조금 열렸다. 그 틈으로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갔다. 1933년 오사카 기차제작소에서 실려와 기계실 안에 봉인되었던 철 구조물 위로 다시 햇살이 드리워졌다. 2010년 11월 아침이었다. 77년 만에 햇볕을 받은 톱니바퀴 위로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굴삭기 기사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 연기는 열린 도로 틈 사이를 비집고 남항 바다 위 하늘로 날아올랐다. 연기가 사라진 하늘로 잠시 눈길을 돌렸던 기사는 다시 길 바닥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기계실 해체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영도다리 철거 공사의 마지막 공정이다. 영도다리의 가장 중요한 시설인 기계실은 2011년 2월27일부터 3월12일까지 시민에게 개방한 후 3월 말 완전히 철거 되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정신적으로 죽는다"고 했다. 김현처럼 말하면 영도다리도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물리적으로, 또 한 번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영도다리는 기계실의 철거로 영원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영도다리를 기억하고 있으면 영원히 우리 곁에 있다. 영도다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다리는 왜 그곳에 있었던가를 확인해야 한다. 존재의 이유와 탄생의 순간을 기억하자. 다시 영도다리다.
■영도 도선의 추억
부산시는 2011년 2월 말 영도다리 해체에 앞서 시민 공개 행사를 열었다. 이 다리는 내년 9월께 도개교로 재개장 된다. 국제신문 DB |
부산 영도 간 도선은 1876년부터 운항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도선은 적은 목선으로 동력은 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1900년에 발동기선으로 변경하였다. 1919년에 부산부가 이를 인수하여 부영(府營)으로 운영하기 시작한다.
도선은 수환(코토부키 마루, 壽丸), 상반환(토키와 마루, 常盤丸), 송도환(마츠시마 마루 松島丸), 목도환(마키노시마 마루, 牧島丸), 주갑환(스사키 마루, 洲岬丸) 등 총 5척으로 새벽 5시부터 밤 12시 까지 선원 32명이 운행하였다. 뱃삯은 5전. 하루에 왕복하는 선객은 1만 명. 1930년도 국세조사로 파악한 부산의 인구가 14만6124명이었다고 하니 단순히 계산하면 부산 인구의 4%가 이 도선을 이용한 셈이었다. 또 영도다리가 개통될 1934년 무렵 영도의 영선동에 인구 1만80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도선의 이용객수와 도선 운항시간이 하루 19시간이라는 점으로 보아 교통수단으로서 도선의 의존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영도주민은 도선보다는 편리한 교통수단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양한 아이디어
부산부는 영도와의 연락을 위하여 동경제국대학 공학부 교수인 세키 노부오(関信雄)를 초청하여 기술적인 검토를 한다. 부산부는 세키 박사에게 영도와 부산 간을 연결하는 교량의 구조 형식을 자문한 것이 아니라, 영도와 부산은 '트란스 초토아 부리이'라는 시설로 연결하기로 하고 그 구상의 타당성을 타진한 것이다.
세키 박사가 다녀간 6개월 후인 1927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토목과장인 신바(榛葉)는 "부산부에서 이미 도진교 안이 총독부에 올라와 있으며 그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영도와 부산 간의 연결 방법으로 두 가지를 검토하였음을 내비친다.
먼저 해안 매립 후 제방 안이다. 남빈 목도 약 200간의 거리를 양안으로부터 매립하여 제방을 쌓고 중간에 선박의 통행이 될 정도의 갑문을 설치하는 계획을 말한다. 이 안은 인력거의 왕래와 특히 전차로도 부설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선박의 자유로운 항해의 제한과 항내 해수면의 정체로 인하여 수질의 오염이라고 하는 결점이 있어 파기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대안으로 제안한 것이 도선(渡船) 가교(架橋)안이다. 이 교량의 형식은 가동교가 아니다. 육교가 아니라 영도와 부산에 각각 철주를 세우고 그것을 철제 보로 연결하고, 그 보 아래에 철선으로 연결한 전차(곤돌라)를 매달아, 이 전차에다 사람과 화물을 적재한 차량을 실어 운반하는 트랜스포터 브리지(Transporter Bridge)였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영도다리와 같이 도개교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영도다리의 설계자는 야마모토 우타로(山本卯太郞:1891~1934)다. 야마모토는 1914년 나고야 공고를 졸업한 후 그 다음 해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브리지 컴퍼니에서 가동교의 설계 제작에 종사하는 한편 일리노이 대학 등에서 강구조학을 배웠다. 그 후 1919년에 귀국하여 동경에서 야마모토 공무소를 설립하여 가동교를 전문으로 설계, 제작한다. 그는 가동교의 전문가로서 기존의 가동교에 비하여 동력을 4, 5배 절감할 수 있는 이른바 야마모토식 가동교라고 하는 것은 개발하여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
국제신문 조봉권 기자는 영도다리의 설계자로 최규용이란 인물을 발굴한다. 2001년 5월 31일자 기사에 따르면 최규용은 1903년생이고 1920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고공(高工) 토목과를 졸업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해보니 1936년에 해주항 확충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토목기사로 최규용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도다리 설계에 기초 조사 작업을 도와준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참여한 부분이 구체적으로 영도다리의 어떤 부분인지에 대해선 자료의 발굴 등 추후 연구가 기다려진다.
■떠들썩한 기공식
드디어 영도다리는 가설이 결정되었다. 공사는 오바야시 쿠미(大林組)에게 낙찰되었다. 공사 금액은 91만6000원. 1931년 12월 28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0일 기공한다.
기공식은 2부로 진행되었다. 1부는 오전 10시 30분 폭죽을 신호로 신관이 집전하는 신도식으로 거행되었다. 그리고 부윤의 식사와 총독, 도지사 축사, 내빈 인사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2부는 공사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석(基石)을 바다에 던져 넣는 기석 침전(沈奠) 행사다. 역시 폭죽을 신호로 식이 시작되었다. 가로 세로 45㎝, 높이 75㎝의 기석에는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가 쓴 '진호(鎭護)'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공사의 안전을 기원한다는 의미다. 기석의 제막은 경상남도 지사의 딸이 맡았다. 기중기가 기석을 들어 교각이 세워지는 깊은 바닷물 속에 던졌다. 영도다리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누가 공사했나
영도다리 건설에 관계한 회사는 두 군데다. 육교 부분은 오바야시 쿠미가 만들고, 도개부는 설계자인 야마모토 우타로가 사장으로 있는 야마모토 공무소가 맡았다. 영도다리의 중요한 부분인 도개부와 기계실은 일본의 오사카에 본사를 둔 오사카기차회사(大阪汽車会社)가 제작했다.
여담이지만, 야마모토 우타로는 영도다리의 완공을 보지 못한다. 다리가 완공된 것이 1934년 11월 23일인데 그 보다 약 7개월 전인 4월 20일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토목 건축 분야의 전문잡지(工事報)는 '일본의 가동교 공학의 권의자이며 유력한 업자이기도 한 오사카 야마모토 공무소의 주인 야마모토 우타로 씨는 시모노세키 방면에 출장 중 발병, 입원 가료 중이었는데 4월 20일 오전 11시경 결국 서거했다. (중략) 현재 조선 및 관서 방면에 많은 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면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슬픈 일이다'라고 그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의 현장이란 부산의 영도다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도개교의 제작이 힘들어 심로로 급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미식가에다 체중이 많아 나갔다는 것을 보면 그가 앓고 있던 것은 당뇨병과 고혈압이 아닌가 한다. 향년 48세였다.
■영도다리 탄생의 그날
준공식은 1934년 11월23일 오전 10시30분 폭죽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다리를 건너는 도교식(渡橋式)은 준공식이 끝나고 난 후 11시50분부터 거행됐다. 초도식(初渡式)은 신관이 앞장서고 그 뒤를 이어 소학교, 보통학교에서 선발된 우량한 아동 124명이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그 지역에서 최고령자가 완공된 다리를 가장 먼저 건너는 우리나라의 초도(初渡) 관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날 이 다리를 건넌 사람은 5만 명에 이르렀다. 이어 부산을 상징하게 될 그 다리 위에는 밤늦도록 제등 행렬이 이어졌다. 영도다리가 탄생한 날은 저물 줄 몰랐다.
■다시 들려라 영도!
강영조 동아대 조경학과 교수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영도구,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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