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화장실 바닥에서 물에 젖어 찢어진 신문을 보고 어느 놈이 무슨 대단한 뉴스라도 본 양했다는 얘기다.
“사담 후세인이 한강 고수부지에서 알몸으로 숨진 채 발견됐대.”
신문 국제면과 사회면을 합쳐서 보면 후세인이 한강까지 오는 게 가능할 것이다.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찢어진 신문 봤느냐”고 면박을 줄 때 써먹는 얘기다.
그것을 국정원은, 김정일 “북방한계선과 우리 군사경계선 안에 있는 수역을 평화구역으로 선포한다”, 노무현 “예, 아주 저도 관심이 많은…”이라고 한 줄로 줄였다. A4용지 8장 분량의 발췌본이다. 말이 좋아 발췌본이지, 후세인 한강 출현과 다를 바 없다. 찢어진 회의록이다.
여당의 ‘NLL(북방한계선) 장사’가 9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서해 북방한계선 포기 발언을 했다며 대선판에 벌여놓은 장사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면전에서 “그 입 닥치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제대로 된 대통령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사이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고, 여름 장마도 지났다. 보통 좌판 장사는 한 철이라는데 이런 대박이 없다.
공로를 꼽자면 국정원이 1등 공신이다. 원세훈의 국정원은 지난 선거에서 “종북 좌파들이 정권을 잡으려는데 확실히 대응 안 하면 국정원이 없어진다”고 대놓고 선거 개입을 지시하고 심리전단을 확대했다. 심리전단 요원들은 넥타이 매고 출근해 하루 종일 ‘문죄인, 참 재수없게 생겼다’는 글 따위를 인터넷에 올리고 국민 세금으로 준 월급을 받아갔다. 그런 원세훈도 후임 남재준에 비하면 이불 속에서 주먹 쥔 격이다. 댓글사건 수사결과가 발표되고 국정원에 화살이 쏟아지자 남재준은 금고 깊숙이 있어야 할 정상회담 회의록을 들고 나와 “이봐라, 이봐라”며 동네방네 뿌렸다.
정상회담 회의록은 국가 기밀 중에서도 최고 기밀이다. 외교적으로도 ‘신의와 비밀’은 철칙이다. 그 회의록을 원세훈은 1급 비밀에서 2급 비밀로 강등시켰고, 남재준은 그마저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세상에 공개했다. “우리가 집권하면 까고…”라는 여권의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비상계획)’ 그대로다.
‘NLL 불’이 꺼질 만하면 국정원은 기름을 끼얹었다. 댓글 국조가 가동될 때도, 국회가 회의록 열람으로 가닥을 잡아갈 때도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 “국가 안보를 위해” 회의록을 공개하고, 제 맘대로 해석했다. 국정원 눈엔 자기네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주고받은 은밀한 대화가 장롱 서랍에 넣어둔 ‘이명래 고약’이나 ‘호랑이 기름’으로밖에 안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기가 곪아 터질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꺼내 흔들겠는가.
본질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국정원을 바로잡는 것이다. 국정원을 이대로 두고서는 반듯한 나라로 갈 수 없다. 민주주의 근본에 관한 문제다. 지금 대학가의 시국선언과 거리의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국정원에 계속 업혀 갈지, 뛰어내릴지를 묻고 있다.
솥단지 안에 있으면 솥 사정을 모른다. 물방울이 강물의 흐름을 못보는 것처럼. 때로는 외부의 눈이 더 무섭고 정확하다.
“한국의 국정원이 정치적 앞잡이(political provocateur)가 돼 보수파의 목적을 위해 활동하고 당파적 분열을 키우는 데 권력을 이용하고 있다.”(워싱턴포스트 7월6일)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르몽드도 비슷한 기사를 실었다. 이것이 세계가 대한민국 정보기관을 보는 눈이다.
며칠 전 박 대통령은 “말이 거칠어질 때 사회는 단결도 안되고 신뢰도 떨어진다”고 했다. “외국 사람들이 뭐라 생각할까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했다. 거친 말만 부끄러운 게 아니다.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더 부끄럽다.
‘NLL 장사’로 재미는 볼 만큼 봤다. 여권도 그 효능에 놀랐을 것이다. 시커멓게 먹칠했을지는 모르지만 민심까지 덮을 수는 없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국민이 먼저 국가의 일을 걱정하는 판이다.
부저유어(釜底游魚).
솥 안에서 노는 물고기는 모른다. 잠시 후 물이 끓어 삶아질 자신의 운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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