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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J Report] 고? 스톱? … 엔저의 고민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16.

 

[중앙일보]
입력 2013.01.16 00:30 / 수정 2013.01.16 00:30

어제 88.8엔 … “1달러당 90엔대서 멈춰야.”
“아니, 110엔대까지 내려가야 먹고산다”


15일 일본 도쿄의 외환시장. 개장 초 달러당 89.52엔까지 떨어졌던 엔화 값이 오전 11시30분 갑자기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88.62엔. 엔화는 불과 30분 만에 엔고로 돌아섰다. 도화선은 일본 정부 내 한 각료의 발언이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측근으로 경제재정 정책을 총괄하는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장관이 같은 시간 기자회견에서 “과도한 엔저는 수입물가에 불똥이 튀어 국민 생활에 마이너스가 된다”고 발언한 내용이 전해졌다.

 하지만 오후 들어 다시 엔을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세력이 강력하게 등장하며 엔저로 뒤집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나섰다. “지금은 지나친 엔저가 시정돼 가고 있는 단계다.” 이 발언은 “이미 어느 정도 엔고가 시정됐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다시금 88엔대 후반으로 밀렸다.

 

 

 15일 도쿄 외환시장이 보여주듯 엔저의 물살은 빠르고 급하다. 과연 어느 선에서 엔저가 멈추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달러당 엔화는 조기 총선 확정으로 아베의 총리 취임이 사실상 굳어진 지난해 11월 14일 당시 79.45엔이었다. 이때부터 엔저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15일에는 88.8엔. 두 달 사이 12%나 엔화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엔화 값 적정선은 과연 어디로 봐야 할까. 최근 활발히 거론되는 것은 ‘90엔 한계설’이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지난 11일 개최한 경기토론회에서 일본상공회의소의 오카무라 다다시(岡村正) 회장(도시바 상담역)은 “(달러당) 90엔을 넘어서는 엔저는 (일본의 수입) 재료가격이 올라가 힘들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출기업을 옭아매던 역사적 엔고가 시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수입물가가 상승하는 엔저도 곤란하다”며 적정 환율로 달러당 85~90엔을 제시했다.

 불과 2년 전인 2010년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일본 기업 최고경영자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을 때만 해도 응답자의 60%가량은 “100~110엔이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신문은 “달러당 90엔은 예전만 해도 상당한 ‘엔고’로 여겼다”며 “기업들의 적정 환율 인식이 2년 만에 20엔가량 움직인 셈”이라고 해석했다.

 ‘90엔 한계설’의 주된 근거는 일본 무역구조의 변화다.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발전소가 사실상 전부 멈춘 상태다. 대신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원유 선물가격이 배럴당 90달러를 웃도는 상황에서 엔저가 더 계속되면 기업들의 연료 비용은 치명적이다. 게다가 달러로 결제하는 거래가 수입은 74%지만 수출은 49%에 불과하다. 예전에 달러 결제에 의존하던 수출이 2000년께부터 엔화 결제로 대체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즉 엔저로 인해 수출이 얻는 혜택은 예전만큼 크지 않은 반면 수입이 입는 타격은 더욱 커진 구조라는 얘기다.

 일본종합연구소의 후지이 히데히코(藤井英彦) 이사는 “일본 경제는 이전보다 엔저에 취약해졌다”며 “달러당 90엔 수준이 1년간 계속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0.6%의 소득이 해외로 유출돼 경기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일본 기업 중에는 “아직 멀었다”는 주장을 펴는 곳도 상당수다. 카를로스 곤 닛산자동차 사장은 “100엔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소리는 특히 자동차 같은 소비재를 취급하는 기업에서 많이 나온다. 가격경쟁력에 의해 판매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소니·파나소닉 등 세계시장에서 한국에 밀리고 있는 가전업체들도 “90엔 갖고는 어림없다”며 아우성이다.

 상당수 이코노미스트들도 “엔저는 단순히 기업 실적을 호전시키는 것뿐 아니라 주가와 연동돼 일본 경제의 고질병인 디플레를 개선하는 데도 목적이 있다”고 거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기업마다 해외 생산 비중 등이 다르고 처해 있는 상황이 달라 적정한 엔화 값 수준을 잘라 말하긴 힘들다”며 “다만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는 90엔대, 즉 99엔까지의 엔저는 일본 기업의 체력을 크게 손상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 지배적”이라고 진단했다. 아마리 경제재정담당 장관이 “(엔저가) 꽤 좋은 곳까지 와 있지만 이를 방치해 세 자리 숫자(100엔대)를 넘어서게 되면 곤란하다”고 말한 것도 일 정부가 적정 환율 수준을 ‘달러당 90~99엔’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엔저 수준’보다 ‘엔화 안정’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미즈호종합연구소 하세가와 가쓰유키(長谷川克之) 시장조사부장은 “급격하게 엔화 값이 변동하면 기업들이 사업계획을 바꿔야 하는 등 비용이 추가로 소요된다”며 “엔저 수준을 90엔대로 안착시킨 뒤 그 수준을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내의 이 같은 엔저 논란에 대해 서방 언론들은 다소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엔저의 지속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12일자 칼럼에서 “과거 20년 동안 일본에 실망을 거듭해 왔다”며 “옛날과 달리 일본이 세계시장에 팔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엔저가 특효약이 될 수 없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