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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형법형소법

부부 강간, 대법원의 판단은 바뀔까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4. 24.
법원공무원으로, 2005년부터 인터넷신문과 블로그 등에 법조 관련 글을 써오고 있다. 언론에서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판결에 대한 분석, 판사 인터뷰, 사법 개혁과 관련된 글을 주로 발표했다. 어렵고 딱딱한 법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글쓰기 능력으로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2010년 1월 <생활법률상식사전>(위즈덤하우스), 2011년 5월 <생활법률해법사전> 을 펴냈다. [페이스북, 트위터, 전자우편(야후)은 jundorapa]
김용국님

대법원이 지난 4월 18일 이른바 ‘부부강간’ 사건에 대해 공개변론을 실시했다. 이 사건은 아내가 밤늦게 귀가하는 것에 불만을 품던 남편이 부엌칼로 위협하여 아내를 간음하고, 이틀 뒤 다시 아내의 옷을 찢고 칼로 위협한 후 성폭행한 사건이다. 남편은 1심과 2심에서 징역형과 전자장치 부착명령을 받고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를 인정할지 대법원의 판단이 주목된다. 우선 그동안의 대법원과 하급심의 판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먼저 1970년 사건을 소개한다. 30대 중반의 남자가 법정에 서 있다. 죄명은 강간.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아내를 겁탈한 죄다. 그는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다가 아내에게 발각됐다. 아내는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한 후 이혼소송을 제기한 상황. 다급해진 남편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그 와중에 아내를 폭력으로 제압해 간음한 사건이었다. 1심과 2심에서 이미 유죄로 판가름 났기에 대법원 판결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판결을 뒤집는다. ‘(두 사람이 부부인데도 남남인 것처럼) 피고인에게 정교 청구권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강간으로 처벌한 것은 그릇된 판단이거나 강간의 법리를 오해한 것’(1970. 3. 10. 선고70도29판결)이라며 사건을 2심으로 돌려보낸다.

 

1970년만 해도 대법원은 결혼을 ‘정교(情交) 승낙’이나 ‘정교권 포기 의사표시’와 유사어로 봤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297조 강간죄 조항이다. 형법을 포함해 법전 어디에도 부부 사이 강간죄 성립을 부정하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부부간의 성폭행을 애써 외면해왔다. 대법원도 위 판결에서 협박이나 폭행을 통해 강제로 간음이 이루어졌는지는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부부관계가 깨졌다면 몰라도 유지되고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는 논리, 마치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 사이에는 강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에도 법원은 실질적인 부부 사이에는 강간죄 적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폭행 ․ 협박 등에 대해서만 우회적으로 처벌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법조계 주류의 시각도 부부 강간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004년, 부부간 성폭행을 단죄한 판결이 등장한다. 서울중앙지법은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성적 학대하고 폭행한 남편에 대해 강제추행죄를 적용, 처벌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하지만 적용 법조항이 강간이 아니라 강제추행이었고 남편이 항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1심에서 사건이 끝나버렸다.

 

5년 후인 2009년, 드디어 부부강간을 인정하는 최초의 판결이 나온다. 부산지법(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은 기존의 부부강간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사건은 이렇다. 부산에 사는 A씨(남, 40대)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20살 연하의 외국인 아내 B씨와 결혼했다. B씨는 생활비를 주지 않는데다 폭행을 일삼는 남편 A씨를 피해 결혼 넉 달 만에 가출해 공장을 전전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B씨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A씨는 성관계를 거부하는 B씨를 흉기로 위협하면서 간음했다. A씨는 특수강간 혐의로 기소됐는데 범죄 사실은 모두 인정했고 법률적인 판단만 남아있었다. 재판부는 장문의 판결을 통해 결론에 접근한다.

 

이 판결에서 재판부는 부부간 성적 교섭 의무는 당연히 인정된다고 봤다. 하지만 “(결혼을 했다고 해서) 처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거나 권리가 상실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는 결혼으로 일단 유보한 것일 뿐 매번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강간죄에서 처를 제외할 아무런 근거가 없고 현행법으로도 그렇다. 강간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은 처에게도 당연히 있다. 따라서 이미 깨진 부부뿐 아니라 정상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이 인정되어야 한다. 강간의 수단인 폭행과 협박도 일반 강간과 같은 수준이면 족하다. 가정폭력을 처벌하면서 훨씬 죄질이 중한 강간을 방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며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헌법과 정의 관념에도 어긋난다.”

 

재판부는 부부강간이 처에 의해 남용될 가능성이나 입증곤란의 문제에 대해서는 수사나 재판 등 사법절차에서 해결할 문제이지 부부강간을 부정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한 “부부강간은 면책된다는 과거의 그릇된 생각은 문명시대에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구시대의 관념”이라며 그동안의 판례를 에둘러 비판했다.

 

이런 논리로 부부강간을 최초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부산지법의 판결은 그 자체로 큰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1심 판결이라는 약점 또한 있었다. 하급심은 대법원 판결에 얽매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려면 대법원의 판결이 필요했다. A씨는 항소를 제기했으나 안타깝게도 얼마 뒤 사망해 항소심 사건은 공소기각으로 종결됐다. 대법원의 입장을 확인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09년 2월 대법원은 또 다른 부부강간 사건을 선고한다.

 

A씨(남)와 B씨는 부부로 살다가 A씨가 장기간 성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바람에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A씨의 간곡한 요구로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고 재결합했으나 다시 두 달 만에 별거 상태에 들어간 후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법원에 협의이혼 서류를 접수한 후 A씨는 B씨를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루만 함께 보내자고 부탁했다. B씨가 차마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어서 부탁을 들어준 게 화근이었다. 그날 밤 다른 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단 둘이 남게 되자 A씨는 갑자기 야수로 돌변했다. 그는 B씨가 성관계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고 칼로 위협해 반항하지 못하게 굴복시킨 다음 성폭행하고 이 장면을 카메라로 찍기까지 했다.

 

A씨는 2008년 1심(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성폭력처벌법위반(특수강간, 카메라 등 이용촬영)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도 같았다. A씨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2009년 2월 선고. 결론도 결론이지만 부부강간을 바라보는 대법원의 판시가 주목을 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판결은 쟁점을 비껴갔다.

 

혼인 관계가 존속하는 상태에서 남편이 처의 의사에 반해 폭행 또는 협박으로 성교행위를 한 경우 강간죄가 성립하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적어도 당사자 사이에 혼인 관계가 파탄됐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지속할 의사가 없고 이혼의사의 합치가 있어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인정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법률상의 배우자인 처도 강간죄의 객체가 된다. (대법원 2009. 2. 12. 선고 2008도 8601 판결 참조)

 

제일 뒤 단락, ‘배우자인 처도 강간죄의 객체가 된다’는 부분만 보면 마치 부부 강간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장을 전체적으로 뜯어보면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 실제로 부부관계로 볼 수 없는 특수한 상태에서만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사실상 70년 대법원 판결(70도29호)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깨져버린 부부 말고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이 성립하는지 대법원의 판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약 40년 전인 1970년 판례(사건번호 70도29)를 따른다면서 부부 강간에 대한 판단을 다음 기회로 미룬 것이다. 더구나 선고 한 달 전에 부산지법에서 대법원의 판단과 다른 판결이 나온 상태라 아쉬움은 더 컸다.

 

그 후로도 부부강간은 드물게나마 법의 심판대에 섰다. 특이한 점은 대법원의 ‘애매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급심 판결에서는 부부강간을 인정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별거나 이혼이 전제되지 않은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지법은 2010년 7월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폭행하고 옷을 찢은 뒤 성폭행한 남편 C씨에게 강간상해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판결에서 “혼인한 부부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응할 의무는 있지만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부부간의 성이 내밀한 사생활 영역이더라도, 명백한 강간행위를 국가가 더 이상 방관하지 아니하고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결코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도 2010년 12월 C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국가의 개입에 앞서 부부가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서도 D씨의 행위가 강간치상죄에 해당한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서울고법은 “부부 사이에 폭행을 당하면서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요구받는 경우 국가가 인권에 속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밝혔다. 이 사건도 대법원까지 올라가지 않고 2심에서 확정됐다.

 

2010년 10월에도 아내를 성폭행한 남편에게 징역 6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됐다. 이 사건은 평소에도 아내를 상습 폭행하던 남편이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가 강간이 아닌 강제추행의 방법으로 심각한 성적 학대를 한 사실이 법원에서 인정된 사건이다. 대구지법 김천지원은 “가학적, 변태적 행위로 아내에게 극도의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며 중형 선고 배경을 밝혔다.

이렇게 하급심에서는 부부강간이나 성폭행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는 추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법원의 입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

 

부부 강간을 인정했을 때 생길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첫째, 가정이 깨지지 않을까, 둘째, 악용되지는 않을까, 셋째, 어떻게 입증하나, 넷째, 법이 가정으로 함부로 들어와도 될까.

 

여기에 대해선 이렇게 답변할 수 있겠다. 첫째, 부부간 (성)폭행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가정은 이미 깨진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 악용을 걱정할 정도면 이미 정상적인 부부 사이가 아니다. 셋째, 범죄의 입증은 수사기관과 법원이 걱정할 문제다. 입증이 어려운 것이 처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넷째, 부부간 폭행도 형벌이 개입하는데 그보다 훨씬 무거운 성폭행을 국가가 처벌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부부간 성폭행은 대부분 심각한 물리적 폭력 뒤에 나타난다.

 

그동안 우리가 가정의 상습 폭력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부부간 성폭행에는 관대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논리로 정당화하더라도 결혼이 아내의 성을 강제로 소유하는 권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대법원이 결론을 내려줘야 한다. ‘부부간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인정된다. 따라서 부부간 협박이나 폭행으로 간음하면 강간이 성립한다’는 선언을 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