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제

[한겨레 프리즘] 차베스의 막말이 그립다 / 이유주현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7. 8.

등록 : 2013.07.07 19:17 수정 : 2013.07.07 19:17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암 수술을 받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지난 3월, 미리 그의 부고 기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차베스가 없으면 이제 지구를 누가 지키나?”

 

당시엔 한바탕 웃고 넘겼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문득 ‘차베스 있는 지구’라면 어떠했을까 공상에 잠기게 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 정부가 국내외에서 무차별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벌인 사실을 폭로한 지 벌써 한달이 다 돼 간다. 하지만 미 정부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별로 없다. 한때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와 희망의 상징이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또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유럽연합 사무실을 도청한 데 대해 “유럽 국가 수도에서도 내가 아침에 무엇을 먹는지 파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며 ‘다른 나라도 다 하지 않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더욱 기막힌 일은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 격인 몇몇 유럽 나라들이 대놓고 ‘미국의 마름’ 노릇을 한 것이다. 러시아에 국제회의 하러 갔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노든이 망명 요청을 하면 고려해 보겠다”고 말하자마자,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는 모랄레스의 전용기가 자기네 나라 영공을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모랄레스가 러시아 공항의 환승 구역에 머물고 있는 스노든을 태워줬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랄레스는 급유 때문에 오스트리아 빈 공항에 비상착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도 수색을 당하고 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분개한 볼리비아 정부는 “미 정보기관들은 스노든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우리나라 대통령을 망신 주기 위한 음모”라고 비난했다. 아닌 게 아니라, 볼리비아 역사상 첫 원주민 출신인 좌파 대통령 모랄레스가 공항 대기실에서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딱해 보였다. 볼리비아 정부는 체면 때문인지 “모랄레스가 수색을 거부했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스노든이 비행기에 타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고 밝혔다. 모랄레스는 이후 귀국해 미국 대사관을 폐쇄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고, 남미 정상들이 4일 볼리비아에 모여 스페인 등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정서적 차원에서의 외교적 분풀이에 가깝다. 이틀 뒤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가 스노든을 받아줄 뜻을 밝히고 나섰으나, 러시아의 적극적 협조 없인 여권이 말소된 그를 데려가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차베스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스노든에게 가장 먼저 난민증명서를 쥐여주고, 여의치 않으면 러시아 공항으로 관용기를 보내 실어오지 않았을까? 복잡한 국내외 정세 때문에 대놓고 미국에 맞짱 뜨는 일이 어렵다면, 적어도 ‘말’로라도 미국에 강펀치를 날렸을 것이다. 그는 2006년 유엔총회 연설 때 전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다녀간 것을 거론하며 “어제 악마가 다녀갔다. 아직도 유황 냄새가 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오바마도 봐주지 않았다. 암 선고를 받은 직후인 2011년 말, 오바마가 언론 인터뷰에서 베네수엘라의 인권과 민주주의 침해 문제를 거론하자, 컨디션이 안 좋은 와중에도 기세 좋게 덤볐다. “베네수엘라를 공격하는 걸로 내년 선거에서 이기려고 하나 본데 그렇게 무책임한 말 하지 마라. 오바마, 당신은 어릿광대다. 자신이 국민들에게 약속한 거나 지켜라!”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지구인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광범위하게 침해해 놓고도 이를 두둔하는 오바마의 궤변을 지켜보며 차베스는 뭐라 했을까. 최소한 이 정도는 퍼붓지 않았을까. “미스터 오바마, 당신은 말만 번드레한 어 릿광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전임자인 악마와 다르지 않구려. 당신에게서도 지옥의 유황 냄새가 나오.”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