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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특파원 칼럼] 장제스의 復權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2. 18.
  • 최유식 베이징 특파원[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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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02.17 22:57

     

     

     

     

    중국 권력층의 집단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베이징 도심에 '쩌위안지우자(澤園酒家)'라는 식당이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경호원과 요리사들이 만든 곳으로 그가 좋아한 후난(湖南) 요리가 전문이다. 식당 벽에는 마오의 기록 사진들이 걸려 있는데, 그중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찍은 것도 있다. 일본 패망 직후인 1945년 8월에 열린 충칭(重慶) 회담 당시 사진이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장제스는 중국 대륙에서 '마왕(魔王)' 같은 존재였다. 그를 몰아내고 집권한 공산당은 장제스를 무자비한 독재자이자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몰아붙였다. 중·고교 교과서에 '장페이(蔣匪·장제스 토비집단)'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최근 4~5년 사이 중국 대륙에서는 장제스를 객관적으로 연구·조명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한 중국 학자는 "장제스가 없었다면 마오쩌둥도 없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미국 외교관 제이 테일러가 쓴 '장제스와 중국 현대(The Generalissimo)'가 지난해 8월 번역 출간된 것은 획을 긋는 일이었다. 테일러는 미국 정부가 보유한 장제스 일기를 바탕으로 그를 '많은 한계를 지녔지만, 대일(對日) 항전을 주도하며 중국 역사를 현대로 이끌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인물'로 그렸다. 이 책에는 공산당에 뼈아픈 대목도 적잖다. 이를테면 중국공산당은 항일(抗日)을 위한 국공(國共)합작을 외쳤지만 정작 합작이 성사된 뒤에는 항일보다 자기 세력 불리기에 몰두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1940년 1월 스탈린에 보고한 비밀 전문에서 '100만명 이상의 중국군이 전사했지만, 이중 공산당 군대는 3만여명에 불과하다'고 썼다. 마오쩌둥은 장제스로부터 적잖은 항전 비용을 지원받고도 1937년 허베이(河北)로 출전하는 공산군 장교들에게 "천천히 이동해 일본군과 심하게 충돌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충칭회담 당시에는 장제스가 베푼 연회에서 마오타이주가 담긴 잔을 높이 들고 "장제스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도 나온다.

    테일러는 중국 공산당이 일부 친중(親中)파 미국 언론인들이 그린 것처럼 이상주의 집단이 아니었음을 냉정하게 서술하고 있다. 미·소의 비밀문서와 전문 연구서를 판단 근거로 삼았다. 그런데도 중국 당국은 이 책의 출판을 허용했다. 중국 최대 온라인 서점인 당당왕(當當網)에서는 5300여명에 이르는 평가자 중 99.6%가 이 책을 다른 독자에게 추천했다.

    다른 분야도 비슷하다. 옛 소련 비밀문서를 연구하는 상하이 화동사범대 선즈화(沈志華) 교수는 수년 전부터 6·25전쟁이 중·소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도발이었음을 논증하는 많은 저술을 펴냈다. 이달 초에는 중국 입장에서는 적장(敵將)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6·25 회고록이 중국에서 출간됐다.

    개혁·개방의 세례를 받은 중국 사회는 이념을 떠나 현대사를 사실(史實)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해가고 있다. 그보다 앞서 있다는 우리 사회가 여태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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