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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베의 사상[한겨레 hook]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3. 23.
철학, 경제학, 정치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입니다.
BY : 박가분 | 2013.03.21 | 덧글수(1) | 트랙백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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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베스트 화면 출처 : 한겨레

 

1. 일베의 사상

 

최근 일간베스트(일명 일베)라는 우익 인터넷 커뮤니티가 그 과격성과 폭력성 그리고 저속성 때문에 지탄과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도덕적인 비난에 맞서 오히려 일베를 최대한 중립적인 태도로 ‘이해’하고 싶다. 비판을 하더라도 그 현상을 먼저 이해하고 싶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일 이러한 일베에도 어떤 ‘사상’ 내지는 ‘사상성’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라는 다소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는 이것을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비평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일베에서 어떤 사상을 본다는 것은 그와 같은 어떤 사회적 일탈과 역기능을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으로 ‘총체성’이라는 이 헤겔적 이념 자체에 가한 마르크스 자신의 뒤틀림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점은 그 사회 내의 국지적인 실패와 파국 속에서만 주어진다. 일베는 한국사회의 시민인륜의 비극적 실패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실패 속에서 우리는 남한 사회의 인륜적 체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태도로 일베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 전에 인터넷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SNS의 등장은 인터넷의 풍경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SNS의 등장 이후 오늘날 대형 포털 사이트의 위상은 예전만하지 않으며 이용자들 사이의 연결성은 이전보다 더 증대했다. 이를 통해 뉴스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로가 더욱 다변화되었고 인터넷의 공론장의 외연 자체도 보다 넓어지고 다변화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인터넷 환경의 변화는 정치의 풍경 자체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지난날 촛불시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SNS는 다양한 정치적 쟁점들을 더욱 폭 넓게 공론화시켰다. 거꾸로 말해서 촛불시위와 같은 정치적 이벤트 역시 인터넷 환경을 바꾸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두드러진 하나의 현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터넷이 주된 정치적 공론장으로 부상(그러나 이하에서 ‘인터넷 공론장’이라는 것이 ‘공론장’ 그 자체로서는 얼마나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지 보여질 것이다)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정치의 풍경과 인터넷의 풍경은 어느 정도 겹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정치 양자의 풍경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일간 베스트(일베)의 등장이다. 일베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여러 짤방과 정보를 공유하는 여느 인터넷 게시판들과 다를 바 없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보수적인 유저들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러나 일베가 단순한 보수 커뮤니티와 변별되는 것은 그것이 한국사회의 공론장의 통념과 금기에 반하는 언설들을 거침없이 늘어놓는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아무리 마음이 불편해도 광주 민주화 항쟁은 보수파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한국사회의 성역이다. 그러나 일베 유저들은 그 동안의 남한의 민주화 운동이 주류사회 안에 제도화하고 상식으로 정립한 것들을 거침없이 조롱과 희화화의 소재로 삼는다. 단적인 예로 통상적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게시물에 대해 ‘비추천’하는 기능을 ‘민주화’로 표현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그곳에서는 게시판이 테러당하거나 특정 게시물로 도배당하는 것을 ‘민주화 당했다’고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일베는 특정 지역과 여성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컨텐츠들의 진앙지이기도 하다. 지역 전체가 싸잡아 희화화되기도 하고, 한국여성 전체가 조롱과 비하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혹은 래디컬한 ‘가치전도’는 이전의 주류 보수담론에는 희귀한 것이었다. 가령 지금까지 남한의 담론공간이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치가 길항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분절되었다면 일베의 등장 이후 하나의 가치가 다른 하나를 상호적으로 부정하고 배제하는 일이 일상적인 ‘풍경’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베의 등장은 이중의 의미에서 반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정치적 담론의 측면에서의 퇴행일뿐만 아니라 PC통신 -> 인터넷 게시판 -> 블로그 -> SNS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일탈하기 때문이다. 즉 진보적 의제의 대중화와 그에 접목된 컨텐츠의 생산에 있어서 SNS가 첨단을 달리고 있을 때 다시 인터넷 게시판이 이에 대항한 새로운 유행과 트렌드의 진앙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자는 매체의 특성이 이러한 정치적 차이를 낳는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더 수평적이고 연결적인 SNS에 비해 일간베스트와 같은 사이트는 보다 폐쇄된 커뮤니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관용과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을 2002년과 2008년에 그대로 대입해본다면 무리가 따른다. 즉 SNS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에도 이미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진보적 의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고, 대중적 저항의 진앙지가 되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베와 같은 과격하고 급진적인 보수파들의 등장을 후-SNS적 맥락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 확실히 일베와 같은 부류는 SNS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다른 곳에서 일베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노출시키는 것을 인터넷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밍아웃’이라고 불리며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일베는 인터넷 세계에서 (더 나아가 SNS의 세계에서조차) 확실히 하나의 코드 내지는 정체성으로 자리잡으며 인지 및 재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일베다운’ 행동을 패러디하거나 브리콜라주하는 방식으로 역으로 그것이 인지=인정recognize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베인’으로서의 그러한 정체성은 일상에서의 정체성과 다르다. 가령 인터넷에서 정부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일삼는 촛불시민이 일상에서는 보수적인 상식을 수용하며 견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일베인 역시 인터넷 커뮤니티의 장에서 벗어나면 전혀 다른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의 다른 커뮤니티에서 일베인이 합리적 보수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자가 모순이 아니라면 후자 역시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일베가 세인들에게 선사하는 진정한 ‘공포’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필자가 자주 다니는 모 커뮤니티의 관용어를 빌리자면 “일베충(일베인을 비하하는 표현)은 당신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간첩은 당신의 일상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반공주의의 표어를 방불케 하는 이와 같은 언설은 낯선unheimlich 것과 친숙한heimlich 것의 근접성 내지는 근친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일베충은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실제로 ‘오오미 ‘전라디언’ ‘슨상님’ ‘-랑께’ ‘-하盧’ 등은 인터넷의 일상적인 관용어가 된지 오래이다. 필자 역시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그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일베가 지향하는 정치적 가치관과 세계관만을 주목하는 것은 오도적이다. 최근 JTBC와 SBS에서 일베를 특집으로 다루면서도 왜 일베가 하나의 사회적 신드롬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고 있다. 어떤 대상이 사회적 신드롬이 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재현하고 재인지할 수 있는 (나아가 패러디할 수 있는) 형식 내지는 코드가 공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베가 하나의 인터넷 코드로 정착되고 수용된 것은 그것이 노정하는 정치적 당파성 내지는 지향 역시도 그 내용을 초월하여 형식화되고 코드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이미 일베인들이 자기 자신을 재현하고 재인지하는 방식에 반성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일베인들이 느끼는 ‘일부심’(일베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이를테면 ‘씹선비질’(인터넷 은어로서 어떤 당위나 가치를 강변하는 일)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것을 가볍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자신들의 유머감각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일베 코드는 바로 이러한 ‘가치전도’에 기반해 있다. 이런 점에서 일베가 지향하는 정치적 가치관은 이미 그들 자신에게도 더 이상 진지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일베가 그 유저들에게 주는 정신적 쾌감은 2000년대 초반 성소수자와 반미담론에 대한 논의에 열려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런 2000년대적 분위기를 계승하는 게시판으로 ‘호모 사케르’가 대표적이다)이 그 유저들에게 주었던 해방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정착된 자유민주주의적 상식과 제도 그리고 공론장 그 자체에 대한 비웃음과 가치전도에 기반해 있다. 그런 점에서 일베의 등장을 파시즘의 전조로 생각하는 사회비평가들도 있다. 하지만 일베의 등장을 파시즘과 연관시키기 이전에, 일베가 기반한 이러한 ‘가치전도’ 혹은 악의적인 ‘유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파시즘 그 자체도 제도화되고 정착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규범들에 대한 전반적인 ‘가치전도’ 혹은 ‘악의적 유머’로서 등장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나치 돌격대의 이념은 ‘왜 유대인들을 때리는가?’라고 질문하는 바이마르 체제에 대해 ‘왜 우리가 유대인을 때려서는 안 된단 말인가?’라는 비아냥조로 반문하는 태도의 확산에서 출발했다. 만일 일베에 어떤 사상 내지는 ‘이념’이 있다면 바로 잔혹한 유머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데 있다. ‘왜 진보적 정치인들을, 전라도인들을, 여성들을, 싸잡아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여기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성립시키는 공론장 혹은 대화의 장 자체에 대한 신뢰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일베를 유심히 관찰한 인터넷 유저라면 다음과 같은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일베를 관통하는 코드는 다음과 같다. 검색의 일상화와 정보의 데이터베이스화를 통해 진보적 논객이나 인사의 모순된 발언들을 찾아내서 ‘저격‘하는 방식. 어떤 사건이나 논점과 연관된 (듣도보도 못한) 사소한 반례나 반론들을 끊임없이 열거하며 ‘정보의 소음‘을 초래하는 방식.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베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사실은 음모에 의해 조장된 폭동이었다는 식의 흠집내기 주장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각지도 못한 ‘언어유희‘와 ‘신조어’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민주화 이후의 자유민주적 규범과 가치가 지닌 권위를 희화화하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격’, ‘정보소음’, ‘언어유희’라는 인터넷 코드는 일베만의 특성이 아니라 진보좌파적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일베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것의 등장이나 출현이 아니다. 그 가치관이나 이념은 다르지만 동일한 인터넷 환경과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감수성의 정치적 발현이다. 단지 인터넷상에서 보수우파 진영에서 부재했던 것을 나중에 일베가 채워넣은 것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일베의 등장으로서 오히려 이제 인터넷의 좌우의 균형이 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도 되지는 못하지만.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일베가 사실은 2008년 촛불시위의 쌍생아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 2008년 촛불시위는 바로 정당정치와 그것이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및 그 공론장 전반에 대한 ‘불신’을 대대적으로 표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는가? 거기서 부정된 것은 특정 정책, 특정 정당, 특정 정치인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불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스템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2008년 촛불시위와 그 이전의 촛불시위의 간극이 놓여있다. 이를테면 탄핵국면 당시의 촛불시위는 여전히 자유민주적 선거의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일정한 사상적 옹호에 기반해 있었다면, 미국산 쇠고기 시위에는 그러한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사상적 옹호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한 점은 이미 수 많은 저널리즘적,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그 불신의 대상이 되었던 ‘시스템 전체’라는 것을 보다 근본적으로 포착하지 못한다면 단지 촛불시위를 관념적으로 미화하는 급진적 언설로만 그치고 말 것이다.

 

촛불시위는 단지 ‘의회’와 ‘정당 정치’인에 대한 불신으로만 정리될 수 없다. 촛불시위가 공격했던 것은 단순히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의회든 정당이든 민주주의든 그 모든 것들이 기반한 ‘자유민주적 공론장’에 대한 이념이다. 촛불시위는 그러한 이념이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 식생활과 같이 일상에 밀접한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대중들이 극적으로 인식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진보좌파 진영은 촛불시위를 계기로 다시 민주적 공론장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둥 어떻다는 둥 말하기에 바빴지만 그들 모두 거기서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 그 공론장 자체가 촛불시위에서 의심 당하고 공격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이다. 촛불시위 때 확산되었던 각종 터무니 없는 괴담, 음모론들은 (이것과 일베 코드의 유사성은 이하에 서술될 것이다) 바로 자유민주적 공론의 숙의와 토론에 의한 의사결정 및 검증과정 그 자체에 대한 불신과 비웃음이라는 ‘코드’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종북좌익의 ‘선동’으로 이해한 보수언론이나 그것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의 표현으로 이해한 진보언론이나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촛불시위 때 열린, 그리고 진보파들이 상찬했던 ‘인터넷 공론장’은 사실은 ‘공론장’ 그 자체에 반하는 아이러니한 공론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베는 그 점은 오히려 분명하게 가시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2.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

 

여기서 <일반의지 2.0>을 집필하며 인터넷 환경 속에서 오늘날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은 이전과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을 개진한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은 참고할만하다. 여기서 잠시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을 소개함으로써 우회해보자. 그는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숙의에 기초한 민주적 의사결정의 이상이 인터넷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불안정성을 강조한 어느 철학자에게 반론하면서 ‘의사소통에 참가하는 자는 상호주관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인지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의사소통적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물론 하버마스는 대화를 통해 누구와도 의견을 공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든 대화에는 항상 타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것이 너무 지나치다면, 적어도 특정한 논의에 참가하고 있는 한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라는 정도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며, 이를 기초로 의사소통이 성립한다는 것이 하버마스 철학의 전제인 것이다.

 

정치나 공론장을 둘러싼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이론은 의사소통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을 기반으로 구축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점점 이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시대에 돌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1세기는 정보 유통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해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역으로 모든 사람들이 논의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타자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하는 그런 시대이다 (중략) 좀 더 알기 쉬운 예를 들어보자. ‘논의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타자’는 현대사회에 널려 있다. 이슈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예를 들면 환경 문제, 혹은 경제 문제나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현황인식과 분석을 자신 있게 논하는 전문가나 블로거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 (<일반의지2.0>, 98-99p)

 

아즈마 히로키의 이와 같은 진단은 오늘날 한국의 인터넷의 풍경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일베는 공론장 속에서 “논의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타자”를 오히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형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유형은 일베에만 해당되는 사항일까? SNS에서 거침없이 비판적 의견을 늘어놓는 진보좌파적인 사람들도 이러한 유형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런데 정보와 연결성의 극적인 증대로 인해 이들의 입장 역시 일베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쉽게 자기모순에 노출되어 버리고 희화화되어 버릴 수 있다. ‘신상털기’는 이러한 인터넷 환경의 특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넷에 익숙한 이용자라면 누구라도 직감할 수 있듯이, 인터넷에서 적극적으로 발화하기 시작한 순간, 그 누구도 ‘주체’로서 자신의 일관성을 담보하기 힘들다. 그것이 “정보 유통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해서 역으로 모든 사람들이 논의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타자”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인터넷에서 숙의에 기초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SNS 등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적이고 단편적인 면모들 역시 너무나 쉽게 노출된다. 아즈마 히로키가 착안한 점은 인터넷이란 이런 무의식적인 단편들이 집적되는 ‘데이터베이스’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 환경 속에서 인터넷 공론장의 발화자들은 (일례로) ‘자기모순’에 대한 끊임 없는 공격, 이를테면 신상털기에 노출될 수 있다. 때로는 모순적일 수도 있는 발화자들의 인격과 무의식적 욕망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 혹은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하버마스적 의사소통 규범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인터넷은 그 규범의 부재로 인해 주체를 논의의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타자에 노출시키는 공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인터넷은 합리적이고 자기일관된 주체의 이념을 붕괴시키고, 더 나아가 그러한 주체들의 합의와 타협에 기초한 공론장의 이념을 붕괴시킨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아즈마 히로키는 ‘공론장에서의 의사소통에 대한 이념’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버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집단적 결정에 도달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과 절차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숙의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숙의를 잘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와 B라는 다른 의견이 대립했을 때, 토론을 통해 제3의 C라는 입장을 만들어 합의에 도달하는 변증법적인 합의 형성이 서투르다는 말을 듣는다. 그 때문에 일본은 양당제를 포함한 온갖 제도가 기능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낮은 나라로 인지되어 왔다. 하지만 그 대신 일본은 ‘분위기를 읽는’ 것에 능숙하다. 그리고 정보기술의 응용에도 능숙하다. 그렇다면 무리해서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 숙의라는 이상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분위기’를 기술적으로 가시화하고 합의 형성의 기초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13p)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가 제안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란 ‘숙의’(공론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구글 검색서비스, 클라우딩,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구현된 각자의 무의식적인 선호와 욕망의 패턴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의미한다. “통치란 원래 대중의 무의식을 배제하지도 그 무의식에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으면서,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무의식을 가시화한 다음 그 제어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179p) “우리는 정책심의가 있을 때마다 이를 전부 회의실에서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하여, 회의 자체는 어디까지나 전문가와 정치인이 진행하는 것으로 전제하되 중계 영상을 보는 청중들의 의견을 대규모로 수집해 이를 가시화해서 토론의 제약조건으로 삼는, 이런 제도의 도입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181p)

 

거기서는 굳이 당사자들의 토론이나 숙의를 무리하게 확장할, 이를테면 간접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로 확장할 필요가 없다. 둘 모두 동일한 공론장에서의 숙의 민주주의라는 이상에 기초해 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각자가 일상적 행위(일상적 검색과 클릭)로 표출된 각자의 의사를 절충할 수 있는 방안을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21세기의 정보통신기술 속에서 갱신된 일반의지, 즉 일반의지2.0이라고 부른다.

 

3. 촛불의 사상=일베의 사상

 

그의 이러한 ‘이상’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분명한 것은 아즈마 히로키의 생각이 사실은 이미 정치적 풍경으로서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히로키가 자신이 예견한 ‘일반의지2.0′의 극적인 사례를 찾고 싶다면 지난날 한국의 촛불시위를 보면 되지 않을까. 촛불시위의 참가자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때 열렸던 정치적 공간의 기묘한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최초에 시위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각종 선정적인 음모론과 괴담의 난무, 즉 정보의 소음 속에서 쇠고기의 안전성에 관한 실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때 열렸던 시위의 장은 확실히 아고라와 같은 민중집회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었지만, 거기서 누구도 총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다. 거기서는 하버마스나 한나 아렌트가 생각했던 커다란 공적 의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이상시했던 아고라와 같은 공론장은 엄밀히 말해서 촛불시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명확한 의제도, 안건도, 의견수렴 절차도,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굳이 의견을 나누지 않아도 공유될 수 있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각자가 촛불시위에 대해 각자가 원하는대로 의미부여하면서도 어떤 ‘분위기’ 속에서 기묘한 총의에 도달하는, 그러한 ‘새로운 민주주의’(아즈마 히로키)를 구현한 것이 바로 촛불시위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일베와 SNS 진보좌파들은 이러한 촛불시위가 낳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꿈의 정치적 분절이 아닌가? 모바일 컨텐츠, 스마트폰, SNS 등과 같은 새로운 정보기술을 상찬했던 진중권과 같은 사회비평가들이 놓쳤던 것은 새로운 인터넷 환경이 초래한 그와 같은 ‘양면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촛불의 이상도, 아즈마 히로키의 이상도, 해결하지 못하는 공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가령 촛불시위의 진정한 국면은 미국산 쇠고기 문제 때문에 열렸다기보다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이 실제로 어떻든 아무래도 좋다’라는 태도에 의해 열렸다고 봐야 한다. 분명 미국산 쇠고기 수입절차의 안전성에 결함이 있었지만 광우병 공포는 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미국산 쇠고기에 투사된 각자의 정념, 분노, 공포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말했듯이 그 안전성을 심의하는 공론의 절차에 대한 무관심에 기초해 있다. 그러한 절차가 지닌 상징적 효력과 권위를 중지시키는 데서 얻은 정념의 해방감이 촛불시위의 참가자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각자 원하는대로 의미부여하면서도 어떤 분위기 속에서 기묘한 총의에 도달하는’ 그러한 정치적 감수성은 일베인들이 광주 민주화 항쟁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이를테면 ‘실제로 5.18은 무엇이었는가’는 보수적 일베 유저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일정한 합의나 견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막연한 분위기만큼은 존재하는데 바로 5.18이라는 사건의 숭고함에 흠집을 내는 단편적인 디테일들, 소문들, 증언들, 음모론들을 퍼나르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SBS에서 방영한 것처럼 몇몇 게시글과 댓글을 인용해서 ‘일베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무용하다.

 

이는 인터넷 환경에 의해 구현된 일반의지가 ‘과거사’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 무력하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는가? 가령 ‘5.18은 폭동인가 민주화 항쟁인가?’라는 역사적 기억의 문제를 인터넷의 공론장에서 확정지어 말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즈마가 제안하는 저 ‘새로운 민주주의’ 속에서는 일본의 과거사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각자가 의미부여하고 싶은대로’ 해서는 곤란한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한 공론장의 권위를 반드시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베의 등장이 그러한 과거사에 뒤얽힌 정치윤리적 쟁점을 보다 복잡화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공론장과 그 제도만으로는 과거사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윤리적 판단을 관철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는 그리스의 경우처럼 ‘금융구제를 받을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와 같은 선택지, ‘FTA라는 무역질서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와 같은 쟁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 문제들은 시민들이 ‘각자가 의미부여하고 싶은대로’ 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을 통해 가시화된 인민들의 집합적 정념만으로는 사회 전체의 근본적 노선을 결정하거나 (더 중요하게) ‘변경’할 수 없다.

 

가령 5.18의 역사적 세부사실들과 그 의미는 의회에서의 오랜 논의 끝에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보고서>가 작성된 후 그 법리적 판단이 내려진 후 확정되었다. 그러나 일베가 공격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부정할 수 없는) 그 보고서의 세부적인 내용과 사실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낸 공론장의 권위와 상징적 효력 그 자체이다. 즉 그것이 그것이 미처 담지 못한 또 다른 수상한 이면들이 있다는 출처 없는 증언과 자료들을 끝없이 가져오는 식이다. 그리고 이는 광우병의 위험성이 과장되었다는 의심하기 힘든 팩트에 대해서 출처 없는 음모론을 끝없이 가져옴으로써 공론장의 권위와 효력 자체를 중지시켜버리는 촛불 당시의 인터넷의 풍경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촛불시위의 ‘해방’과 일베의 ‘퇴행’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4. 공론장의 사상

 

정보기술과 그와 결합한 생산력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기초한 (파편화되고 분절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공론장 그 자체에 관하여 어떤 근본적인 ‘선택’에 직면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론장의 보편적 위상 자체가 겪는 위기 앞에서’직접민주주의냐, 대의민주주의냐’, 라는 문제는 더 이상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간접적인 것이든 직접적인 것이든, 정념에서 자유로운, 모두의 이성적 관심사와 견해를 포괄하는 보편적 공론장의 효력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가능한 선택지들이 우리 눈 앞에 아른거린다.

 

첫번째는 최장집주의자들처럼 공론장의 규범에 기초한 숙의 민주주의를 다시 규범적으로 재단언하며, 그것을 구현할 제도와 절차를 다시 한 번 숙고하고 재설계하는 선택지. 그들에 따르면 촛불시위와 일베와 같은 과격한 정치적 분출은 모두 ‘충분히’ 잘 설계되고 제도화되지 못한 정당정치의 한낱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선택지는 분명 실용적이라는 점에서는 장점을 지니지만 임기응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는 사사화된 갈등을 사회화된 갈등으로 전환시키는(사츠슈나이더) 정치적 장으로 사고되고 있다. 이는 공론장의 보편적 성격이 정당정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그들 자신이 비난하는 과거의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의 순환논리와 유사한 것이 된다. 최장집주의자들의 신념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위기에 처한 것은 ‘보편적인’ 계급투쟁의 대의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계급투쟁을 잘못 지도한 당의 잘못이라는 순정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번째는 바로 이러한 ‘징후’ 자체가 근본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성격을 강조하며 아즈마 히로키와 유사한 제스처로 보편적인 공론장의 효력 자체를 정면 부정하는 선택지이다. 이러한 선택지를 따르면 지금까지의 (자유)민주적 공론장을 대체할 보다 급진적인 수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선택지는 급진좌파와 급진우파 양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 전자가 ‘다중’ 혹은 ‘프레카리아트’와 같은 무정형의 행위주체에 기반한다면 후자는 ‘소비자’ 혹은 ‘프로슈머’의 행위주체성에 무한한 신뢰를 표한다. 그러나 이 선택지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앞서 보았듯이 대중의 정념을 아무리 집적시킨다 하더라도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판단(내지는 결단)을 요구하는 정치적-윤리적 문제(가령 과거사의 문제, 국제적 금융-무역질서에 대한 판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모호하고 알기 힘든 힘든 과정이지만 (18, 19세기 이래로 계승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공론장에서의 숙의와 토론이라는 이념 자체를 포기하는 대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발명하고 헤게모니화하는 방안이 있다. 지젝과 같은 일부 사상가들은 ‘공통적인 것’ 그 자체를 재발명하고 재규정해야 하는 국면에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공론장을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판단’을 내리는 장소는 결코 (관료제와 대중의 퇴행적 정념에 포화된) 현재의 정치적 제도와 권력기구일 수 없다는 인식을 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이 방안을 따를 경우 우리는 즉시 곤란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어떠한 사안에 대해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을 산출할 공론장을 현실의 정치기구와 제도에서 찾을 수 없고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다면, 도대체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곤경 속에서 흥미롭게도 완고한 구좌파와 원리적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한 없이 가까워지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만이 오늘날 공론장 속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원리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윤리적 판단에 접근할 수 있다는 희망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확실히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소수파이다. 그리고 여기서 상호간의 실체변환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가? 가령 구좌파들은 점차 오늘날 인기를 상실한 ‘자유주의’적 가치의 완고한 옹호자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한편으로 공론장에서의 토론은 한낱 부르주아적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는 다른 한편으로 ‘더’ 치열한 토론과 논쟁에 의해 숙고된 견해만이 그 유효성과 보편성을 궁극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으로 전화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레닌식 민주집중제(모두가 치열하게 토론하되 거기서 결정된 결론을 모두가 따른다)는 오늘날 맥락에서 가장 완고한 자유주의적 견해로 바뀌어가고 있다.그러나 한편으로 대다수의 신좌파들은 오히려 ‘일반의지’의 형성과 같은 것으로 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원리적 자유주의자들 역시 일반적 여론상에서는 회피되는 쟁점들을 과감하게 의제에 올려야 한다는 좌파적 신념과 예기치 못한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인터넷의 여론을 추수하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이들이 오늘날 상실되어가는 공론장의 보편적 성격을 재단언하고 발명해야 한다는 대의에 공감하는 유일한 세력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어쩌면 이들은, 공론장의 보편적 성격을 되살리기 위해서, 단지 그것을 재단언하는 것을 넘어서, 공론장의 이념을 지탱했던 가치들(이를테면 표현의 자유)에 관하여 현실적 타협에 도달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령 진정한 자유는 자유의 자발적인 자기제한으로서만 ‘구체화’된다는 헤겔의 사상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그렇다. 즉 공론장의 보편적 성격을 되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정보통신기술을 역이용하여 정보량과 연결성을 감축하는 것, 즉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복잡성을 일정부분 제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어쩌면 인터넷에서의 일정한 ‘검열’을 수용해야만 민주주의를 구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베를 보고 있노라면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일정한 검열을 도입해야 한다는 유혹(즉 광주가 간첩에 의해 사주된 폭동이라는 게시물을 올리는 순간 허위사실 유포죄로 처벌하는 일정한 억압)을 누구라도 느꼈을 것이다. 인터넷 환경의 도래로 인해 과거 공론장의 이념을 지탱했던 각종 이상주의적인 자유주의적 규범들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