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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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2-24 19:48:08
- / 본지 16면
저 애타는 눈빛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태극기 물결과 팡파레에 파묻혀 가족과 이별하고 전장으로 떠나는 병사들의 표정들이 비장하다. 사진은 지난 1966년 7월 부산항 제3부두에서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 환송식 광경이다. 국제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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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숙이 기둥서방으로
함께 지낸 짧은 시절
어두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접견실 유리창 너머
중년 여인이 보였다
"임정학씨 맞아요?"
그녀의 첫 마디였다
"당신은…"
나는 20년 동안 애증으로 기다려온
여인의 이름을 차마 부르지 못했다
그예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면서 교도소의 한해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감시탑의 탐조등이 켜지자 교도소 건물 위로 일제히 새하얀 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스무 해를 독방에서 산 나는 러닝셔츠로 밧줄을 엮어 목에 건 채 뒤집은 물통 위에 서 있다.
내 기억의 시작은 늘 초량 168계단 집에 함께 살았던 한 소녀로부터 시작한다. 구강기, 항문기를 지나 갓 남근기가 시작된 일곱 살의 잠지는 빠당빠당 했다.
"빨아 볼래?"
"그래, 재밌겠다."
소녀의 입술이 다가오는 순간, '이 호로새끼가 머 하는 짓이야'라는 천둥소리와 함께 뺨따귀와 구두 발길질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아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아재의 폭력을 견뎌내었다. 3부두와 텍사스에서 달러 앵벌이를 해오지 않는 날은 아재의 폭력 앞에서 늘 단단한 공벌레가 되어야 했지만 이 날은 상황이 달랐다.
"전쟁고아 놈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더니 내 딸에게 더러운 짓거리를 해?"
아재는 계단 수가 168개인 하늘계단 꼭대기로 끌고 가 나를 발로 찼다.
나는 공처럼 계단을 굴러 내려왔다. 만약 뉴턴의 관성의 법칙대로만 굴러갔다면 나는 168하늘계단에서 굴러 내려와 텍사스 거리와 3부두를 지나 북항 바다에 빠져 익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에는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는 저항의 법칙이 있다. 관성을 거부하는 나의 저항으로 계단의 절반에서 멈췄다.
부산항에서 열린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 환송식에 동원된 학생들. '무적의 도깨비'라는 글귀가 이채롭다. 월남참전유공전우회 부산 북구지회 제공 |
앵벌이 할 나이가 지나자 나는 3부두에 내리는 미군을 클럽으로 끌어들이는 핑퐁(ping-pong) 일을 했다. 일본말로 힛빠리라고 하는데 나는 텍사스촌에서 가장 오래된 할리우드 클럽의 핑퐁이었다. 3부두에 배가 대면 나는 누구보다도 빨리 달려가 미군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할리우드 클럽 매니매니 뷰티풀 걸! 씨비씨비 오케이?"
당시는 한국이 무역해서 버는 달러보다 텍사스에서 버는 달러가 많았다. 핑퐁으로 인정받은 나는 마침내 할리우드 클럽의 정식 임프로(employee·종업원)로 승진했다. 클럽 임프로는 술값이나 화대를 내지 않는 미군에게 돈을 받아내고 술 먹고 난동부리는 미군을 제압하는 일을 했다. 텍사스촌은 한국인 임프로가 미군을 상대로 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3부두와 텍사스촌을 오가며 잔뼈가 굵은 나의 별명은 세븐틴이었다. 할리우드로 쳐들어온 동네 깡패들과 17대 1로 싸워 이겨 얻은 별명이었다. 그 싸움에서 등 뒤에 긴 칼자국을 얻기도 했다.
어느 날 옆 건물의 세븐클럽에 예쁜 새 아가씨가 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호기심에 찾아간 그 아가씨가 놀랍게도 그때까지 내 자위의 대상인 여신(女神) 금숙이었다. 이러한 황홀한 만남을 운명의 장난이나 우연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니, 아빠는?"
"아빠는 무슨 아빠. 먼 친척인데 짐승 같은 놈, 뒈지고 말았지."
난 그 뒤로 할리우드에서 세븐 클럽으로 옮겨, 에레나로 개명한 금숙이의 기둥서방이 되었다. 어두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기였다. 비록 에레나의 몸을 이름 모를 미군들과 함께 공유했지만 그녀의 사랑만은 나에게 있다고 믿었다.
내리고 싶지 않은 비가 억지로 구지구질하게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핑퐁이 끌고 온 흑인 손님 하나가 진상이었다. 에레나와 2차까지 나가 변태 짓을 하고도 돈을 주지 않고 튀려는 놈의 뒷덜미를 잡았다. 난 돈보다도 에레나에게 변태 짓을 한 것이 괘씸해 "김미 팍킹 달라!"를 외치며 놈을 족치는데 갑자기 나의 옆구리에 육중한 군홧발이 박혔다. 백인 병사였다. "팍킹, 선 오브 비치" 백인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개잡듯이 밟았다. 엄청난 완력이었다. 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칼을 빼내 백인 병사의 복부를 찔렀다. 순식간에 텍사스 거리에는 미국 MP들의 총소리와 호각소리로 가득했다. 이어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고 나는 수갑을 찬 채로 미군 관할 하에 있는 하얄리아 부대 영창에 들어갔다.
내가 칼로 찌른 백인 병사는 미 정보장교인 화이트(White)였다. 화이트가 죽으면 나는 바로 사형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다행히 그는 살아났고,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재판을 받고 감옥에 걸 것인가? 아니면 월남전에 지원할 것인가?
난 당연히 월남을 선택했다. 나는 제3부두에서 월남으로 떠나는 수십 만 명의 병사들을 보며 자랐다. 월남 간 다섯 중 하나는 죽거나 병신이 되어 온다는 소문도 들렸지만 난 유쾌한 마음으로 수송선에 올랐다.
배가 출발하기 직전 탈영을 막기 위해 가족들과 만남을 일절 허락하지 않아 나무판자에 이름을 적어 흔들거나 편지를 돌멩이에 달아 배 위로 던지기도 했다. 난 그 많은 환송인파 중에 피켓을 들고 흔드는 금숙이를 보았다.
"하늘계단에서 만나요. 금숙이."
금숙이를 보자 마음이 숙연해졌고,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월남전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6.25전쟁에서 우리들이 당한 학살, 기아, 고아를 월남에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나는 전쟁에 미쳐 알코올에 빠져 살았으며, 권총으로 러시안 룰렛게임을 하거나 여자 젖꼭지를 잘라 목걸이를 만들어 다니기도 했다. '하늘계단에서 만나요. 금숙이'라는 피켓을 보지 않았다면 귀환의 희망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다.
월남전이 끝나고 패잔병으로 귀환한 나는 세븐클럽의 금숙이와 만나기로 했다. 난 은밀하게 핑퐁을 통해 '밤 12시, 하늘계단 중간인 84계단'에서 금숙이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날 밤 자정 난 영초 윗길에서 내려가고 그녀는 텍사스촌에서 올라왔다.
어릴 때부터 하나, 둘, 셋, 넷 난 언제나 자동으로 168 계단을 세면서 내려갔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영도와 북항 바다를 감상하는 건 하늘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의 덤이었다. 세상에 여기보다 눈맛이 시원한 곳이 또 있을까.
그녀는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오고 나는 걸어서 땅 밑 내려가다 계단 중간에서 마주쳤다.
"금숙이."
"세븐틴 오빠!"
"잘 지냈어?"
"오빠, 월남에서 죽은 줄 알았어."
"죽긴 왜?"
"그럼,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감자를 캐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불안해 보였다.
순간 벽에서 검은 물체들이 일렁거렸다.
나는 재빨리 권총을 빼들었다. 계단과 이어진 골목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이 총을 겨누며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임정학, 자수해!"
나는 권총을 쏘며 계단 아래로 몸을 굴렸다. 총격전 끝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달아나다 텍사스거리 남선창고 벽에서 잡혔다. 다음날 '거물 간첩 임정학 체포'라는 활자가 4대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나처럼 기구한 인생도 세상에 또 있을까? 난 다낭전투에서 베트콩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베트콩 중에 북한군 장교가 있었다. 그는 나를 평양에 데려가 공부를 시켜주고 멋진 집에서 이밥을 먹고 살게 해주겠다고 했다. 사실 난 다른 것보다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말에 끌려 하노이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시켜준 공부는 특수 밀봉교육이 전부였다. 교육이 끝나고 해주에서 반잠수정으로 남파될 때 그들은 남조선에서 일절 아는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나는 제일 먼저 부산을 찾아 유일하게 아는 사람 금숙이를 만났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난 168 하늘계단에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전향을 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20년을 감방에서 살았으나 나를 배신한 금숙이는 면회 한번 오지 않았다.
지난 주였다. 간수가 시찰통을 치며 '임정학 면회!'라는 말을 했다. 나는 20년만에 처음 접견실로 가면서 뭔가 착오가 생기지 않았나 의심했다.
접견실 유리창 너머로 한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임정학씨 맞아요?"
그녀의 첫 마디였다.
"당신은…"
나는 20년 동안 애증의 감정으로 기다려온 여인의 이름을 차마 부르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푸른 수의를 벗어 등에 대각선으로 그어진 도흔(刀痕)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 만날 수 있네요."
"…궁금한 게 있어."
"뭐죠?"
"어떻게 날 알고 넘겨주었지?"
"그날 난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을 만나러 나갔어요."
"그래? 난 그 말을 믿을 수 없군."
"난 그 사건 이후 미군을 따라 미국에 가서 살다가 귀국해 처음으로 당신을 찾은 거예요."
"그런데 여긴 왜 왔어?"
"내 사랑은 당신뿐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금숙이는 교도관이 '면회 끝!'을 외치고 나를 접견실에서 끌고 나갈 때까지 나를 지켜보았다.
난 착잡한 심정으로 면회를 끝내고 통용문을 지나 감방으로 돌아가는데 교도관이 말했다.
"에레나 화이트, 그 여자 미모가 대단하던데…"
"이름이 에레나 화이트였어요?"
"아니, 그럼 이름도 모르고 면회한 거야? 코쟁이 남편은 접견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더군."
'에레나 화이트? 코쟁이 남편?'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져 왔다.
김하기 소설가 |
■ 김하기 작가 약력
부산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부산대 대학원에서 '황석영과 이문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산대 부경대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창작과 비평에 '살아있는 무덤'으로 등단해 '완전한 만남' '천년의 빛' '식민지 소년' 등 16권의 책을 썼다. 소설가, 작가, 칼럼니스트로 한국인의 창의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 방위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 월남파병과 제3부두
- 참전자와 가족들의 아픔 서린 곳 … 북항 재개발에 밀려 흔적만 가늠
대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부산 북항 재개발 현장. |
지금 제3부두는 북항 재개발에 밀려 옛 모습이 사라지고, 이정표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부산항 제3부두는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월남전 참전자들의 수송전용 부두로, 부모형제의 이별에 아우성치며 눈물 흘렸던 이별의 부두였다. 당시 이곳 부두에서 가족과 병사들이 만날 수 없었지만 가족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제3부두로 나와 배를 타고 떠나는 자식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아쉬운 송별인사를 나눴다. 이곳 제3부두에서 33만 5517명의 병사들이 월남으로 떠나, 그 중 5099명이 전사자가 돌아오지 못했고, 11232명의 전상자들과 수만 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은 돌아왔으나 지금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고 있다.
1964년도 총수출액이 1억 달러였던 것이 1977년에는 100억 달러로 100배가 늘었는데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한 그 시기와 수출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간이 일치한다. 이 제3부두에 월남전 기념공원과 기념탑이 세워진다면 월남 참전 용사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후세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될 것이며, 아울러 스토리텔링이 있는 부산의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동구,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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