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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안철수는 안녕한가[한겨레 블로그에서펌]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26.

재림한 박정희의 시대에  2013/1/25 07:23        

 

[한겨레 블로그]http://blog.hani.co.kr/sydneytaxi/43783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기분으로, 감정으로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난 선거에서는 국민들의 감정을 요동치게 할 수 있는 사건이 없었다. 충분히 그럴만한 기회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안철수는 국민들의 허한 마음을 메꾸어 줄 수 있었다. 바람은 감동에서 온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서는 감동 받을 뻔 하다가 말았다. 안철수를 통해 깨어나고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듯하다가 눈물이 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마치 성관계는 했지만 오르가즘에 도달하지 못하고 시브작하게 끝난 상태처럼 되어 버렸다.

안철수가 보인 행동은 머 리가 좋은 사람인데다가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엄청나게 생각도 많이 하고 계산도 많이 해서 한 행동이겠으나 둔한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거란 두 팔을 걷어붙이고 사생결단을 하는 자세로 임해도 될까 말까한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는 한 팔만 걷어 부친 자세로 보였기 때문이다.


‘선 거에서 승리하더라도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했던 자세는 폼은 날지 모르나 힘을 함께 보태는 모습은 아니었고 떠나면서 안철수의 ‘어떤 결과든 기쁘게 받아들이자’고 날린 멘트대로라면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다.’라는 논리가 될 수 있다.그의 말대로라면 좌절과 허탈감에 빠진 대다수 사람들은 그의 지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판에서 시종일관 ‘구름 속에서 구름 과자 먹는’ 듯 한 자세를 보인 안철수에게 열광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우스워 보일 일이다.

한국은 노무현 때처럼 국민들이 미쳐서 감동과 눈물을 흘릴 일이 있어야만 겨우 이길 수가 있지 정상적으로는 50%가 넘는 보수 세력을 이길 수가 없는 구조이다.

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등장한 그가 국민이 백성으로 강등되는 파국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불과 대선 한 두달 전에 나와서 짧게 보아도 수 십년에 걸쳐 형성된 정치판을 개혁하라고 외친다고 개혁이 될수 있는 건가? 나는 그가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제시해서 승부를 걸지 않고 추상적인 정치개혁을 들고 나올 때 속으로 무척 의아했다.

누구나 인정하듯 안철수는 휼륭한 사람이다. 정치에 입문 하기까지 안철수는 자신이 마음먹은 휼륭한 일을 할 수있었다. 그러나 정치는 자신이 마음 먹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김대중, 노무현이 마음을 먹지 못해서 개혁을 못했던가? 비록 대통령이 되었어도 힘이 없어 못했지.개혁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하는 것이다. 이제 막 등단한 정치신입생이 무슨 재주로 개혁을 하겠다는 건가? 혁명이 아니고서 한 사람의 정치 신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세상을 바꾼 예는 없다.

세상에 개혁처럼 힘든 일은 없다. 예수도 석가도 개혁에 실패했고 오직 수 많은 민중들이 피와 땀을 흘린 댓가로 역사가 이만큼 발전 해온 것이 아닌가?  안철수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서울 시장 선거 때처럼 오직 국민들에게 감동거리를 제공 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 번에 그 감동을 주지 못했다. 야당을 탓할 일이 아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동을 줄만한 능력이 없고 대안 없는 대안으로 존재할 뿐이다. 아무리 정치 개혁을 외쳐도 감동과 눈물이 없이는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다.

구약 성서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해골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몰론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예언자가 포로로 잡혀와 있는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자기가 본 환상을 말한 것이다.요즘 희망을 잃고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실 이 이야기는 바벨로니아 제국의 끝이 임박했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된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바벨로니아로 강제 유배된 이주민 집단들 내부에서는 다분히 메시아주의에 들떠 있었다. 지난 고난의 역사 속에서 죽어갔던 동족들, 아무렇게나 흩어져버린 그네들의 뼈들이 되살아나고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대중을 선동하는 메시야주의의 표현이다. 고통에 휩싸여 있는 대중이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올 대안이 보이지 않는 대안 부재의 상황일수록 메시아주의는 확산되는 법이다.

지난해 메시야처럼 등장했던 안철수가 과연 마른 뼈들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인가?
함 믿고 기대해 보자.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별 달리 희망을 둘 곳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좋아지겠지.'라는 약간의 희망도 없이 살아간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