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14 14:54 수정 : 2012.12.14 15:05
토요판] 가족 / 남편은 전업주부 2년차
삼성증권은 몇 해 전 국내 법원의 판결과 통계청 등의 자료를 분석해 전업주부의 연봉을 2500만원으로 산정한 바 있습니다. 씨제이(CJ)홈쇼핑은 최고 3400만원이라고 했죠. 미국에선, 전업주부의 역할이 보육교사·요리사·운전기사·심리상담사 등 10개 직업을 합친 것과 같다며, 연봉 1억300만원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봤죠. 집안일도 분명 가치 있는 노동입니다. 부부 중 누구 한 사람이 전업주부를 해야 한다면, 그게 남편이든 아내든 뭐가 중요할까요.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
이미진(가명·40)씨는 설거지를 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남편은 기름기 묻은 그릇을 깨끗한 그릇들과 분류해 닦았다. 따뜻한 물로 그릇을 헹구고 물이 빠지게 차곡차곡 엎어 놓더니, 마지막엔 싱크대의 물기까지 말끔히 닦았다. ‘이제 주부가 다 됐구먼.’ 이씨는 가슴속에 열불이 치미는 것 같아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씨의 남편은 백수다. ‘아니, 이젠 전업주부라고 불러줘야 하나?’ 3년 동안 빚으로 돌려막다가 회사 문을 닫고, 남편은 2년 전부터 집에 들어앉았다. “잠시 쉬면서 새 사업을 구상해보겠다”고 했을 땐, 이렇게까지 백수 생활이 길어질 거라고 예상치 못했다. 남편은 이젠 새 일 찾는 건 아예 포기했는지 살림에만 전념하고 있다.
사업 실패 뒤 잠시 쉬겠다더니
그는 집 안에 눌러앉았다
다섯식구 생계는 오롯이 내 몫
뭐든 시도쯤은 해봐야지 않아?
아내가 바람났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도
남편은 냉가슴 앓기를 한달
결국 물었다 “그 남자 누구야?”
“이혼하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섯 식구의 생계가 오롯이 이씨 어깨에 달린 지도 벌써 3년째다. 이씨는 남편 사업이 기울기 시작한 뒤 일자리를 구했다. 만약을 대비한 일자리였는데, 그 일자리 안 구했으면 어떻게 할 뻔했나. ‘남편만 믿고 있었다간 다섯 식구가 지금쯤 손가락 빨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아찔하다. 온종일 서서 일을 하다 보니 퉁퉁 부은 다리로 퇴근해 보면, 남편은 5살 막내를 재우다 함께 잠든 뒤다. 초등학생 두 아이까지 손 많이 가는 세 아이를 살뜰히 돌봐주는 남편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하지만, 내 몸 피곤한 날엔, 솔직히 남편이 “밉다.” 남편 월급 받아 살림하는 친구들, 아니, 하다못해 맞벌이라도 하는 친구들을 보면 ‘지지리도 남편 복이 없다’는 생각에 울적해진다. 초등학교 5학년 딸내미가 친구를 집에 안 데려온 지도 꽤 됐다. 아빠가 집에 있는 게 “창피”하단다.
안다. 마흔 넘은 나이, 직장생활이라곤 총각 때 고작 2년 해본 남편이 어디 이력서를 내봤자 잘 안될 게 뻔하다는 걸. “그걸 몰라 그러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남자가 돼서, 한 집안의 가장이면 뭐가 되든 일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거 아닌가?” 사실 이씨가 화가 나는 건 남편의 소심한 태도다. 활발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이씨와 달리 남편은 매사에 조심스럽다. “새 사업이라도 시작해봐” 좋게 말을 해도 “그러다 얼마 있지도 않은 돈마저 까먹으면 어떻게 하냐”는 식이다. 참고 참다가, 어쩌다 한번 이런 말이라도 하면, 남편은 며칠씩 말도 안 한다. “그놈의 자격지심도 지겹다. 남편 속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당장 내가 죽을 지경”이다.
이씨는 사실 6개월 전부터 남편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 일하며 오가다가 친해진 그 남자, 매사에 유쾌하고 도전적인 남자를 보면 “남편과 비교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죄책감? “왜 그런 게 없겠냐. 애들이 눈에 밟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남자를 만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사실 남편 장만우(가명·43)씨는 아내의 ‘변화’를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아내의 옷차림이 화려해졌고, 야근·회식 등 갖가지 핑계로 귀가 시간이 늦는 날이 잦아졌다. “오늘도 늦냐”고 물었을 뿐인데 “내가 늦고 싶어서 늦냐”며 짜증을 냈고, “당신 바람난 거 아냐” 툭 던진 농담 한마디에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화를 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저렇게 정색을 하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아내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러웠다. 걸려온 전화를 방에 들어가서 받는 것, 전에 없이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걸어둔 것, 하나하나가 수상했다. 골목길에 몸을 감추고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렸던 건, ‘이러다가 의처증까지 생기는 거 아닐까’ 심란했기 때문이다. 하필 그날, 아내는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장씨도 한두번 본, 아는 얼굴의 남자와 아내는 한참을 더 얘기를 나눴다. “심장이 요동치고,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씨는 “곧장 차로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냥 집으로 들어와 이불을 쓰고 자는 척했다. 한참 뒤 들어온 아내에게선 가벼운 술 냄새가 났다.
‘어떻게 아내가 이럴 수 있나.’ 만감이 교차했다. “돈도 못 벌고 아내만 고생시키는 못난 남편”이란 생각에 위축됐다. “그래도 뭐, 회사를 관두고 내가 그냥 놀기만 한 건 아니잖냐” 싶을 때도 있었다. 회사를 관두고 나서, 장씨는 애들 챙기랴, 청소하랴, 밥하랴 안 해본 일들을 하면서 ‘그래, 살림이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아내는 고마워하기커녕 집안일을 열심히 할수록 짜증만 내지 않았나. “난들 일하기 싫어서 안 했겠느냐” 따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가진 돈은 없지, 그렇다고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나? 지난 2년 밤잠을 편하게 자본 날도 거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냉탕과 열탕을 오갔지만 장씨는 ‘그날’ 일을 한동안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기를 한 달, 결국 터질 게 터졌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그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펄쩍 뛰는 아내가 말했다. “당신과는 신뢰가 무너져 못 살겠으니 이혼하자”고. ‘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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