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에 깃든 추억과 향수를 이야기마당으로 불러내자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7-23 19:38:26
- / 본지 6면
1960년대 말 동천과 전포천이 만나는 지점의 풍경. 자연이 살아 있는 동천의 나무다리를 건너는 주민들의 모습이 정겹다. 부산진구 제공 |
- 기업들을 잉태시켜 산업화 주도
- 오늘날 부산경제 이끌어 온 터전
- 아낌없이 주고 인간에 버림받아
- 오염에 악취, 죽어가는 하천으로
- 동천과 얽혀있는 옛 시절 기억들
- 함께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 작은 표지석 하나 쌈지공원 조성
- 시민·젊은층 등 즐겨 찾게 만들어
- 하천재생 시대 과제 함께 풀어야
■고향의 얼굴, 동천
동천,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나에게 동천은 추억을 넘어 바로 고향의 얼굴이다. 1950년대 초반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나 범일동, 범천동을 넘나들며 성장하는 동안 동천 주변은 나의 주요 놀이터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주전부리가 변변찮던 시절, 동천 하구의 대선소주 공장 마당에는 늘 고구마 빼때기(주정용 고구마 슬라이스 말랭이)가 산더미처럼 널려 있어 종종 서리의 대상이었고, 서리하다 들킨 날 호되게 야단맞던 기억도 아련하다.
당시 황령산으로 놀러 가려면 조방앞을 거쳐 '농막'(현 자유시장)을 지나 동천의 '썩은 다리'(현 문현동 이마트 앞)를 건너서 성동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길이 제일 빠른 지름길이었다. 당시 '농막'은 약장수들의 가설 무대가 있어서 국극 등 거리 공연과 이런 저런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난장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는 동천 상류인 전포천 변에 있던 부산시립도서관(현 부전도서관)을 많이 이용하였다. 고교 시절을 바로 동천과 인접한 학교에서 보냈으니, 나에게 있어 동천은 여러 면에서 삶의 뿌리를 형성해 준 고향 같은 존재이다.
당시 흑룡강으로 불리우던 동천 본류의 악취 때문에 늘 코를 막으며 지나쳤지만 그 내음마저도 이제는 향수(鄕愁)로 승화되어 그리웁다. 이런 개인적인 소소한 추억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최근 논의되고 있는 동천 재생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보다 큰 틀에서 역사적인 추억을 먼저 되살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잘 알려진대로, 동천 주변이야말로 한강의 기적 못지않은 한국 산업화의 탯줄이자 부산 경제를 이끌어 온 터전이기 때문이다.
■한국 산업화의 터전
6·25 전쟁 이후, 피폐했던 한국 경제는 바로 이 동천에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신발 식품 화학 의약 섬유 목재 자동차 정유 등 우리나라 주요 산업 대부분이 동천 변에서 동천 용수를 이용해 성장, 발전하였다. 부산의 상징 산업인 신발 공장들은 대부분 동천 주변에 밀집되어 있었다. 국제상사 태화고무 삼화고무 동양산업 보생고무 진양화학 같은 신발 공장들은 나이키 리복 프로스펙스 르까프 등의 국내외 유명 브랜드 제품을 생산, 수출하여 우리나라 경제를 수출 주도형으로 성장시킨 일등공신이었다.
한국 최대 재벌 그룹인 삼성(제일제당)이 처음으로 설탕을 만들고, LG(락희공업사)가 국내 최초로 럭키치약을 만들어 내었던 곳도 이 동천 변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동천에서 만들어진 대선소주로 삶의 애환을 달래었고, 동천에서 만들어진 대한비타민으로 영양을 보충하며 살았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동천 변에서 만들어진 섬유로 옷을 해 입었고(조선방직 경남모직 부산방직 화랑염직), 동천에서 생산된 합판(동명목재, 성창기업)으로 집을 단장하였으며, 동천에서 만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살았다(신진자동차, 흥아타이어).
정유 산업도 동천에서 빠지지 않는다. 현재의 동천 변 부산시민회관과 크라운 호텔 자리에 있었던 극동석유는 현대오일뱅크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른다.
동천 변의 기업들과 공장에서 일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많은 근로자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부산 경제 특히 소비재 중심의 시장경제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근로자들은 서면과 남포동에서 영화를 보고, 조방 앞에서 술을 마셨으며, 휴일에는 동래 금강원과 온천장 그리고 해운대로 놀러 나갔다. 부산진시장과 자유시장, 서면 태화쇼핑을 드나들며 쇼핑을 하였고, 동천 변 시민회관에서 쇼와 공연을 즐겼다. 근로자들의 소비로 인해 해운대, 온천장, 남포동, 서면 등 부산 전역의 상권이 동시에 발전하였으니 결국 동천이 부산 경제를 성장시켜 온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거리를 메웠던 통근버스들, 그리고 푸른 작업복을 입고 서면 시장에서 돼지국밥에 소주잔을 비우다가 부전천으로 오줌 줄기를 내갈기던 사람들의 환한 미소를 다시 보고 싶다.
■새로운 추억의 공간 만들기
동천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결코 없다. 지금처럼 악취가 여전하고 흉물스런 물색의 죽은 하천으로는 부산 백년 대계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천이 과거의 어두운 잔영을 벗어나 부산의 미래가 되고 새로운 추억의 장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다. 작금 논의되고 있는 동천 물길 되찾기, 복개천 뚜껑 열기, 동천 갈맷길 조성하기 등 도시공학적인 많은 대안들은 고무적이다. 여기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추가적 대안을 제시해 본다.
우선, 현존하는 동천 출신의 기업인들과 당시 근로자들을 찾아 추억의 이야기를 나누게 하자. 1960년대로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산업화 기간 동안 동천 주변에서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 옛 추억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보자는 말이다. 그 이야기들을 모아 조그만 소책자라도 만들어 낸다면 살아있는 역사를 남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직장 동료들의 자생적 모임을 발굴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동천 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을 만들어 보자. 동천 변에서 출발한 각 기업들이 있던 자리에 작은 표지석과 쌈지 공원을 조성하여 옛 기업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좋겠다. 예를 들어 기업의 동참의 이끌어 내 지금의 포스코 더샵 아파트 인근에 '제일제당 쌈지공원'이란 이름으로 공적 공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거창한 것이 아니라, 햇빛 가릴 정도의 나무 몇 그루와 벤치 몇 개면 된다.
동천에서 출발하고 성장한 기업들의 상당수는 지금 한국 경제의 주역으로 자리매김 되어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사업을 중단한 기업들도 대학(동명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전환 등 다른 영역으로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아가, 동천 변 쌈지공원을 이어주는 이야기 길(둘레길)을 만들어 시민들과 젊은이들이 즐겨 찾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동천 재생 프로젝트가 일부 뜻있는 사람들만의 논의를 넘어 부산 시민 모두가 공감하고 참여하는 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다.
■동천 재생은 시대적 요청
동천은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한국 산업화의 시작점이자 부산 경제의 뿌리였다. 동천은 우리에게 거의 모든 것을 내어 놓았지만, 그 대가로 돌려받은 것은 처절하게 오염된 하천이었다. 생명을 잃어버린 악취나는 하수구가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동천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동천이 죽어가는 동안 부산 경제도 함께 시들었으며 그 결과 부산은 제대로 된 대기업 하나 없는 산업 공동화 도시가 되고 말았다. 자업자득인 측면이 있다. 동천이 다시 살아나야 부산은 비로소 새로운 산업을 창조해내고 경제적 번영과 도약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들 때 도시는 비로소 활기를 찾고 경제가 살아나게 된다. 동천에 사람들이 모여 도시의 애환이 깃든 이야기를 부담없이 나누고, 물고기가 뛰노는 강을 구경하며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희망해 본다.
남일재 동서대 사회복지학부 교수·한국지역사회연구소장
후원: (주)협성종합건업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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