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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영도구/동구

[시론] 동구의 기적 /김홍희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28.

삶의 체취 묻어나고 경관마저 세계적인 산복도로 아파트가 이바구 공작소라면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1-27 19:23:02
  • / 본지 26면
   
부산의 지형적 특징 중 하나가 산복도로다. 세계를 돌아다녀 보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길이 있으면 어디를 가나 명소다. 그러니 부산 앞바다의 북항이 훤히 보이는 동구의 산복도로도 명소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것도 새로운 건물을 짓고 꾸며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삶의 현장으로서의 가치가 훨씬 높다는데서 다른 명소와 구분될 것이다.

영주동, 수정동, 좌천동 산복도로에는 40여 년 전에 지은 낡은 아파트들이 있다. 여기서 보는 부산의 경관은 가히 세계적이다. 일개 사진가의 근거 없는 넋두리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나는 적어도 70~80개 나라를 떠돌아다닌 여행광이고 버킷리스트에 나오는 좋다는 곳은 모두 섭렵한 방랑자다. 방문자의 입장에서 보는 안목과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것이 다를 뿐이지 실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삶의 체취가 이렇게 배어나는 장소는 쉽지 않다. 이런 곳이 세계적인 명소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 실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부산의 감천마을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명소로 하루아침에 변신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상상력을 보태야 한다.

동구의 산복도로에 '이바구 공작소'가 곧 개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반갑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힌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이미 있는 자원의 활용과 현지 주민들과의 연대감을 가지고 이런 일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예를 들어 경관 좋은 수정아파트 한 동을 이바구 공작소로 바꿀 수는 없었을까? 거기 사는 주민들은 그대로 살면서 관과 유대를 가지고, 민과 관이 협동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아파트 한 동은 80세대다. 거의 노인들이 살고 빈집도 군데군데 있다. 80세대라고는 하지만 아파트 가격도 현저히 싸고 한 동 전체를 구입한다고 해도 16억 원 정도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재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다.

5층 전체를 틔워서 예술 공장을 만들고, 4층은 외국인들의 숙박 시설로 활용해 부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하며, 3층은 1970, 80년대의 낡은 한국을 재현해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숙박 시설이라면 대개 새 인테리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가 세계를 돌아보면 좋은 호텔에서 묵은 것만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그 벽지 그대로, 그 문지방 그대로 두고 사람을 받는 것이 훨씬 문화적 즐거움을 준다. 그게 우리의 삶을 체험하게 하는데 충분한 조건이며 그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자 자국으로 돌아갔을 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이 필요하다.

2층은 한국적이고 부산적인 작품이나 물건을 팔 수 있으면 좋겠다. 거기 사시는 어머니들은 가정 국수나 평소 드시는 된장찌개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 대접 했으면 좋겠고, 부산을 찾는 이들에게 어머니들의 정을 느끼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건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서 1층은 주차장으로 확보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자원 이용은 없을 것이다. 산복도로에서 유치환 시비까지 내려가는 골목길은 환상적이다.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불편을 호소할지 모르지만, 나는 거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삶의 환희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정 있는 골목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저 낡고 불편한 골목으로 둘 것이 아니라 산에서 자전거로 경기하는 다운 힐 코스를 골목에 만든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골목 다운 힐 코스' 하나로 세계가 기억하는 기발한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즘 동구를 바꾸고자 하는 의욕과 움직임이 여실히 보이고, 그런 것을 해내고자 하는 동구청 직원들의 모습에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의식이 있는, 문화를 아는 자랑스러운 구청장을 모시고 있다는 자부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관이 준비가 되었으면 이제는 민을 설득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씀이다. 설득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 문화적 불을 지피는 일이다. 시간은 걸릴지 모르지만 불만 지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동구는 기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