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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 재생 4.0 부산의 미래를 흐르게 하자 <1-3> 동천 스토리- 한국 경제의 산실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8.
  • 국제신문
  • 최정현 기자 cjh@kookje.co.kr
  • 2013-01-02 20:52:26
  • / 본지 3면
   

1970년대 부산 부산진구 연지동의 럭키비누 공장 전경. 1959년 락희유지공업사로 출발해 오늘날 LG화학이 됐다. 국제신문 DB

 

- 철도부설·매립·운하도 가능
- 교통 요지·물류중심 이점에
- LG화학으로 성장 럭키치약
- 삼성그룹 모태 제일제당 등
- 상당수 대기업 이곳서 태동

- 동명목재 동성화학공업 등
- 내로라하는 향토기업들도
- 동천과 지류 하천이 산파역

지난달 31일 낮 부산 부산진구 범천동의 주상복합 서면 포스코더샵 센트럴스타 내 상가. 동천 하류가 시작되는 광무교 바로 옆에 자리잡은 이 건물 내 상가 식당은 점심 때면 인근에서 모여든 직장인들로 붐빈다. 포스코더샵 센트럴스타는 부산 도심 한가운데 세워진 대표적 주상복합 건물이다. 이곳은 원래 1953년부터 제일제당이 자리잡고 있던 터다. 삼성그룹의 실질적인 모태가 된 곳이다. 당시 철골 구조로 지어진 공장은 건물 그 자체가 화제의 대상이었다. 3300여 ㎡의 부지에 연건평 2600㎡ 로 그때로서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수입 설탕이 판치던 시절에 우리 손으로 만든 백설표 설탕이 생산되던 곳이다. 이 회사는 2005년 양산으로 옮겨가기까지 이곳을 지켰다.

■삼성, LG 등 주요 그룹의 태동지

1951년 부산 서구 대신동에서 부산진구 부전동으로 이전해 온 락희화학공업사. 이 회사는 1955년 근처 연지동 353번으로 옮기면서 최초의 국산 치약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1959년에는 비누공장인 락회유지공업사, 1962년는 락희비니루공업(주)을 설립한다. 1974년에는 '럭키'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고(故) 구인회 회장이 세운 이 회사가 지금의 LG화학이다. 1955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 럭키치약은 출시 3년 만에 치약의 대명사로 불리던 미국의 '콜게이트' 치약을 물리치고 국내 시장을 석권했는데 '럭키'라는 상표 자체가 마치 치약을 상징하는 보통명사처럼 불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삼성그룹과 LG화학이 바로 부산 부산진구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들 기업 입지의 또 다른 공통점은 부산 시내를 관통하는 '동천 유역'이라는 점이다. 대표적 버스 회사 중 하나인 대우버스의 역사도 동천 근처에서 시작됐다. 1955년 부산진구 전포동에 세워진 신진공업사가 그 출발이다. 1962년부터 3~4t 마이크로버스와 8t 대형버스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963년 미군으로부터 엔진 등을 불하받아 자체 기술로 버스를 본격 생산했다. 1963년에는 최초의 국산 승용차인 신성호도 이곳에서 제작됐다. 1972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였던 미국 GM사와 합작, GM코리아로 상호를 바꿔 버스를 생산했다. 지금의 대우버스로 이름을 바꾼 것은 2002년이다.

부산상공회의소 이일재 사무처장은 "삼성그룹과 LG화학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부산 동천 주변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동천이 말 그대로 한국 경제의 산실 역할을 했다는 의미"라며 "특히 대우버스의 역사에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말했다.

■내로라하는 향토기업 동천이 고향

부산의 대표적 기업가 중 한 사람인 강석진 회장이 경영했던 동명목재도 동천가에 있었다. 동명목재는 한때 세계 최대 규모의 합판 공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6·25 전쟁은 동명목재가 도약하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고, 휴전 이후 건축 붐이 일면서 합판산업은 시대적 조류를 타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부산 사람들이 동명목재를 '동명왕국'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7년 연속으로 전국 수출 1위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동명목재도 무리한 시설 확장과 1980년의 원자재값 폭등 등이 겹치면서 부도를 맞게 됐다.

1917년 일본인들이 세운 조선방직 주식회사도 동천을 모태로 성장했다. 설립 당시 조선방직은 부지 13만2000㎡, 공장건물 54동, 종업원 4만 명의 거대 회사였다. 현재 조방 앞이란 명칭이 여기서 유래한다.

동천의 지류인 당감천 하천가에는 미원간장 공장도 있었다. 1964년 미원식품공업사로 공장을 세워서 대상그룹 창업주 임대홍 회장의 셋째 동생인 임수홍 사장이 경영했다. 1980년대 초 미원간장이 대상그룹의 계열 회사로 합류하면서 공장을 이전해 갔다. 백제갑 회장이 가야동에 세운 동성화학공업사도 대표적 동천변 기업 중 하나다. 1985년 생산시설을 사하구 장림공단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해외시장 개척과 현지 공장 설립 등을 통해 사세를 꾸준히 키워가고 있다. 부산상공회의소 김지 수석부회장은 "동천 주변에서 태동한 기업들을 이끌던 기업주들은 대부분 한때 부산을 대표하던 상공인들이었으며, 상당수는 2세들이 경영 일선에 있다"고 말했다.

행정구역상 부산진구와 동구를 중심으로 한 동천에 대표 기업들이 많이 들어섰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찍이 철도 부설과 매립을 통해 교통의 요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천 하류 지역은 강폭이 넓어 운하로도 기능했다. 북항으로의 원활한 물류 수송을 위해 동천 근처에 기업들이 자리잡은 것이다. 부산발전연구원 주수현 실장은 "1970, 80년대 당시 영도가 조선 철공소 등의 중공업 중심지였다면, 부산진구 등 동천변은 고무신 면방직 등 경공업 중심지였다"고 설명했다.


# '부산 신발산업 메카' 명성도 동천주변서 시작

- 말표 태화·기차표 동양고무 등
- 서면일대 둥지 틀고 명성 구가
- 옛 공장이 자리 잡고 있던 곳
- 지금은 아파트·상가로 변모

   
1970대 당시 부산 부산진구 범천동 삼화고무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근로자들의 모습. 국제신문 DB
부산은 뭐니뭐니해도 신발 산업의 메카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직 지역을 대표할 정도로 신발산업의 뿌리는 깊다. 부산 신발 산업도 지금의 서면을 중심으로 한 동천 주변에서 발달했다. 태화고무 삼화고무 동양고무 진양고무 보생고무 대양고무 등이 이곳에 둥지를 틀어 기차표 말표 범표 진양 등의 브랜드로 신발을 생산했다.

후발 주자에 속하는 대양고무는 1976년 전포동에 터를 잡았다. 대표 브랜드 슈퍼카미트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농구화와 스파이크 운동화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기차표 상표의 동양고무는 화승그룹 현승훈 회장의 부친인 현수명 씨가 1953년 창업했다. 원래 동구 초량동에 있던 공장을 1963년 부암동으로 옮겼다. 1980년 (주)화승으로 바꾼 후 월드컵 르까프 등의 제품을 생산해 명성을 쌓았고, 지금도 부산 신발의 자존심을 이어가고 있다.

검정고무신의 신화를 만들어 낸 보생고무도 1937년 부전동에서 시작했다. 범표의 삼화고무는 한때 종업원 수가 1만 명을 넘어설 정도였다.

진양고무는 부산 신발산업의 상징적 인물인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1963년 부암동에 설립했다. 창립 이후 비교적 단시일 내에 사세를 급격히 확장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과 오일쇼크 등이 겹치면서 1983년 법정관리를 맞게 된다. 1992년에는 신발 생산을 완전 중단했다.

말표 브랜드로 유명한 태화고무도 이곳에 자리했다. 태화가 개발한 합성고무 재질의 얇은 천을 입힌 운동화는 1970년대 중·고등학생들이 교복과 함께 신고 다녔던 신발인데 여름에는 흰색, 겨울에는 검은색을 착용했다. 태화고무 역시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1994년 생산을 중단했다.

1970년대에 신발 회사에 입사해 현재 태광실업(주) 전무로 재직 중인 양태용 씨는 신발산업 전성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직원들이 많았어요. 3, 4명씩 모여 단칸방을 얻어 생활하면서도 잔업 한 번 더 하려고 조장이나 반장에게 '와이루'(로비)를 할 정도였죠. 퇴근 시간이면 근처 술집은 빈 자리가 없을 정도였어요."

당시 회사원들 사이에서는 보석계를 만들어 반지 목걸이 등의 패물을 장만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범천동과 가야동, 서면 일대에 보석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한편 동천변에서 태어났거나 가동되던 제조업체들이 있던 자리는 예외없이 아파트나 대규모 상업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다. 복개천을 중심으로 한 서면 지역은 부산의 핵심 부도심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상업지로 변모했다.

부산진구청 하주홍 지역경제과장은 "도시화의 물결 속에 제조업체가 떠나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며 "부산 도심에 제조업체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추억의 한 장면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