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 첫 회, ‘정문헌 의원의 착각 또는 거짓말’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하며, 홈페이지 <자유인의 서재>가 갑자기 늘어난 방문자로 인해 한때 접속이 어려웠던 점에 대해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린다. 대화록과 NLL 문제 때문에 속상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전은 여전히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쟁점, 새로운 논리와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고 있어서 시민들은 따라가기가 버거운 실정이다. 여야 정치인들의 말과 언론 보도 역시 서로 엇갈리고 뒤엉기며 부딪치는 중이라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지난 한 주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국회 열람위원들은 국가기록원에서 대화록을 찾는 데 실패했다. 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원세훈 국정원장이 대화록 전문을 짜 맞춰 만든 발췌본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정문헌 의원이 그것을 보고 최초 폭로를 했다고 말한 박근혜후보 선대위 종합상황실장 권영세의 발언 녹취록을 추가 공개했다. 새누리당이 국정원 기관보고 비공개를 주장하며 국정조사 특위를 보이콧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아무 통보 없이 국조특위에 불참했다. 새누리당이 ‘대화록 실종’ 관련자를 고발했다. 검찰은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했던 당시 국정원장 김만복과 안보비서관 조명균을 출국금지하는 한편,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 사저에 가지고 갔다가 국가기록원에 반환한 ‘e지원’ 사본을 뒤지고 있다. 오늘 또 무슨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새로운 사실이 ‘폭로’될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확인된 사실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국회 열람위원들은 국가기록원에서 대화록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끌어낼 수 있다. 국가기록원에는 과연 대화록이 없는 것인가? 만약 정말 없다면 왜 없는가? 누가 일부러 없앴는가, 아니면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멸실되었는가? 만약 고의로 없앤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 중에 누군가 그렇게 해야 할 동기를 가지고 있었을까? 삭제하거나 멸실되었다면 다시 복원할 수 있는가?

 

아직은 누구도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 언론보도와 인터넷에 나도는 말들은  억측이거나 근거가 불확실한 추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있든 없든, 그것이 어디로 갔든, 대화록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은 그냥 묻어버릴 수 없는 중대한 의제들을 제기했다. 이 연재에서 나는 그런 중요한 의제들에 집중할 것이다. 오늘은 ‘법치주의’를 의제로 삼았다.

 

연재 첫 회분에서 나는 정문헌 의원을 ‘정치적 확신에 입각해 국가기밀 누설 범죄를 저지른 최초의 방화범’으로 규정했다. 정문헌 의원은 ‘정치적 확신’을 가지고 법률을 위반했다. 그런데 그 확신을 만들어낸 ‘사실’의 대부분이 허위로 드러났다. 이럴 때 그 ‘정치적 확신범’이 해야 할 합당한 일은 무엇일까. 그렇게 물었다. 내가 제시한 답은, 만약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허위 폭로를 한 잘못에 대해 경위를 밝히고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문헌 의원은 그럴 뜻이 전혀 없어 보인다. 따라서 나는 지금 시점에서는 그가 허위임을 알고서도 거짓 폭로를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국가기밀을 누설한 죄에 대한 처벌은 면하지 못할 것이다.

 

대화록 전문을 ‘최초 공개’한 김무성 의원

 

오늘의 주인공은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다. 2012년 12월 14일, 대통령 선거를 닷새 앞둔 날이었다. 당시 언론은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이날 부산유세에서 ‘격돌’했다고 보도했다. ‘격돌’은 어디까지나 문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청중을 향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다. ‘격돌’은커녕 옷깃도 스치지 않았다. 부산 서면은 넓다. 박근혜 후보는 서면 금강제화 앞에서, 문재인 후보는 큰길 건너편 주디스태화 앞에서 유세를 했다. 이날 박근혜 후보 유세에서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비를 맞아가면서 울분에 찬 열변을 토해냈다.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노무현 김정일 간 대화록을 최초로 공개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동안 외국정상의 북측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북측의 대변인 변호인 노릇을 했고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NLL공세는 논리도 없고, 남측에서는 이것을 영토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헌법문제라는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헌법 문제가 절대 아니다. 얼마든지 내가 맞서 나갈 수 있다. 5년 내내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입장을 갖고 싸워왔고 북측입장을 변호해왔다. 분명히 이야기 하는데 방코델타아시아 문제는 미국의 실수인데 북측보고 풀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당하다는 것 다 알고 있다. 제일 큰 문제는 미국이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가 반성을 하지 않았고, 오늘날 패권적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저항감도 가지고 있다. 작전계획 5029요구하고 있는데 못한다고 없애버렸다. 우리가 경수로 짓자고 말했다. 보고서 써내라고 말했다.” 여러분 잘 들었습니까. 노무현이가 김정일에게 가서 한 말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 앞에 이 내용을 낭독하면서 북받쳐서 제대로 읽지를 못했습니다. 남측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문재인이었습니다. 문재인이가 노무현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10년 전에 30%의 지지율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문재인에게 30%의 표를 주겠습니까. 친북 좌파세력이 정권을 잡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자들은 이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다. 2012년 12월 14일과 15일 포털사이트 뉴스 검색을 해보면 기사가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발언 내용은 <민중의 소리>가 당시 찍어둔 영상을 뒤늦게 찾아내 2013년 6월 26일 보도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정문헌 의원의 최초 폭로를 능가하는 엄청난 발언이었다. 나중 국정원이 대화록 전문을 공개한 덕에 우리는 그가 낭독한 것이 발췌본이 아니라 대화록 전문에서 뽑아낸 것임을 확인했다.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읽은 문장은 국정원 발췌본에 없고 전문에만 있는 문장이다. 어법과 표현방식이 노무현 대통령의 평소 습관 거의 그대로였다.

 

김무성 선대본부장은 대화록 전문을 직접 열람했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그 전문을 읽고 거기서 발췌해 작성한 메모를 그대로 낭독했다. 이날 발언 내용 그 자체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박근혜 후보 선대본부 핵심인사들이 대통령선거 기간에 이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입수 열람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공개함으로써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후보에 대한 이념적으로 비방하는 선거전에 활용했다. 이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이 중대한 사실을 기자들이 왜 무시했는지는 뒤에 이야기한다.

 

박근혜 후보 선대위의 북풍(北風)공작

 

김무성 의원은 2013년 6월 26일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회의에서 대화록 유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벌써 이십년 가까이 ‘소장개혁파’로 일컬어지고 있는 남경필 의원은 이 회의에서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가 적절치 않은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김무성 의원은 남경필 의원을 야단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뷰스앤뉴스>가 회의 참석자들을 취재해서 보도한 내용이다. 김무성 의원은 나중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보도한 기자들을 고소하지도 않았다.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다 입수해서 읽어봤다. 그걸 몇 페이지 읽다가 손이 떨려서 다 못 읽었다. 그 원문을 보고 우리 내부에서도 회의도 해 봤지만, 우리가 먼저 까면 모양새도 안 좋고 해서 원세훈에게 대화록을 공개하라고 했는데 원세훈이 협조를 안 해줘 가지고 결국 공개를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게 대선 때 공개가 안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대선 당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3시쯤 부산 유세에서 그 대화록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부짖듯이 주욱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기자들이 많이 와 있었는데도 그걸 기사화하지 않더라. 그때 기자들이 내 발언을 다 녹음도 했을 텐데 왜 그때 그게 보도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때 공개에 실패한 것이지, 결국 그때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걸 가지고 자꾸 절차적 문제를 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번에 확실히 이걸 강력히 밀고나가 진실을 가려야 한다.” 

 

2012년 12월 14일 부산유세에서 자기가 대화록을 최초 공개했다는 사실을 김무성 의원은 분명하게 확인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 총괄선대본부장 김무성이 대화록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선거판세가 혼미했기 때문이다. 선거법에 따라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기 직전이었던 12월 12일 많은 언론사들이 여론조사를 했다. 이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문재인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다 따라잡은 결과가 다수 나왔다. 게다가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이 터져서 여론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론들은 그날 오전 새누리당 당사에서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진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박근혜 후보 선대본부는 박빙의 선거를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북풍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법률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그 부담을 넘기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총괄선대본부장 김무성이 직접 총대를 맸다. 2013년 6월 26일 <오마이뉴스>는 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공개한 녹취록 내용을 보도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녹음한 사람은 월간지 기자였다. 그 기자는 만약 새누리당이 대화록을 공개할 경우 그것을 받아 특종보도를 할 기회를 얻기 위해 그 이야기를 듣고서도 기사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녹취록을 보면 201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박근혜 후보 선대본 종합상황실장 권영세는 이렇게 말했다.

 

“NLL 관련 얘기를 해야 하는데, NLL 대화록 있잖아요. 자료 구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거는 역풍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그거는 컨틴전시 플랜이고, 도 아니면 모고, 할 때 아니면 못 까지. 근데 지금 소스가 청와대 아니면 국정원이니까 대화록 작성하는데서 거기서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까고.

 

컨틴전시(contingency)는 ‘만일의 사태’라는 뜻이다. 이 시점에서 ‘만일의 사태’란 박근혜 후보의 낙선 말고는 다른 게 있을 수 없다. 권영세의 발언은 박근혜 후보 선대본부는 대화록을 입수했으며 그것을 선거에 활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나흘이 지난 12월 14일,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부산유세에서 대화록을 공개했다. 권영세가 말한 ‘컨틴전시 플랜’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박근혜 후보 선대본부는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후보를 ‘종북(從北)’으로 몰아 반북정서를 가진 보수층 유권자를 결집하고 중도성향 유권자를 흔들어 놓으려고 한 것이다. 하필 왜 부산에서 했을까? 부산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전문가들은 문재인 후보의 부산 경남 득표율이 40%를 넘기면 박근혜 후보가 낙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근혜 후보 선대본부는 문재인 후보 부산 경남 득표율을 30% 수준에 묶어 반드시 이기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전략적 요충지인 부산에서 ‘북풍’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인 설명이다.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이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일으켰거나 일으키려고 했던 ‘북풍공작’을 새누리당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시도한 것이다.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제 버릇 개 주기 어렵다.

 

브레이브 하트, 김무성

 

김무성 의원은 용감한 사람이다. ‘NLL 포기’를 주제로 한 이 거대한 연극에 출연한 모든 배우 중에서 그는 단연 용감한 인물이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등장한 멜 깁슨처럼,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감옥에 갈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 당시 그는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대화록을 보아서도 안 될 사람이었고, 더욱이 그것을 공개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김무성 의원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김무성은 1951년 부산 태생으로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온 5선 국회의원이다. 그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행운아였다. 아버지 김용주는 전남방직주식회사의 창업주였다. 아버지를 잘 만난 덕분에 스물여섯 살에 동해제강(주)이라는 회사 상무가 되었으며 서른두 살에 삼동산업(주) 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전두환 정권 때 김영삼을 찾아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홈페이지에서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주역이었음을 자랑한다.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등 당직자로 지내던 김무성은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 선대위 재정국장을 맡아 ‘돈 만지는 일’을 했다. 이런 일은 대통령 후보가 전적으로 믿는 ‘측근 중의 측근’이 한다. 김영삼 후보가 2등으로 낙선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던 김무성은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자당을 창당한 후부터 정치적 탄탄대로에 올라섰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내무부차관 등을 지낸 후 1996년 제15대 총선부터 부산 남구에서 내리 3선을 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해 ‘친박무소속연대’를 내걸고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귀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 불출마했지만 2013년 4월 부산 영도 재선거에 나가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나라당 시절 그는 사무총장, 최고위원, 원내대표를 두루 섭렵했으며 ‘친박좌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잠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근혜 후보는 그를 총괄선대본부장으로 기용함으로써 전폭적인 신뢰를 주었다.

 

김무성 의원은 대한민국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이다. 아버지 김용주는 일제강점기 경북도회 의원, 조선임전보국단 간부였다. 전쟁에 나간 ‘황군’에게 위문편지 보내는 운동을 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해방 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소위 ‘적산(敵産)’ 전남방직을 불하받아 부자가 되었다. 그 회사를 물려받은 김무성의 형 김창성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풍전등화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염창동 당사를 빌려주었고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에도 참여했다.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도 화려하다. 김무성 의원은 조선일보 방상훈 회장과 ‘내외종(內外從)’이다. 김무성 의원의 어머니가 방상훈 회장의 고모라서 그렇다. 김무성은 방상훈에게 고종사촌, 방상훈은 김무성에게 외사촌이다. 김무성의 집안은 현대그룹과 사돈이다. 김무성의 누나가 현대상선 현영원 회장과 혼인했다. 그 딸이 금강산관광 중단으로 5년 넘게 큰 곤경을 겪고 있는 현정은 회장이다. 김무성 의원이 현정은 회장의 외삼촌인 것이다. 처가도 만만치 않다. 김무성 의원의 부인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서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과 자유당정권 공보처장, 박정희 시대 국회의원 3선을 한 최치환의 딸이다.

 

‘가문의 영광’을 배경에 놓고 보면 김무성 의원의 용기는 더욱 돋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 되면 자기 자신을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기게 된다. 생각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면서 남의 비난을 듣거나 치명적 공격을 당할 수 있는 행동을 삼간다. 자기는 더 큰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무성 의원은 정반대로 갔다. 젊어서는 박해받던 야당 지도자 김영삼을 도우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4선 국회의원 경력을 바탕으로 당 대표, 대통령 후보에 도전하겠다는 야망을 품기에 손색이 없는 상황에서,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무거운 처벌을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박근혜 후보 유세차에 올라 ‘대화록을 낭독’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투철한 신념과 빛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나는 김무성 의원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태도만큼은 인간적인 면에서 높이 평가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멜 깁슨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정치드라마 ‘NLL전투’에서 김무성은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정치생명을 걸었다. 박근혜에게 대든 적도 있었지만, ‘친일-반공-보수세력의 총아’인 인간 김무성의 ‘대의(大義)’에 대한 충성심과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색한 침묵

 

박근혜 캠프의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2012년 10월 정문헌 의원을 불러 대화록에 대한 ‘구두보고’를 받았다.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그 경위를 이미 살펴보았다. 부산 서면 유세에서 대화록을 ‘최초 공개’ 하기 전에 정문헌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법적인 문제를 자문하기도 했다. 선대위의 다른 참모와 전문가에게도 물어보았을 것이다. 대화록 내용을 공개해도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준 전문가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김무성은 유세장에서 대화록을 ‘낭독’했다. 만약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낭독한 것이다.

 

그런데 기자들은 왜 보도를 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두 갈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폭로’에 관한 한 전적으로 신뢰해도 좋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2003년 가을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을 하면서 그는 강금실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친북용공세력이 국회에 침투한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막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된 나를 지목하면서 “유시민이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중국 북경 북대사관에 가서 이회창 후보 부친 관련 자료를 받아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수사를 촉구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단 한 번도 중국에 간 적이 없었다. 나는 여권과 출입국기록 등 근거를 제시하고 그 폭로가 사실이라면 내가, 사실이 아니라면 감무성이 책임을 지고 정치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김무성 의원은 제보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사과했다. 이런 ‘전과’가 있는 정치인의 ‘폭로’는 신뢰를 받기 어렵다.

 

둘째, 사실이라면 너무 엄청난 일이어서 기자들이 믿지 않았다. 정보보고가 올라갔지만 정치부장 등 언론사 데스크들이 기사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우선 대화록이 존재하는지 여부 그 자체가 그때는 확실하지 않았다. 존재한다고 해도 국회의원도 아닌 김무성이 그것을 보았을 리 없었다. 보았다고 해도 국가기밀을 선거유세장에서 공개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하겠다면 친한 기자에게 주어서 특종보도를 하게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면 처벌받을 위험이 줄어든다. 상식과 경험칙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아니면 말고’ 식의 정치공세일 뿐이다. 기자들은 그렇게 판단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2013년 6월 남재준 국정원장이 대화록 전문을 공개했다. 7월 국회 열람위원들은 국가기록원에 있을 것으로 믿었던 대화록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유세장에서 낭독한 대화록은 국정원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그렇게 판단하는 게 옳다. 그런데 그 당시 국정원은 대화록을 ‘2급 국가기밀’로 분류해 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군가 국정원이 보유하고 있던 국가기밀 문서를 유출했고, 박근혜 선대위가 입수했으며, 그 일부를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공개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범죄였다. 그때 국가기밀 누설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이제 온 국민이 인지하고 있다. 검사들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검찰은 즉각 이 중대한 범죄에 대한 ‘인지수사’를 시작해야 한다. 범죄자들을 색출해 재판정에 세우는 것이 검찰의 임무이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겠다는 일본 총리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한일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밀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누군가 그 대화록을 빼내어 야당 국회의원에게 주었고 그 국회의원이 대통령선거 유세장에서 그것을 읽었다고 하자. 새누리당이 가만히 있겠는가? 검찰이 가만히 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검찰은 대화록 유출하고 국가기밀을 공개한 범죄자들을 지켜보고만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게 아니다. 그 명백한 범죄행위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무리 봐도 어색한 침묵이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도 후보 시절 벌어진 이 국가기밀 누설 범죄에 연루된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궁금증이 있다. 선대위 종합상황실장 권영세와 총괄선대본부장 김무성이 다 본 것을 박근혜 후보는 보지 못했을까? 이것을 선거에 활용하는 문제를 참모들이 모의하면서 후보에게는 보고를 하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다고 하자. 혹시 후보에게 흙탕물이 튈지 모르니 우리끼리 후보 모르게 하자! 충성스러운 참모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대화록을 낭독한 유세현장에는 박근혜 후보도 함께 있었다. 들어보기만 해도 이것이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박근혜 후보는 나중에라도 대화록과 관련된 상황을 참모들에게 물어보았지 않겠는가?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다.

 

한 발 더 양보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고 하자.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는 자기의 핵심 선거참모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말이 없다. 모든 것을 국정원과 국회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대화록 문제와 관련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대선 당시에도 ‘NLL 수호’만 강조했고 지금도 ‘NLL은 피와 죽음으로 지킨 것’이라는 정치적 수사만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직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침묵해서는 결코 안 될 중대한 국가적 문제에 대해서 계속 침묵을 지키는 것은 때로 직무유기가 될 수 있다. “가장 잔인한 거짓말은 침묵 속에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법치’를 중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평소 소신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법치주의는 통치자를 구속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모두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높이 받들었거나 받들고 있는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들은 ‘법치’와 ‘법치주의’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법치주의’와 ‘법치’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법치’란 ‘법으로 다스리는 것’ 또는 ‘국민이 법을 잘 지키는 것’, 또는 ‘법을 어긴 국민을 처벌하는 것’이다. ‘법치’와 ‘법치주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이다. 법치를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기중심적 무지(無知)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악은 언제나 무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법치’는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독재자들은 권력 가진 ‘통치자(統治者)’가 ‘피치자(被治者)’를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법치라고 생각한다. 통치자 자신은 법의 구속을 받지 않으며 오로지 피치자만 법에 구속된다. 이사와 상앙 등 춘추전국시대 법가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왕이 곧 법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법치가 아니라 ‘인치(人治)’, 권력 가진 자가 자기가 만든 법으로 제멋대로 다스리는 자의적 통치일 뿐이다.

 

‘법치’는 법이 통치자와 피치자를 모두 구속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법으로 피치자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법이 통치자와 피치자 모두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통치자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통치자는 비교적 손쉽게 법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다. 이럴 때 법은 ‘큰 고기만 빠져나가는 촘촘한 그물’이 된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남재준 국정원장, 김무성 국회의원 같은 ‘큰 고기’는 ‘피라미만 걸려드는 촘촘한 법망(法網)’을 비웃고 있다.

 

‘법치주의’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다. 피치자로 하여금 법을 지키게 하는 것은 ‘법치’나 ‘법치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인류역사에서 언제나 통치자는 피치자를 법으로 구속해 왔다. ‘법치’와 ‘법치주의’는 피치자가 아니라 법망을 만들고 그 법망으로 그물질을 하는 통치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든 이념이다. 국가권력을 가진 사람의 자의적인 통치를 막기 위한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 우리에게 ‘법치주의’는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통치하거나 법을 무력화해서 시민을 부당하게 괴롭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파괴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서 일했거나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찰은 정문헌, 김무성, 권영세, 남재준 등 국가기밀을 유출하고 누설하고 정쟁에 악용한 ‘범죄 용의자’들을 눈감아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도 이 범죄와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에 대해서 오직 침묵으로만 대응한다. 만약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을 통해 이 범죄자들을 수사하고 기소하도록 검찰을 지휘해야 한다. 그들의 행위가 범죄 구성요건을 충족하는지 여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법치주의’를 숭상하는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조처이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그들을 고발해야 한다. 검찰이 그들을 기소하지 않는다면 재정신청을 해서 법원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 판사들이 범죄 구성요건 충족 여부를 살펴서 범죄가 성립했다고 판단하면 그들을 기소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는지 여부, 국가기록원에 대화록을 남겼는지 여부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국가기밀 누설 범죄 성립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국정원이 보유한 대화록을 유출하고 누설하고 선거에 악용한 자들은 남김없이 처벌해야 비로소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가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의 수호자로서 그렇게 할 책임이 있다.

 

김무성 의원은 일찍이 독재자들이 애호했고 새누리당 정치인과 그 당 소속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좋아하는 ‘법치주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볼 좋은 기회를 주었다. ‘브레이브 하트’ 김무성 의원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