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처음에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소책자를 출판하려고 했지만 여러 고민 끝에 온라인에 연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날마다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몰랐던 사실이 드러나는 중이다. 책으로 내면 그런 것을 반영할 수 없다. 둘째, 조만간 2007년 남북정상회담과 노무현 대통령의 NLL 관련 입장에 대해 정확한 사실을 토대로 책이 나올 예정인 것으로 안다. 핵심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쓴다면 내가 쓰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매주 화요일 내 홈페이지 ‘자유인의 서재’에 한 꼭지씩 글을 올릴 예정이다. 언제까지 연재할 지는 미리 정하지 않았다. 시리즈 제목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이며 꼭지마다 일련번호를 붙인다. 1번 첫 꼭지 제목은 ‘정문헌 의원의 착각 또는 거짓말’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것이다. 누구나 익명으로 글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올릴 수 있으며 마음대로 글을 퍼가도 좋다. 그러나 심한 욕설이나 타인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는 댓글은 삭제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욕설이 정 하고 싶으면 트위터나 다른 게시판을 활용하면 되니까. 개인 홈페이지에 쓰레기를 투척하는 행위까지 표현의 자유라고 인정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나는 글 쓰는 일로 먹고 사는 시민으로서 이 글을 쓴다. 정계은퇴 했다더니 왜 정치적 발언을 하느냐고 묻지 마시라. 정치 참여는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한 권리이며 정치 현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말하는 것은 시민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정치 참여 방법이다. 나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두었을 뿐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헌법적 권리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문필업에 종사하는 지식인으로서 내게 주어진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를 적극 행사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 작정이다. 다시 직업정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나는 나를 위해서 내 생각을 쓴다.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 또는 노무현 대통령을 대신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이나 집권 새누리당 정치인들, 조중동을 비롯한 친정부 언론사의 논객들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라는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어느 대학에서 대입 논술시험 문제를 이렇게 냈다고 하자. “대화록에 드러난 남북 정상의 기본적인 견해 차이와 합의 내용, 그리고 그것이 NLL 등 기존의 군사경계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논하시오.” 박근혜 대통령, 정문헌 의원, 김무성 의원, 서상기 의원 등 정부여당 핵심 관계자들과 조중동의 논객들이 지금까지 주장한 그대로 답을 썼다고 하자. 누가 논술 채점을 맡더라도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유는 점잖게 말하자면 ‘텍스트 자체에 대한 오독(誤讀)’, ‘컨텍스트(context, 맥락)에 대한 자의적 해석’, ‘논점 일탈’ 등이 될 것이다. 품위를 버리고 말하면 ‘독해문맹(讀解文盲), 텍스트를 읽고 적절하게 해석하는 지적 능력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여론을 좌우하고 있으니 상식을 가진 선량한 시민으로서 화가 나고 속이 상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속상한 사람들끼리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서!

문서를 열람해도 싸움은 계속된다

10명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성남시에 있는 국가기록원의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 작업에 들어갔다. 법률에 의해 최소 15년이 지나야 공개할 수 있도록 해둔 노무현 대통령 지정기록물의 봉인이 갓 5년이 지나 풀리게 된 것이다. 국회는 관련 법률이 요구하는 의결절차를 거쳐 지정기록물을 열람할 권한이 있는 만큼 법률적인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일인지는 토론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야 열람위원들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하여, 특히 NLL과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남겨둔 모든 기록물을 다 열람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서는 2007년 10월 3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약 4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인데, 이것은 국정원이 이미 공개해 버렸다. 열람위원들은 이 대화록과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는 대화록이 일치하는지 여부도 살펴볼 예정이다. 그런데 7월 17일 열람위원들은 대화록 원본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찾기는 찾을 것이다. 만약 참여정부 청와대가 통째로 넘겨준 ‘e지원 시스템’을 국가기록원이 토막 쳐 보관하는 바람에 검색이 잘 되지 않는 게 원인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이 ‘e지원 시스템’을 복사해 봉하마을 사저에 가지고 갔다가 돌려주었던 하드디스크라도 뒤져 보아야 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팜스’라는 자기네 자료 보관 시스템뿐만 아니라 그 하드디스크에 든 문서까지 손을 댄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열람 후에 여야가 합의한 내용만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이용해 공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합의가 지켜질 가능성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당을 합칠 가능성과 비슷하다. 여야 열람위원들 가운데 누구라도, 여야합의는 없었지만 국익과 관련하여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임의로 발췌한 내용을 국회 의정단상을 활용해 공개적으로 발설해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10개월 동안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싸고 상식을 짓밟는 폭로전과 비방전이 벌어지는 장면을 이미 싫도록 보았다. 그 싸움은 자료 열람이 끝난 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초의 방화범, 정문헌

최소 15년은 유지되어야 할 대통령 지정기록물의 봉인을 불과 5년 만에 해제하는 오늘의 사태는 ‘방화로 시작된 대형 산불’이다. 작정하고 불씨를 던진 방화범은 새누리당 정문헌 국회의원이었다. 그가 여기 저기 불을 지르고 다니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불을 질렀다. 기름통을 들고 다닌 사람도 있었다. 정문헌 의원이 최초로 불을 낸 것은 2012년 10월 8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국정감사장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소위 ‘남북정상회담 NLL포기 발언’을 ‘폭로’한 것이다.

그런데 정문헌 의원은 단순히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고 그가 주장한 발언’의 내용만을 ‘폭로’한 것이 아니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국가기록원에 봉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유출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폭로’한 셈이었다. 아울러 대화록을 열람할 합법적 권한이 없는 자신이 대화록을 열람했다는 사실까지 함께 ‘폭로’했다. 국회의원 면책특권 덕분에 처벌받을 염려는 없었지만,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공개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문헌 의원의 ‘폭로’는 ‘대화록의 진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는 국회 속기록이 아니라 그날 <연합뉴스> 기사를 인용한다. 정치부 기자들은 후각이 남달리 예민하다. 전체 발언 가운데 정쟁을 부추기고 여론의 동요를 일으키는 데 위력이 큰 것을 정말 잘 골라낸다. 정문헌 의원의 발언은 다음과 같은 정치부 기자의 ‘발췌본’으로 만들어져 국민에게 전해졌다.

지난 2007년 10월3일 오후 3시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정상은 단독회담을 가졌다. 당시 회담내용은 녹음됐고 북한 통일전선부는 녹취된 대화록이 비밀 합의 사항이라며 우리측 비선라인과 공유했다. 그 대화록은 폐기 지시에도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에 보관돼 있다. 대화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NLL(북방한계선)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따먹기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며 구두 약속을 해줬다. 이는 북한 국방위 정책국 대변인이 지난달 29일 ‘북방한계선 존중을 전제로 10ㆍ4 선언에서 합의된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박근혜의 떠벌임이나 북방한계선 고수 주장은 남북 공동합의의 경위와 내용을 모르는 무지의 표현’이라고 말한 10ㆍ4 공동선언의 경위와 내용이다. 대화록에는 북핵문제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이 ‘내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북한이 핵보유를 하려는 것은 정당한 조치라는 논리로 북한 대변인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북한이 나 좀 도와 달라’고 말했다. 또 주한미군 철수 문제와 한반도 통일 문제 등에 대한 김정일의 발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동의를 표하는 내용뿐 아니라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 발언은 결국 9개월 후인 2013년 6월, 비밀정보를 취득하고 관리하는 일을 본업으로 하는 국가정보원이, 남재준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비밀기록인 대화록을 공개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비밀을 보호 관리하는 게 본업인 국가정보기관이 스스로 비밀기록을 공개한, 세계 정보기관 역사에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희귀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법률과 상식보다 ‘국정원의 명예’를 중시한 남재준 원장의 ‘결단’ 덕분에 누구나 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열람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정문헌 의원의 ‘최초 폭로’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사실이며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닌지 알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문헌 의원의 ‘최초 폭로’는 대부분 허위였으며 일부는 왜곡이었다. 사실 비슷한 것이 조금 있기는 했다.

무엇보다 남북 정상이 ‘2007년‘10월 3일 오후 3시 단독회담’을 한 사실 자체가 없다. 오전 9시 34분부터 11시 45분까지, 오후 2시 30분부터 4시 25분까지, 두 정상은 양측 배석자를 두고 공식 정상회담을 했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북의 통일전선부가 만들어 우리 측 비선라인과 공유한 비밀 녹취록’이란 것도 아예 존재할 수가 없다. 공식 정상회담을 우리 측이 녹음해서 나중에 대화록을 만들었을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미국의 땅따먹기’,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 ‘북한 핵보유 옹호’의 대가로 ‘북한이 도와 달라’고 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 아니다. ‘주한미군 철수나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한 김정일의 발언에 동의한’ 일도 없었다. 이 모두가 허위였다.

대화록 전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비슷한 것이 두어 군데 있기는 했다.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서해의 안보군사지도 위에 평화경제 지도를 덮어씌우자” 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취지를 대충이라도 비슷하게 반영한 표현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북한이 핵보유를 하려는 것은 정당한 조치라는 논리로 북한 대변인 노릇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라는 말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 6자회담에서 핵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북측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웠다”는 말과 “외국 정상들과 만날 때 북 이야기가 나오면 대변인 변호인 역할을 했다”며 회담 분위기를 풀어나간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앞뒤를 잘라내 짜깁기한 것이다. 이런 것을 ‘작가들의 전문용어’로는 ‘거두절미(去頭截尾)’ 또는 ‘왜곡(歪曲)’이라고 한다.

정문헌 의원의 ‘최초 폭로’에는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왜 사실이 아닌 것을 ‘폭로’했을까? 만약 일부러 지어내지 않았다면 무엇인가 ‘문헌’을 보기는 보았을 텐데, 도대체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발췌 요약한 대화록일까, 아니면 대화록 전문이었을까? 누가 그에게 그것을 주었을까? 언제 어떤 경위로 본 것일까? 다른 누가 또 그것을 보았을까? 왜 사실이 아니면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말할 정도로 정문헌 의원은 그 ‘문헌’의 진실성을 믿었을까? 명탐정이 아니라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떠올리게 되는 의문이다.

 

‘확신범’ 정문헌, 그는 누구인가?

비록 내용의 대부분이 허위로 판명나긴 했지만, 국회의원 정문헌은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진정성’을 가지고 ‘국가안보와 국익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내용을 ‘폭로’했다. 그것은 ‘정치적 확신’에 입각한 행위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의 경력과 배경, 정치활동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게 판단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국회의원 정문헌의 지역구는 강원도 속초시와 고성군, 양양군이다. ‘공식적으로’ 정문헌 의원은 1966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아직 40대인 젊은 정치인이다. 그의 부친이며 새누리당 상임고문인 정재철도 같은 선거구 국회의원이었다. 사무직원과 부학장 등 부산여대에 재직했던 정재철은 박정희 장군이 5.16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직후 보건사회부 공보관으로 처음 공직에 진출했다. 대단한 친화력과 업무능력을 발휘해 출세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총애 덕분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게 사실인지 나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그런 말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정재철은 전매청차장과 재무부기획관리실장, 산업은행 부총재 등 여러 직책을 거친 다음 유신정권 막바지에는 한일은행장이 되었다. 그런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전두환 장군이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다음 예편해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헌법을 개정해 다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소위 제5공화국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새로운 집권당 민주정의당을 조직했을 때 정재철은 정계에 입문했다. 네 번 국회의원을 하면서 국회재무위원장과 예결위원장을 지냈다. 정재철은 2007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전두환을 “민의를 수렴하며 정도(正道)를 걸은 대통령”이라고 찬양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정문헌 의원은 2003년 정치에 입문하면서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2004년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엄청난 탄핵역풍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속초 고성 양양 유권자들은 정문헌을 선택했다. 2008년 재선에 실패한 후 2009년부터 2년간 이명박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통일비서관을 지냈으며 2012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런데 정문헌 의원의 성장과정에는 무척 특이한 면이 있다. 강원도 고성군은 공식 출생지일 뿐이다. 그가 태어난 1966년, 부친 정재철은 서울에서 잘 나가는 공직자였기 때문에 그가 실제 고성군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한국에서 대학을 가지 않고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책학 석사를 받았다. 그런 다음 한국에 돌아와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보통은 대학을 한국에서 마친 뒤 석사와 박사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가는데, 정문헌 의원은 정확히 반대경로를 걸은 것이다. 군복무는 ‘6개월 방위’를 했으며 사유는 ‘독자(獨子)’라는 것이었다. 그는 박사 학위를 딴 후 잠깐 동안 강원대학교와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를 했으며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이름을 올렸다가 곧바로 정계에 데뷔했다. 두 번 국회의원을 하면서 새누리당의 대북정책과 안보정책 관련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원래는 친이명박 성향이었지만 부친의 권유로 친박계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부자지간의 일이니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어떤가? 이 정도면 ‘진정성’을 가지고 ‘국익을 위해서’ 소위 ‘NLL포기 발언’을 ‘폭로’할만한 인물이 아닌가. 그는 ‘NLL전선(戰線)의 돌격대장’이며 ‘모사(謀士)’였다. 이 싸움은 ‘박근혜 대통령후보’나 ‘참모’들이 정밀하게 기획했다고 보기 어렵다. 박근혜 후보,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 권영세 종합상황실장 등 박근혜 캠프의 주요 인사들은 설계도 없는 공사현장에 끌려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끌어들인 인물은 시끄러운 싸움이 벌어진 무대 위와 아래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불을 지르고 다닌 정문헌 의원이었다. 그는 오로지 ‘국가의 안위와 국익만을 생각하면서’ 불법행위로 처벌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가 사실이라고 믿은 ‘NLL포기 발언의 진실’을 폭로했다. 그는 누군가의 하수인이 아니라 스스로 ‘거사’를 한 ‘확신범’이다. 나는 그렇게 판단한다.

 

정문헌 의원은 기밀누설 범죄를 저질렀다

2013년 6월 28일 <서울신문>이 정문헌 의원 인터뷰를 냈다. 여기에서 정문헌 의원은 대화록을 보고 발설한 경위를 주섬주섬 이야기했다. “10·4 정상회담 1주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비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상회담록을 가져오라고 국정원에 지시했다.” 정문헌 의원의 말이 옳다면 이때 이명박 대통령은 대화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 사실을 누가 말해 주었을까? 당시의 김성호 국정원장이었거나 따로 청와대에 줄을 댄 국정원 간부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는 정문헌 의원이 통일비서관이 되기 전이다. 그도 직접 본 게 아니라 누구에겐가 들은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어지는 발언을 보면 정문헌 의원의 기억력은 그리 믿을 만한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이때 NLL발언 등이 담긴 발췌록 보고서가 올라갔다. 작성 시점은 대화록이 2급 비밀 공공기록물로 낮춰진 시점을 고려하면 2009년인 것 같다. 내용을 보고 노한 이 대통령이 원본을 요청했고 보고에 앞서 비서관 신분으로 일독했다.”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10.4공동선언 1주년이면 2008년이어야 한다. 2009년이 아니다. 기자가 이 중요한 기사를 잘못 작성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문헌 의원이 자기가 대화록을 열람한 경위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것은 다음 대목이다. “이후 2010년에도 이 대통령이 발췌록 보고서를 재요청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용보고를 들어 숙지했다.” 결국 정문헌 의원이 본 것은 발췌본이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본 발췌본이 지난 6월 국정원이 공개한 바로 그 발췌본인지는 알 수 없다. 제3, 제4의 다른 발췌본이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비밀기록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대화록 전문과 발췌본은 1급비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 비서관은 1급비밀을 열람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정문헌 비서관은 발췌본을 열람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급비밀을 직접 열람한 게 아니라 취급인가도 없는 비서관을 통해 보고받은 셈이니, 이것도 ‘국격(國格)’ 추락이라면 추락이라 하겠다. 소위 대화록 발췌본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는 문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발췌록을 열람한 것이야, 대통령을 잘 모시려고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가자. 그러나 그것을 누설한 행위는 중대 범죄여서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정문헌 의원은 <서울신문> 기자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술술 풀어놓았다. “김무성 의원이 지난해 10월 선대위 총괄본부장이 된 직후 전화를 걸어와 만난 자리에서 내가 아는 대로 다 구두보고를 드렸다. 김 본부장은 부산 유세 전에 노무현 대통령의 NLL관련 발언을 유세에 써도 법적 문제가 없느냐고 확인을 요청해오기도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정문헌 의원은 청와대 통일비서관 시절에 본 비밀기록 내용을 박근혜 후보 총괄선대본부장 김무성에게 ‘아는 대로 구두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2012년 10월에는 이것이 심각한 기밀누설 범죄였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으로 덮을 수 없는 행위였다.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이 아는 것을 박근혜 선대위 종합상황실장이었던 권영세(현재 주중대사)가 몰랐을 리 없다. 김무성과 권영세의 범죄행위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게다가 김무성은 그 내용을 유세에서 말해도 되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정문헌 의원이 뭐라고 대답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2012년 12월 14일 부산 서면 유세에서 박근혜 후보도 듣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을 줄줄 읽었다. 그가 읽은 내용은 발췌본이 아니라 대화록 전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김무성은 어디에서 대화록 전문을 입수했을까? 박근혜 후보도 대선 기간에 대화록을 읽어보지 않았을까?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는 ‘합리적 의심’이라고 한다. 언젠가 어떤 경로로든 밝혀지고 말 것이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모든 것을 보았으리라고 추정한다. 일단 추정이다. ‘깨알 리더십’을 자랑하는 박근혜 대통령 아닌가? 경험칙에 비추어 그렇게 추정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정문헌 의원에게 행운이 있기를!

다시 정문헌 의원에게로 돌아가자. 그는 자기가 ‘폭로’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말했다. 전문이 공개된 후에는 해설집이라고 이름 붙인 소책자도 냈다. 그런데 열심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 작년 10월 8일 국정감사장에서 그가 ‘최초 폭로’한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원래 취지와 다르게 왜곡한 것으로 밝혀졌다. 왜곡한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2007년 10월 3일 오후 3시 두 정상이 단독회담을 했고 북의 통일전선부가 녹취록을 만들어 남의 비선라인과 공유했다”는 주장 그 자체가 허무맹랑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제 ‘정치생명을 걸고’ 책임을 져야 마땅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뽑아준 속초 고성 양양 유권자들이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의원직을 사퇴하는 게 옳은 일인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사과는 해야 한다. 국정감사장에서 한 ‘최초 폭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허위사실을 유포한 소위 해설집 소책자도 수거하거나 정정해야 한다. 왜곡된 발췌본과 흐릿한 기억력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 경위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사과하면서 앞으로는 더 신중하고 책임성 있게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하면 된다. 만약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고 보수표심을 결집할 목적으로 알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착각 때문에 본의 아니게 허위 폭로를 한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의지가 굳센 ‘확신범’이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자세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국정감사장에서의 발언은 면책특권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박근혜 후보 총괄선대본부장 김무성에게 ‘아는 대로 구두 보고’했다고 밝힌 것은 면책될 수 없는 범죄행위를 ‘자백’한 것이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왜곡되거나 허위인 대화록 내용을 발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 안다.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사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애국심 때문에 저지른 범죄라는 것을! 그것은 판사가 형량을 정할 때 참고해 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서는 검찰이 기소할 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형법상의 비밀누설죄 범죄구성요건을 충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정문헌 의원님, 행운을 빕니다.

2013년 7월 23일

자유인의 서재에서

유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