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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곽병찬 칼럼] 공주는 잠 못 이루고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2. 12.

등록 : 2013.02.11 19:14 수정 : 2013.02.11 19:14

곽병찬 논설위원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비밀을 밝히지 않는 이유를 공주는 묻는다. 시녀 류는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의 얼음과 같은 냉정함은 그저 겉모습뿐/ 정열에 불타는 그분을/ 당신은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아리아 ‘얼음장 같은 공주님의 마음도’) 류는 위병의 칼을 뽑아 제 가슴을 찌르고 숨진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붙은 별명 얼음공주의 원전이기도 한 이 장면은 지금도 수수께끼다. 완결인가 미완성인가. 주인공을 칼라프 왕자와 투란도트 공주에서 시녀 류로 전복시키는 걸 보면 미완성이다. 그러나 이처럼 전복적인 전환과 파국은 어떤 오페라에도 없고, 그로 말미암은 충격과 감동도 없다. 그런 점에서 전근대의 틀을 벗어버린 대단원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면 푸치니의 생각이 궁금한 후세의 작곡가들은 그 이후를 어떻게 써 내려갈까. 극적인 반전과 해피엔딩인가, 아니면 비극인가.

 

투란도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오로지 두 세대 전 통치자 로링 공주가 외적에게 당한 능욕에 대한 복수심이다. 그의 의식은 로링 공주 시절의 거대한 증오의 묘지에 잠든(‘먼 옛날 이 궁전에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성들의 불안은 안중에도 없다. 주변국 왕자들에 대한 복수뿐이다. 그래서 사랑을 알게 되면 마음이 풀릴까, 공주의 사랑과 결혼을 간절히 바란다. 백성과 황제의 끈질긴 요청에 공주는 이런 꾀를 냈다. 왕가의 혈통으로 3가지 수수께끼를 풀면 혼인할 것이요, 못 풀면 참수!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나서기 전 이미 12명의 왕자가 참수당했다. 그러나 그는 간단하게 풀었고, 공주는 혼란에 빠진다. 수수께끼는 복수의 함정일 뿐, 혼인을 위한 절차가 아니었다. 상징적이지만, 수수께끼는 그의 신비와 그를 가린 베일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은 그 속에서 공주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공주는 몸부림치지만, 칼라프는 공주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확신(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한다.

 

박근혜 당선인의 취임식, 임기 시작이 다다음주로 다가왔다. 그 어떤 당선인보다 긴 시간이었다. 현직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기간이었지만, 그에게는 이렇게 힘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이동흡 사태, 김용준 총리 지명자 낙마에다, 내각의 틀은 아직도 못 내놨다. 그사이 주요 선거 공약들은 뼈대가 흔들리고, 그의 생명과도 같았던 신뢰는 무너져내렸다. 인수위원회 등 각종 회의체는 오로지 그의 입만 바라보는 뇌병변 장애를 보였다. 무엇보다 그동안 그를 감쌌던 모든 포장은 벗겨졌다.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할머니 때 증오의 묘지에 갇힌 투란도트의 의식처럼, 그 역시 유신 체제에 밀봉돼 있었다. 청와대 안보실장과 경호실장을 육군 대장 출신으로 기용한 것이나, 누르면 뭐든지 내놓는 자판기 법조인만 선호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오랜 세월 익숙해진 몇몇 ‘상시’ 이외에는 누구와도 생각을 나누지 않고 의견도 구하지 않는다. 자신이 꾸민 비밀의 방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거기에 틈을 내려는 이는 가차없이 파문한다. 그가 누구와 만나 수다를 떠는지,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눈물을 보였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온통 비밀뿐이다. 그러니 무덤에 유폐된 아비가 꾸던 꿈만 도드라져 나온다. 그의 역량, 자질이 거의 모두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반면 관심, 감성, 인간관계 등은 더욱 깊은 베일 속에 가려졌다. 겉보기엔 완고한 그러나 속이 빈 허수아비는 참새들도 두번 세번 속이지 못한다. 들도 못 지킨다.

 

후세의 작곡가들은 대개 투란도트 공주가 결국 중오에서 사랑으로, 과거에서 현실로, 고립에서 관계 속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써 내려간다. 공주의 전존재를 뒤흔든 류의 죽음이 그 뿌리가 된다. “나의 사랑은 고문의 고통보다 크다오/ 저는 침묵으로 제 사랑을 보여드릴 겁니다// (침묵은) 당신의 사랑을 그분에게 보내는 길입니다”(‘가슴속에 숨겨진 사랑’) 박 당선인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