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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고건 "2007년 지지율 1위때 불출마 선언한건…"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2. 12.
[중앙일보] 입력 2013.02.12 01:09 / 수정 2013.02.12 19:37

공인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 시작하는 고건 전 총리
다섯 살만 젊었어도 대선 나갔을 것

국무총리 두 번, 서울시장 두 번, 장관 세 번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관료 세계에서 어지간해선 도달할 수 없는 ‘기록’들이다. 그래서 그에겐 ‘행정의 달인’ ‘최고의 재상’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고건(高建·75·얼굴) 전 국무총리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에서 노무현 대통령까지 그를 기용했던 7명의 대통령은 나라가 순탄하게 잘 돌아갈 때보다는 위기상황이나 비상 시국이었을 때 그를 가까이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공직에 나가고 다시 돌아오기를 일곱 번 되풀이했다. 그를 ‘우민(又民)’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다시 백성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7명의 대통령을 보좌하는 동안 30년은 공직에 몸 담았고, 20년은 민간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공직 인생에 대해 그는 지금껏 입을 열지 않았다. 공직자는 그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중앙일보를 통해 공인으로 살아온 50년 인생의 비화(秘話)를 털어놨다. "더 이상 공직이나 현실 정치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마다 부름을 받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거 하나는 제 특징이에요. 중앙과 지방을 세 번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니까 중앙에만 있던, 탁상에서 행정만 하던 사람과는 행정 감각이 다르다고 할 수 있죠. 또 하나는 민(民)과 관(官)을 일곱 번 왕복하면서 시각 조정을 또 해요. 이렇게 일곱 번 왕복을 하면서 말하자면 실사구시하는 행정 마인드가 생긴 거죠. 그런 행정 스타일이 소용 닿을 때가 있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불려 들어가고 문제가 해결되면 나오고 이렇게 반복한 거죠.”

 - 총리의 자격은 뭐라고 보십니까.

 “도덕성, 국민과 소통하는 능력은 필요조건이고. 헌법이 규정한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능력, 바꿔 얘기하면 국무를 조정하는 능력이 총리의 역할이자 자격이죠. 저는 국무조정 총리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역점을 뒀어요. 그런 국무총리의 역할을 보장해 주기 위해 헌법에 국무위원 인사제청권과 해임 건의를 인정하고 있어요.”

 -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셨나요.

 “김영삼 대통령이 한보 사태를 수습할 역할을 나한테 맡기면서 총리를 제의했을 때 제가 조건으로 장관 해임제청권을 달라고 했어요. 노무현 정부 초대 총리를 맡을 때도 문서 제청서를 만들어서 장관 임명제청권을 행사했어요. 실질적으로 인선을 한 거죠.”

 정부 수립 후 총리를 두 번 지낸 인사는 모두 네 사람이다. 그중 김종필 전 총리와 고 전 총리가 대비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던 김 전 총리는 스스로 정당을 만들어 대권을 노렸던 정치인 총리다. 그에 비해 고 전 총리는 행정가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그도 한때 대권 출마를 염두에 둔 적이 있다. ‘재상’에서 ‘제왕’을 꿈꾼 것이다.

 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1월 그는 당시 이명박·박근혜·정동영·손학규 등 여야의 경쟁자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돌연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 그때 불출마한 이유가 뭡니까.

 “난 중도 실용개혁을 표방하고 대안 정당을 만들려고 했어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의원들에게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대안 정당을 만들자고 했는데 호응이 미약했어요. 당시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도 만났는데 (기성 정당을) 재건축하는 식의 새로운 신당을 만들자고 했어요. 그러나 문 의원은 (열린당의) 법통을 계승하는 리모델링 정도로 가자는 입장이었는데, 난 그러면 필패라고 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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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관을 극복해 가는 과정, 그게 정치 아닐까요.

 “난 호남 출신이기 때문에 천시(天時) 지리(地利) 중에 지리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천시가 맞아야 하는데 당시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보다는 보수의 잃어버린 10년, 영남의 잃어버린 10년의 정서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천시도 안 맞았어요.”

 - 대선 때 안철수 현상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안철수 후보는 천시도 좋고 지리도 좋았다고 봐요.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지 못한 제3 후보의 좌절이란 점에서는 나랑 공통점이 있는데 그 사람은 5년 후에 다시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난 5년 후인 지금은 75세가 됐거든요. 그때 다섯 살만 젊었어도 (대선에) 나갔을 거예요(웃음).”

 이 대목에서 그는 여태껏 공개하지 않은 뒷얘기를 소개했다.

 “뜻을 접고 나서 3일 동안 남도를 방황하다가 상경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특사로 보냈어요. ‘번의를 하고 다시 나와라’는 얘긴데 일종의 지지 표시란 말이에요. 근데 제가 고사했어요. 새 정치를 표방하는 사람이 DJ의 말 한마디로 기존 정당의 후보가 된들 그 체제 가지고는 당선이 어렵다고 봤어요. 공천권 지분이나 즐기는 직업 정치인이라면 나갔겠죠. 근데 난 직업 정치인은 아니잖아요.”

 -아쉬움은 없습니까.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미련 없이 결단을 내렸어요. ‘12월이 선거인데 왜 1월 초에 그만두느냐, 국민의 선택권을 보장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지만 질질 끌면 안 된다고 생각해 연초에 결정을 내린 겁니다.”

 -항간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대권의 꿈을 다졌다는 얘기가 나돌았었어요.

 “그건 반대예요. 탄핵 심의 기간 중에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이 ‘탄핵으로 의결이 되면 그때는 권한대행을 하는 현직 총리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얘기가 있습니다’라고 알려주더라고요. 일언지하에 노(NO)했어요. 내가 권한대행으로 국가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는 사람인데 누구한테 맡기고 내가 입후보를 하느냐, 말도 안 된다고 했지요. 그게 국가에 대한 의무이자 소명이죠. 그걸로 인해서 욕심이 생겼다. 그건 아니지. 욕심이 있었다면 그전부터 있었죠.”

 -대통령의 꿈이 있었나요?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고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37세 때 전남지사로 발탁해 고속 출세의 기반을 마련해 준 이가 박 전 대통령이었다. 내무부 시절 새마을운동의 주무국장인 지방국장을 맡아 초기 새마을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 10·26 땐 박 대통령 장례식을 치렀는데요.

 “총무처 장관이 공석인 상태에서 10·26이 났어요. 그러니까 행정수석인 내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죠. 국장을 치르고 서재를 정리해 유족에게 남길 거, 총무처에 넘길 거, 각 부처로 보내줄 거를 정리하고 제가 ‘모두 죄인 아니냐. 일괄 사표를 내자’고 해서 일괄 사표를 내게 됐죠.”

 - 당시 박근혜 당선인과는 자주 만났나요.

 “그때는 큰 영애를 만날 기회가 없었고요. 그 전에 전라남도 도지사를 할 때인데 새마음운동 총재 자격으로 전남을 방문해 만난 일이 있어요. 그러고는 국회의원 하실 때 테니스를 한 번 쳤어요.”

 - 박근혜 정부의 시대적 과제는 뭘까요.

 “(박 당선인이) 스스로 내세운 대통합과 민생이죠. 그런데 통합을 위해서는 탕평인사도 중요하지만 국정을 통한 일상적인 소통이 중요합니다. 고령화 사회로 들어가면서 저성장 경제에 복지 수요는 많고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민생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걸 이끌어 가려면 사회적 대타협, 국민적 합의가 필요해요.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내려면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갈림길이라고 느꼈던 적은 .

 “(96년 총선을 앞두고) 명지대 총장으로 있을 땐데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티타임을 하자더니 ‘전국구 위 순위를 줄 테니 같이 정치를 하자’고 해요. 그때 박찬종씨는 영입됐고 이회창씨는 아직 영입 결정이 안 됐을 땐데, 총장 임기가 남아 있어서 제가 고사했어요. DJ는 (95년) 1기 민선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로 오라는 제안을 했어요. 권노갑씨가 두 번이나 사무실로 왔는데 다섯 가지 이유를 대 사양했어요. 나 대신 조순씨가 후보가 됐죠. 그때 받아들였더라면 아마 직업 정치인이 됐을 거예요. 그게 두 번의 갈림길이야.”

 -결국 YS 정부에서 총리, DJ 정부에선 민선 2기 서울시장을 하셨는데.

 “그땐 받아들일 여건이 됐죠. YS나 DJ나 한 번씩은 거절했고 한 번씩은 받아들였죠 .”

 - 평생 공인으로 살아왔는데 후회는 없습니까.

 “공직자로 30년, 공인으로 50년을 살았어요. 지금도 지하철 타서 많은 승객이 이용하는 걸 보면 ‘그때 내가 2기 지하철을 만드느라고 이렇게 했지. 아, 이게 공인의 보람이다’ 그런 생각을 해요.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보람을 찾았으니 공인으로서의 생활에 회한은 없어요.”

이정민 정치부장

◆ 고건 전 총리는

▶1938년 서울 출생(75세) ▶경기고·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고등고시(13회) 행정과 합격 ▶75년 전남지사 ▶80년 교통부 장관 ▶81년 농수산부 장관 ▶85년 국회의원 ▶87년 내무부 장관 ▶88년 서울시장 ▶94년 명지대 총장 ▶97년 국무총리 ▶98년 서울시장(민선) ▶2003년 국무총리 ▶2004년 대통령 권한대행 ▶2009년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