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식(common sense)

계사년 뱀띠 해 문화적 상징[중앙일보 뉴스클립]

by 부산중구마중물 2012. 12. 21.

[중앙일보] 입력 2012.12.20 00:11 / 수정 2012.12.20 00:11

 

뱀, 농경문화권에선 풍요의 상징 … 유목문화권에선 저주 대상

배영대 기자

 

 

2013 계사년(癸巳年) 뱀띠 해가 곧 밝아온다. 뱀에 관한 인식은 양면적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크다. 서양 기독교 『성경』속 뱀은 사탄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 전통 민속에서 뱀은 부정적이지 않다. 십이지신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것만 해도 그렇고, 무엇보다 불사와 재생,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뱀에 관한 다양한 문화적 상징을 살펴본다.

뱀 하면 으레 징그럽게 꿈틀거리거나, 소리 없이 발 밑을 스슥 하고 지나가는 섬뜩한 촉감이 연상된다. 무서운 독을 품고 날름거리는 혀, 사람을 노려보는 듯한 차가운 눈초리도 뱀에게서 먼저 떠오르는 형상이다. 언제 어디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뱀만큼 문화적 호오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동물도 별로 없다. 오늘날 일상생활에선 흉물로 배척당하지만 전통 민속에선 그렇지 않았다. 신적 존재로 신앙화됐다. 

# 불사와 재생의 상징

 

고대 농경문화권에서 뱀은 불사와 재생,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 존재로 신앙의 대상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현무도. 뱀과 거북이 어울리며 뿜어내는 신성한 기운은 고분벽화 중에서도 압권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중앙포토]

  

사찰에서 쓰이는 뱀 신 탱화. [사진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중앙포토]

 

고구려 고분벽화의 현무도에 뱀이 등장한다. 뱀과 거북이 서로 얽힌 채 서로의 눈길을 마주치고 있다. 이들이 서로 어울리며 뿜어내는 신성한 기운은 고분벽화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다. 주로 재생과 불사의 종교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풀이된다. 겨울잠을 자러 사라졌다가 봄에 다시 나타나고, 또 주기적으로 껍질을 벗는 뱀의 특징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가로국 김수로왕 등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뱀 이야기가 나온다. 죽은 이의 삶을 지켜주고 환생과 영생을 기원하는 신수(神獸)로 형상화된다.

 중국 신화에서도 뱀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전설상의 창조신으로 꼽히는 복희와 여와가 뱀으로 표현됐다. 복희와 여와가 상체는 사람이지만 하체는 뱀의 모습으로 서로 얽혀 있는 ‘복희여와도’가 전해진다.

 신라 토우에 그려진 뱀은 또 다른 상징을 드러낸다. 신라 토우에서 가장 빈도가 높으며 눈길을 끄는 것은 개구리를 잡아먹거나 쫓는 뱀의 모습이다. 이는 재생과 함께 풍요와 다산의 의미로 해석됐다.

# 부귀사(富貴蛇)로도 명명

 

신라 김유신장군묘 십이지신상 중 뱀 신 탁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중앙포토]
조선 정조대왕 때 활약한 이덕무(李德懋)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부잣집 광 속에는 구렁이 또는 족제비가 있는데 그것을 업(業)이라 이른다. 사람들이 흰죽을 쑤어 바치고 신처럼 대접한다.…(중략)…(이것이) 집 광 밑에 굴을 뚫을 것 같으면 곡식이 반드시 들어 있는 것보다 갑절이 더 들어올 것이다. 고로 부귀사(富貴蛇)라 한다. …(중략)…업이 달아나면 집이 따라서 망한다.”

 뱀의 일종인 구렁이를 가신(家神)으로 숭상했던 것이다. 가옥의 가장 밑바닥에 살면서 집을 지키는 신수인 뱀이 사람의 눈에 띄거나 꿈 속에서라도 밖으로 나가면 가정의 운수가 다한 것으로 여겨졌다.

 집안의 재산을 관장하는 뱀의 꿈은 대개 길조로 여겨졌다. 뱀에게 물리는 꿈, 뱀과 접촉하거나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은 재수와 재물이 따르는 좋은 꿈으로 해석됐다. 또 뱀은 남근의 상징으로도 간주돼 임신을 예언하는 태몽으로도 풀이됐다. 반면 뱀이 떠난다든가, 뱀을 죽인다든가, 그냥 기분 나쁘게 기어다닌다든가 하는 꿈은 재수없는 꿈으로 풀이됐다.

# 뱀 퇴치 민속도 전해

 

신라 김유신장군묘 십이지신상 중 뱀 신 탁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중앙포토]

 

 

우리 전통에 뱀의 부정적 이미지도 존재한다. 복을 기원하고 액을 막는 민속 가운데 뱀과 관련된 것도 있다. 정월 첫 뱀날인 상사일(上巳日)과 대보름에 행해졌다. 대개 뱀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상사일에는 머리를 빗지 않거나, 먼 길을 떠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경북 달성 지방에는 왼새끼를 꼬아 머리털을 묶고 약간 그을려서 “뱀치자, 뱀치자” 하고 외치는 풍속이 전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이삼만이라는 신(神)’이란 시도 뱀과 관련 있다. “이삼만 석 자를 많이 받아다가 집 안 기둥들마다 다닥다닥 붙여 두는데 / 그러면 뱀들이 기어올라 서다가도 그 이상 더 넘어선 못 올라온다는 신념 때문입니다”라고 읊었다.

 ‘이삼만(李三晩)’이란 이름만 붙여놔도 뱀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신통력 있는 글씨에 얽힌 일화를 미당은 묘사했다. 실제 전북 정읍 지역에서 정월 초순 상사일에 행했던 ‘배암뱅이(뱀뱅이, 뱀막이)’ 풍속에 관한 것이며, 이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뱀이 두려워하는 ‘李三晩’ 등의 글씨를 집 기둥에 붙였다고 한다.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7)은 정읍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명필로 알려졌다. 창암은 하나라 우 임금이 쓴 전서체인 ‘대우수전(大禹手篆)’을 글씨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우수전’은 우 임금이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올린 제문을 직접 전서체로 쓴 것인데, 악귀가 감히 근접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다. 또 이삼만의 아버지는 독사에 물려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창암은 뱀을 보기만 하면 껍질을 벗기어 통째 씹어 먹었기 때문에 이삼만 앞에서는 독사들이 풀이 죽어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악귀와 질병·재난을 멀리하고 안녕을 기원하는 뜻이 함축된 ‘대우수전’의 글씨체, 그리고 이삼만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일화가 복합돼 상징화된 풍속으로 볼 수 있다.

# 농경·유목 문화 차이

 

중국 창조신을 그린 복희여와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중앙포토]

 

 

멕시코의 마야문명권에서도 뱀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유카탄 반도의 치첸이차에는 ‘쿠쿨칸(마야어로 뱀이란 뜻)’이란 이름의 피라미드가 있다. 24m 높이의 쿠쿨칸 피라미드의 정상에 오르는 계단 입구 양쪽에 커다란 뱀 머리 조각을 세워놓았고, 뱀 몸통으로 상승하는 돌난간을 만들고, 꼬리로는 정상의 제단 들보를 꾸몄다. 멕시코시티 교외의 테오티우아칸 유적에도 목에 깃털을 단 뱀(’케찰코아틀’이라고 함)이 조각돼 있다. 이들에게 뱀은 하늘과 땅을 통합하는 신이었다고 한다.

 잉카문명권의 쿠스코와 에게문명권의 크레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등에서도 뱀 숭배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앙코르와트 유적은 주목할 만하다. 앙코르와트 사원의 측면 입구에 커다란 ‘나가(Naga: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 특히 코브라)’ 조각이 서있는데, 나가는 강과 비를 주재하는 앙코르와트 왕국의 최고신이었다. 전통적으로 벼농사를 지었던 크메르인들은 나가가 벼농사에 필요한 풀과 비옥한 땅을 선사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나가 신앙은 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에서도 발견된다. 드라비다족은 벼농사를 처음 시작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한반도 남쪽에 있던 가야가 그곳으로부터 벼농사 기술, 철기 문화와 함께 뱀 숭배 풍습도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뱀 숭배 전설은 농경문화와 관련이 있다.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문화는 다신(多神)을 섬기는 속성을 갖는다. 기독교·유대교·이슬람의 유목문화권에서 다신의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뱀이 인간을 꾀어 타락시키는 사탄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 유목문화권에서는 뱀이 저주의 대상이지만 농경문화권에서는 숭배의 대상으로 각기 문화권에 따라 다른 삶의 방식을 운영했을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신은 죽었다”고 외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아침놀』(박찬국 옮김, 책세상)에 남긴 말을 음미해볼 만하다. 니체는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는 정신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고 말했다. 이 구절에 대해 일본 작가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초역(超譯) 니체의 말』(박재현 옮김, 삼호미디어)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허물을 벗지 않는 뱀은 결국 죽고 만다. 인간도 완전히 이와 같다. 낡은 사고의 허물 속에 언제 까지고 갇혀 있으면 성장은 고사하고 안쪽부터 썩기 시작해 끝내 죽고 만다. 늘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고자료 ▶‘불사·재생의 뱀’(천진기 지음, 국립민속박물관 주최 ‘한·중·일 문화 속의 뱀’ 학술대회 발표문, 2012년 12월 21일 오후 2시 개최) ▶국립민속박물관 주최, ‘상상과 현실, 여러 얼굴을 한 뱀’ 특별전(12월 19일∼2013년 2월 25일) ▶『문화로 읽는 십이지 이야기-뱀』(이어령 책임편집, 열림원, 2011) ▶ 『문명은 디자인이다』(권삼윤 지음, 김영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