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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한-미 FTA 때문에 담뱃값 올리기 어렵다는데…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3. 17.

등록 : 2013.03.16 16:57 수정 : 2013.03.16 16:57

 [기획] 협정 체결 뒤 바뀐 법령 한국 66개·미국 8개
미국식 제도 한국에 그대로 이식하는 경제헌법…
공공정책 가로막히지만 정부는 경제 효과만 따져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1년 11월29일 청와대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개정법률 공포안에 서명하고 있다. 한-미 FTA로 바뀐 국내법 66개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1년 11월29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을 위한 개정법률 공포안에 서명했다. 일주일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한-미 FTA 비준안과 함께 날치기 처리한 법안들이었다. 법안 개정은 FTA 비준안 처리만큼이나 정부가 오랫동안 목매온 절차였다. 미국은 FTA가 발효된 뒤 1년 안에만 여유 있게 협정문에 맞게 관련 법령을 수정하면 됐지만, 한국은 발효 전까지 관련 국내법을 다 뜯어고쳐야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여 일 동안 미국이 손질된 한국의 국내법을 꼼꼼히 따져본 뒤에야 한-미 FTA는 공식 발효됐다.

 

 

김현종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

 

이렇게 오로지 한-미 FTA를 위해 바뀐 국내 법률은 23개에 이른다. 당시 법률이 1200여 개이던 것을 고려하면 국내 법체계의 대수술이라 할 만한 변화다. 여기에 시행령 16건, 시행규칙 18건, 고시·예규 9건을 더하면 한-미 FTA로 개정된 법령은 총 66개로 늘어난다. 정부가 한-미 FTA가 처음 타결된 2007년부터 발효 직전인 2011년 말까지 법령을 하나둘 손본 결과다. 개정된 법령 분야도 세제부터 지적재산권, 보건·의료, 방송통신, 독점 규제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반면 미국은 한-미 FTA로 바꾼 법령·규정이 8개뿐이다. 분야도 한국산상품 수입 절차 등을 바꾸려고 관세법이나 무역협정법을 고친 정도다. 양자 간 FTA를 체결했는데도 미국은 상품 교역 등에 관한 국내법만 일부 손질한 반면, 한국은 경제·사회 시스템을 대수술한 셈이다. 게다가 한국은 아직도 바꿔야 할 법령이 여럿 남아 있다. 단계적으로 개방 범위가 확대될 때마다 추가로 방송법, 약사법, 세무사법, 외국법자문사법 등을 개정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이 FTA를 국내법 체계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간단하다. 한-미 FTA 자체가 미국 제도를 한국에 이식하는 절차인 탓이다. 당연히 시스템을 통째로 이식받는 한국 처지에선 여러 준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실제 한국 쪽 협상 대표이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한-미 FTA를 가리켜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법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개정된 법령 개수만으로 협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주장대로 한국과 미국이 법체계가 다른 건 맞다. 성문법을 채택한 한국에서 FTA 협정은 기존 국내법에 우선한다. 한-미 FTA와 배치되는 모든 법률과 하위 규범은 별도의 개정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무효가 된다는 의미다. 반면 불문법인 미국은 FTA가 그 자체로 법이 되지 않는다. 이에 미국은 자국법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FTA 이행법을 별도로 만들어 협정 내용을 이행한다. 연방법이나 주법에 배치되는 FTA 조항이 있다면 자동 무효가 된다. 그러나 이런 법체계의 차이는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 법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이행법 제정

 

박균성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원장의 설명이다. “양자 간 협정을 체결할 때는 ‘상호주의 원칙’이 기본이다. 미국은 이행법률을 제정하며 한-미 FTA의 국내법적 효력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지만 우리는 무조건 비준 동의했다. 법체계와 상관없이 미국이 그렇게 국내법적 효력을 제한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결국 한국 정부가 앞뒤 재지 않고 한-미 FTA를 발효시키려다 국가의 고유 권한인 입법권 침해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법 개정으로 미국식 제도는 한국에 그대로 옮겨졌다. 대표적인 게 의약품 시판을 허가하는 절차와 특허권을 연계하는 제도의 도입이다. 국내 제약사가 미국의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권을 가진 의약품 복제약을 국내에서 판매하는 허가를 얻으려면,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 특허권자에게 통지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나마 2015년 3월부터는 특허권자가 특허 침해를 주장하면 일정 기간 허가가 정지돼 복제약 시판이 늦어질 수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는 기업이 소비자 피해 구제·예방 방안을 제출하면 위법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과징금 등을 면제해주는 ‘동의의결제’도 미국식 제도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손질된 법령도 많다. 정부는 법 개정을 통해 2천cc 이상 중·대형 차량에 부과하던 개별소비세 부담을 줄여주고, 승용차의 세율도 낮춰줬다. 미국의 자동차 수출업체에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다. 지적재산권 분야도 변화폭이 크다. 상표법 개정으로 상표의 범위에 소리와 냄새까지 포함됐다. 지금껏 소리·냄새 상표 등록을 제대로 해오지 않은 한국에 불리한 상황이다. 저작권과 저작권 보호 기간이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나 한국의 추가 로열티 부담도 가중됐다.

 

공공 영역은 축소됐다. 특히 ‘우체국 민영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정부의 우편 분야 서비스 영역이 쪼그라들었다. 국가가 독점해온 우편사업 범위가 축소된 것이다. 우체국 예금·보험에 관한 법률이 바뀐 탓에 새로운 우체국보험 출시는 불가능해졌다.

이처럼 한국의 시스템을 뒤흔드는 법령들이 시행된 지 1년 정도가 지났지만 효과나 부작용을 따져보기는 어렵다. 일단 변화된 제도의 영향을 측정하기엔 시행 기간이 아직 짧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충분히 흐른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캐나다 등은 조약 체결 뒤 인권영향평가

 

남희섭 변리사는 이렇게 비판했다. “상품이 오고 가는 문제는 한-미 FTA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중요한 건 미국이 한국의 공공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교역량 같은 경제적 효과만 따진다. 시스템 변화로 초래되는 사회·문화·경제적 분야에서의 문제를 수집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할 준비는 전혀 안 돼 있다. 반면 캐나다 등은 다른 국가와 FTA를 체결한 뒤 인권영향평가를 시행해 사회 전반에 대한 종합 평가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한-미 FTA로 정부의 행정권에도 벌써부터 상당한 제약이 생기고 있다. 공공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부의 권한과 기능이 서서히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 올해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던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의 연기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소비자가 탄소 배출이 적은 차량을 구입할 때 최대 300만원의 보조금을 주되 탄소 배출이 많은 차량을 살 때는 최대 300만원의 부담금을 매겨 온실가스를 줄이는 정책을 펼 계획이었다. 1515억원의 예산까지 책정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갑자기 제도 시행을 2015년으로 늦췄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가 지난해 8월 환경부 장관에게 “이 제도안은 한-미 FTA협정을 위반하는 금지된 무역 기술장벽이 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 대해 미 당국도 공감하고 있다”는 의견을 보내 압력을 넣은 게 주된 원인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2011년 재협상 때 “양국은 자동차 연비 또는 온실가스 배출에 관한 강제적 새 기술 규정을 마련할때 비효과적이거나 부적절한 경우 도입할 수 없다”고 합의한 내용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의 환경정책이 미국 자동차 업계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에 밀린 셈이다.

 

필사적으로 발효시킨 협정이 부메랑으로

 

제2의 저탄소 협력금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보건 정책으로 내건 금연정책도 그중 하나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월6일 “담뱃값을 인상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고,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아예 담뱃값을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인상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송기호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지난해 11월 한 토론회에서 한-미 FTA 협정 때문에 금연정책 시행이 어렵거나 시행하더라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미 FTA로 한국의 담배 관세율이 40%에서 2027년까지 0%로 내려가면 수입 담배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소비자가 비싼 국산 담배 대신 값싼 수입 담배로 갈아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가 담배의 포장·라벨 등에 담배의 실상을 알리는 조처를 하고 담배 광고를 금지하는 등의 노력을 하면 미국 투자자(담배기업)의 문제제기로 손해배상을 해줘야 할 위험도 높다고 지적했다.

 

“한-미 FTA는 지금까지 한국이 체결한 FTA 중에서 (구속력이)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한국에는 경제헌법과도 같다는 의미다. 환경정책이나 금연정책 등 공공정책이 가로막히고, 전기·철도 같은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우려가 계속 제기되는 건 이러한 한-미 FTA의 속성과 연관돼 있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의 지적이다. 정부가 필사적으로 발효시킨 한-미 FTA가 곧 부메랑으로 돌아와 정부의 손발을 자를 수 있다는 얘기다 .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