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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편집국에서] 불안한 시대의 불편한 개헌론 / 여현호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4. 15.

등록 : 2013.04.14 19:02 수정 : 2013.04.14 19:02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지난주 한반도는 긴장 상태였다. 북한은 급기야 개성공단의 조업을 중단시켰고, 금방이라도 미사일을 쏠 것처럼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대화 제의는 있었지만, 출구는 아직 안 보인다. 남쪽 진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료시설의 문을 닫겠다고 도지사가 팔을 걷어붙였다. 불안과 대치가 계속되는 와중에,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개헌을 논의할 기구를 국회에 만들기로 전격 합의했다. 지난 12일의 일이다.

 

여야의 합의는 그 무게만큼 여론의 주목을 받진 못했다. 당연하다. 그보다 큰 뉴스가 많았거니와, 개헌론이 금방 불붙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없이 지나갈 객담은 또 아니다. 개헌을 논의한다는 여야 합의 자체가 1987년 이후 처음이다. 1987년 개정 헌법에 대해선 기왕에도 그 한계가 자주 거론된 터다. 특히 정치권에선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여야에 두루 많다.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 전에 개헌 추진 의사를 밝힌 바 있고, 변화를 꺼릴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도 없으니 걸림돌도 없어 보인다. 그럼 다 된 것일까.

 

아직 첫발도 떼지 못했지만, 지금의 개헌 논의는 신발 한 짝을 잃은 듯 어색하고 불편하다.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가뭇없이, 양대 보수 정당이 주역을 자처하고 권력구조 개편만 주로 거론되는 것부터 그렇다. 흔히 ‘87년 체제’의 한계로는, 제도적 민주화에 성공했으되 실질적 민주화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 권력구조에선, 대통령 직선제라는 틀은 만들었으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키운 것이 대표적이다. 선거를 치를수록 지역 구도가 굳어지고, 분출하는 사회집단 간 갈등을 조정하는 데는 보수든 진보든 기존의 정당 체제가 실패한 점도 있다. 그런 한계를 지닌 여야 정당이 이런저런 권력구조 개편안을 들고나선들 그게 만병통치약이 되긴 어렵다. 되레 기득권 챙기기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이를 견제하고 함께 개헌을 논의할 시민세력은 여전히 미약하다. 실질적 민주화를 진전시키지 못한, ‘87년 체제’의 또다른 한계다.

 

불편한 이유는 또 있다. 개헌은 권력구조의 문제만은 아니다. 학계와 시민사회는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해 기본권 개념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의 침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근대적 권리 개념에서 나아가, 국가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받고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충족받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겠다. 복지 개념의 변화, 경제민주화, 소수자 보호 등이 그런 맥락에서 거론된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무색하게도 개헌론이 제기된 바로 이 순간, 노조의 존재와 적자를 이유로 공공의료기관을 폐쇄하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 항의하는 사람들을 막겠다고 경찰차로 벽을 쌓고, 조례를 날치기 처리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제적·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는커녕,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고 민주적 절차를 지키는 기본적 법치마저 무시한 꼴이다. ‘87년 체제’를 지키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지난주 신임 검찰총장은 검사들에게 “자유민주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대응”을 첫번째로 당부했다. 서울중앙지검장도 취임사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를 첫번째 할 일로 꼽았다. 경찰청장은 첫 수뇌부 회의에서 “안보 불안감”을 말했다. 대북 위기 상황을 앞세운 공안통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게 안보와 치안을 앞세우는 사회에선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쉽게 윽박지를 수 있게 된다. 유신시대가 바로 그랬다. ‘87년 체제’의 극복은 여기서 또 한가한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개헌 논의를 마냥 기대에 차 기다릴 수 있겠는가.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