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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장병윤 칼럼] 협동조합의 시대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23.

이달 '기본법' 시행, 공동체 우선하는 대안경제 시대 열려…자리매김 위해선

   
- 상호신뢰·배려 절실

스페인 북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17개국에서 9만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연간 30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스페인 역시 거친 파고에 휩쓸려 숱한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25%까지 치솟았지만,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건재했다.
그리스에 이어 유럽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소속 협동조합 120곳 중 단 한 곳만 파산했고, 일자리를 잃은 조합원은 다른 조합에서 100% 재고용했다. 이탈리아 북동부의 볼로냐 역시 협동조합 덕분에 경제적 위기로부터 한 발 비켜날 수 있었다. 에밀리아 로마냐주 주도인 볼로냐엔 400개 협동조합이 지역경제의 40%를 담당하고, 주요기업 50개 중에 15개가 포진해 있다. 협동조합에 바탕한 안정적 일자리는 지역실업률을 3%대 초반에 묶었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전국평균의 두 배나 된다.

유럽 경제위기가 지구 반대편의 한국 경제에까지 강력한 후폭풍으로 몰아쳤지만, 정작 위기의 현장에서는 협동조합 기업이나 협동조합 도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랜 전통을 가진 결속력 강한 협동조합이 완충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강한 것은 이윤 창출에만 급급한 일반 기업들과 달리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결사체로서 '1%의 탐욕'보다 99%의 삶을 중시했기에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온전하게 버텨낼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모든 시선이 대통령 선거판에 쏠린 가운데 우리의 경제질서와 생활방식을 바꿀 큰 변화가 다가왔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했던 협동조합기본법이 이달부터 발효됐다. 상법상 회사나 민법상 사단법인이 아닌 새로운 법인격, 연대와 협력의 상생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적 대안이 출현한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에게도 협동조합의 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다.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운영, 공동소유와 1인1표제, 공익을 추구하는 경제 결사체로서 협동조합은 전혀 새로운 기업 모델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근대적 협동조합의 역사가 유럽에 비해 일천하지만, 우리도 전통사회의 두레나 계(契)에서 협동조합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호혜와 교환 시스템에다 재분배 기능까지 아우른 두레는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미덕이었다. 두레는 과부의 노동이나 건장한 장년의 노동이나 같은 가치로 인정해 약자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실천했다. 계 역시 다산 선생이 '契者合也'라고 풀이했듯이 공동체의 합일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나라가 백성을 구제하지 못할 때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계를 조직했던 것이다. 계나 두레나 구성원들 개개의 이익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보완했다. 대동 세상을 꿈꿨던 전통사회의 계와 두레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의 협동조합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불확실성이 크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린 사회에서는 상호신뢰와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협동조합의 미덕이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의 탐욕으로 빈부의 차가 갈수록 커지고 무분별한 자연 파괴로 기후재앙이라는 문명사적 위기에 봉착한 이 시대에 협동조합은 대안으로서 가능성이 충분하다. 볼로냐나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들은 다양한 분야에 뿌리내리면서, 조합원들에게 삶의 질을 높여주고 창의성 있는 노동을 창출하는 모범을 보여 왔다.

협동조합기본법의 시행으로 생산과 소비, 유통, 일자리 등 사회적 문제를 주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빵집·커피점 협동조합으로 골목상권까지 초토화시킨 대자본의 탐욕에 대항하는 지역기업의 모델로도 가능하다. 주택난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일방적으로 공급된 대기업의 아파트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집을 실비로 지을 수 있는 주택건설협동조합도 기대해 봄 직하다. 그렇다고 협동조합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는 없다. 협동조합이 지속가능한 경제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지난할 것이다. 구성원들의 자립 확신,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 절실히 요청된다. 친기업적 정책이 난무하는 시장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엄중한 과제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시작은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