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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1933, 40, 051, 168 /김홍희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4. 10.

동구 168계단처럼 수수께끼 같은 숫자 의미 담아 활용하면 좋은 관광상품 돼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2013-04-09 20:48:35
  • / 본지 26면
   
깡마른 사내가 염소의 뒷다리를 쥐고 그 가늘디가는 목을 반들반들한 바닥에 거꾸로 세워둔 V자 모양의 피묻은 나뭇가지에 척하니 걸치면, 몸무게가 족히 120㎏은 더 나갈 것 같은 검은 사내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힐끗. 안으로 굽은 반월도가 염소의 목에 닿기도 전에 터지는 사람들의 비명.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 몸통 잃은 염소의 허망한 눈빛이 '툭'하고 떨어지는 인도 꼴까따의 칼리 사원. 사원 벽에는 붉은 히비스커스가 염소의 달아난 모가지 수만큼 장식되고, 사람들은 붉은 꽃 한 송이 무게인 염소의 목숨, 도살을 관광한다. 나는 도살하는 장면 대신 벽에 장식된 수많은 붉은 꽃을 찍어 전시했다. 제목은 '꽃이 피다'. 한국말이 아니면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중의적 제목이다. 이런 지랄 맞은 재수가!

무슨 간첩 난수표도 아니고 1933, 40, 051, 168이 뭐지? 어지간한 상상력으로는 이 숫자들의 연결 고리를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브랜드의 특징은 간단명료다. 빙산의 일각처럼 단순해 보여야 하고, 내밀한 세계는 캘수록 맛이 깊어야 한다. 그러면서 중의적이어야 한다. '꽃이 피어나거나 꽃=피'여야 한다. 부산에 개인이 경영하던 051이라는 사진전문 갤러리가 있었다. 그것도 한국 최초로. DDD(장거리 직통 전화) 번호로 보면 '부산=051' 등식이 성립한다. 10여 년 전 세상의 화두는 디지털이었다. '0'과 '1'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시기였다. 그 사이의 '5'는 다섯이라는 한자음 '오(五)'와 우리라는 뜻을 가진 '오(吾)'와 음이 같다. 감 잡았겠지만, 부산의 우리가 디지털 시대 사진을 선도하겠다는 것이다. 부산이 디지털 사진의 발신지라는 뜻을 담았다.

051은 10여 년 전 내 작업실 이름이고, 지금 이름은 '6층'이다. 영어로는 '6th story'. 일주일이 7일의 순환이라면 6일은 인간이 창조된 날이다. 내 작업실이 건물의 6층에 있다는 뜻과 동시에 여섯 번째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 시대를 표방하고 인간이 노는 공간을 말한다. 숫자에 이렇게 생각을 담을 수 있다. 1933은 상해의 도살장 라오창팡의 상징어이다. 보통 '1933 라오창팡'이라고 부른다. 1933년에 영국인 건축가가 지은 도살장의 이름이다. 1934년부터 도살장으로, 1970년 이후에는 창청생화학제약공장으로 사용되다가 2002년 사용 중지 후 4년간 방치되었던 곳이었다. 그것이 2006년 우수 역사 건축물로 지정되고 '1933 크리에이티브 센터'로 거듭났다.

이 도살장이 예술촌으로 바뀌었는데, 사람들은 도살장으로 가는 소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스스로 소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하는 희한한 경험을 한다. 도살장을 폐쇄하거나 부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해 사람들의 생각의 깊이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억겁을 넘어 윤회하는 존재라면 전생에 소 아니었던 적이 어찌 없었을 것이며, 한 나라의 왕이 아니었던 적이 또 어찌 없었을 것인가. 소와 사람과 전생과 현생을 관통하게 하는 1933 라오창팡은 도살장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아졌다.

여기까지 왔으니 '40'하면 부산 사람들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옳거니! '40계단'. 전쟁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고 지금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공간으로 그 가치 매김을 한 것이 바로 40계단이다. 그리고 40계단은 그 계단의 수 이상으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933은 상해 사람들의 발상이고 40은 우리들의 역사다. 1933이나 40은 역사가 나름 길다. 그리고 공적이다. 051은 역사도 짧고 사적이다. 그러나 부산에 사는 한 예술가의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절이 지나면 자연히 역사도 깊어지고 정신도 무르익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보는 안목이자 숫자로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다. 숫자는 씨앗일 뿐이지만 물을 주고 잘만 가꾸면 성큼성큼 자란다. 부산사람들의 정서는 물론 그 숫자의 뒷이야기를 캐러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 것이다.

동구의 이바구 길에서 만나는 168 계단도 그래서 새롭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르기 힘든 고통의 상징이기만 하던 168 계단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누군가 씨를 뿌렸다. 이제는 당신이 물을 주고 가꿀 차례다. 그 물은 당신의 발자국 소리다. 168 계단의 정신은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쑥쑥 자라게 될 것이다.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