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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스마트폰 속 야매 상담소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20.

등록 : 2013.01.19 13:32 수정 : 2013.01.19 17:56

 

 

[레드기획]연애 방담 팟캐스트 인기
경험에서 나온 따뜻한 답변 매력

“남자들은 오직 사랑하는 여자의 행동에만 끌려다니며 애를 태운다. 여자의 마음을 엿보는 데 행동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들의 이런 확신은 행동보다는 행동의 동기를 더 중요시하는 여자들의 특성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여자들은 행동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가 불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1822년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썼다. 스탕달이 남녀 간의 사랑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둘 사이의 시각 차이, 엇갈리는 심리 등을 책에서 설파한 지 2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이 시대 청춘남녀들은 여전히 궁금하다. “모태솔로인 저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요?” “이 남자의 속내가 무엇인가요?” “남녀 간에 우정은 존재하나요?” “두 번 저를 거절한 친구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을 갖자는 연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연애를 주제로 한 팟캐스트에 올라온 질문들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상대방의 행동에 숨은 의미와 기호를 분석하려는 욕구는 시대와 무관하게 혈기왕성하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런 질문들이 당도하는 곳이 이번에는 온라인상의 공간, 인터넷 팟캐스트라는 점이다.

 

 

이 시대 ‘흔남흔녀’들의 개인적 답변들

 

 

TV와 스크린에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차고 넘치지만 현실의 사랑에서는 착각, 오해, 창피함, 실수 따위의 단어가 난무한다. 그런 단어에 발목 잡힌 이들을 위로하는 연애상담소가 팟캐스트에 여럿 문을 열었다.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

 

 

<남자를 말해주마, 순정마초> <나는 연애 고수다> <안하무인 연애상담> <결혼직전>… 연애 방담 팟캐스트들이다. 연애 심리, 스킬 등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을 얻으려는 청취자가 늘자 방송도 여럿 늘고 있다. 스탕달의 <연애론>, 세월을 훌쩍 건너 2004년 그레그 버렌트의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등 책의 팟캐스트 버전인 셈이다. 책에 쓰이던 연애상담이 팟캐스트로 넘어오기 전에는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 ‘미친 연애’ 등 개인 블로그에서 출발한 연애상담소 혹은 성토장도 인기를 끌었다.

 

 

팟캐스트 연애상담소에는 연애에 통달한 사람, 심리학의 권위자, 상담의 대가는 없다. 말하기 부끄러운 경험, 실패한 연애 등 ‘연애 흑역사’와 절절한 사랑의 추억을 가진 이 시대의 ‘흔남흔녀’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연을 모아 자신의 입장에서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결론을 내려준다. 거창한 이론에 기반했거나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뾰족한 답변도 아니지만, 그저 그런 대답들이 오히려 공감과 호응을 얻고 있다. <남자를 말해주마, 순정마초>를 즐겨 듣는다는 김아무개(31·교사)씨는 이렇게 말했다. “연애를 하고, 여러 차례 소개팅을 하고,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있지만 여전히 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연애죠. 어디 가서 물어보기 애매한 얘기, 남자의 속내를 시시콜콜 수다 떨듯 말해주니까 좋아요.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듣는 것은 아니고 참고하는 정도예요.”

 

 

예컨대 질문과 대답은 이런 식이다. “썸남(관심의 대상인 남성)의 호감과 호의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도착했다. “애매해요, 애매해”를 남발하던 <남자를 말해주마, 순정마초>의 세 진행자가 자신의 경우를 들며 한참 수다를 떨더니 방법을 알려준다. “호감과 호의를 구분하기 위해서 세 번의 카톡을 먼저 보내보세요. 3회 모두 재깍 연락이 왔을 때, 그때는 무조건 호감이에요. 1번 정도 답이 늦게 와도 호감의 범주 안에 듭니다. 그런데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답이 오지 않는다, 3회 중에 2회 이상 늦게 도착하거나 답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호감의 범주에서 벗어난 겁니다. …보내는 말은 별 내용이 없을수록 좋아요. 추천하는 것 중에 하나는 ‘ㅋ’ 이렇게 한 글자 보내보세요. 간 보는 거죠. 상대방이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요?’라는 식으로 반응한다면 확실한 호감이에요. ‘ㅎㅎ’는 안 돼요. 흐흐, 별로예요. 호호, 라고 쓰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이건 좀 징그럽고요.” 다른 진행자가 수다를 거든다. “저 이런 경험 있어요. 어떤 분이 ‘ㅋ’라고 저에게 보냈더라고요. 제가 ‘ㅋㅋ’ 했죠. 그러니까 ‘ㅋㅋㅋ’ 하시더라고요. ‘ㅋㅋㅋㅋ’라고 제가 대답했어요. 네, 그분과는 더 이상 진척이 없었죠.” 철저히 개인적 입장에 근거한 사소한 답변 사이에서 질문자가 해답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청취자는 김아무개씨가 말하듯 ‘어쩌면 내 이야기였을지 모를 이야기’들에 대해 누군가의 대답을 들으며 자기 연애전선의 경로를 수정하거나 힌트를 얻는 듯하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사연을 통한 연애 참고서인 셈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를 진행하는 윤철웅(34)씨는 2012년 초 방송을 시작했다. 당시 남의 사랑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몇 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마침 하던 사업도 정리했던 터라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내 제가 세상을 벗어나서 살기 힘든 사람이란 걸 알았어요.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이랑 나누고 저도 위로받고 싶었어요. 제가 겪었던 실수를 다른 사람은 좀 덜 하면 좋겠다, 상처를 덜 받았음 좋겠다 생각했어요.”

 

“결국 답은 질문하는 사람이 갖고 있어”

 

처음에는 서너 명 듣겠나 싶었다. 자신을 위해 시작한 방송이었으므로 청취자가 몇이든 상관없었다. 앞에 마이크 하나를 놓고 얼굴 모를 누군가를 향해 자기 속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한 달여 동안 영화 이야기를 한 다음 군대 후임인 ‘MC자아’가 합류하며 를 시작했다. 지극히 사소하고 편파적인 방송을 누가 들을까 싶었는데 청취자들이 힘을 얻는다는 반응을 보내왔다. 현재 월 다운로드는 회당 7만~8만 건 정도 된다. 팬클럽이 생겼다. 팬들의 요구로 인터넷에 상담 카페도 개설했다. 지난해 여름에는 오프라인 상담소도 열었다. 방송 첫 회에는 인터넷에 떠도는 사연을 긁어모아 시작했는데, 지금은 전자우편이며 카페를 통해 답지하는 사연을 방송으로 다 소화하지 못할 정도다.

가장 많이 들어오는 사연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단다. “첫째는 ‘이 사람, 마음이 떠날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라는 질문이에요. 돌아서고 있는 연인의 마음을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한번 돌아선 마음을 잡는 게 쉽지 않은데, 안타깝죠. 두 번째로 많이 들어오는 것은 ‘누구랑 실수로 하룻밤을 보내게 됐는데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에요.” 가장 흔하지만 어려운 질문 혹은 얼굴 모르는 누구에게 털어놓는 것이 편한 사연이 상담소를 향한다.

언제나 대본 없이 방송한다는 윤씨는 사연을 읽고 미리 답을 정리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에 정답이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청취자가 많아지면서 책임감도 느끼고, 섣불리 결단짓지 않으려고 조심하긴 하지만, 저희 답변에 상담자가 너무 기대면 부담스러워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상담자를 편하게 해주거나 시각을 넓혀주는 것, 혹은 누가 봐도 정말 잘못 생각하는 게 있다면 따끔하게 조언해주는 것 정도죠. 결국 답은 질문하는 사람이 갖고 있어요.”

 

듣고 싶어서 시작한 방송

 

<시라노 연애조작단>

 

 

<결혼직전> 진행자 여동호씨는 <한겨레21>과 서면으로 나눈 인터뷰에서 ‘30대 초반의 미혼 남성’이라고 밝혔다. 30대에 진입하며 결혼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의 윤철웅씨가 그랬듯, 그 또한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필요로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보다는 듣고 싶은 말을 원해서 시작한 방송이에요. 기혼자 또는 결혼을 앞둔 당사자들한테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결혼을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준비했는지, 결혼 뒤 변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결혼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 부분 해소되기도 했지만 알수록 더 모르는 것이 수두룩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방송 초반에는 하루 30건 남짓 다운로드 수를 기록했는데, 요즘은 하루 평균 1천 건 정도 다운로드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궁금증을 토대로 주제를 정했는데, 최근에는 청취자 리뷰에서 발췌한 궁금증으로 주제를 정한다. ‘결혼, 난 돈이 없다’ ‘두근두근 상견례’ ‘신혼여행에 관하여’ 등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여씨는 개인적인 고민을 방송으로 풀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변 지인과의 대화는 오래 간직하기 힘들어요. 휘발성이 있죠. 책은 저자가 주는 정보에 국한되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도 그 책을 읽은 사람들로만 한정되죠.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는 PC에 최적화돼 있고, 팟캐스트는 스마트폰만 있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데다 오디오 방식의 매체이다 보니 다른 일을 하며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었어요.”

 

“종교인, 살롱 마담들의 역할”

 

진행자 윤철웅씨는 이런 말을 했다. “애덤 샌들러가 출연한 <레인 오버 미>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어요. ‘왜 저 사람이 상처받은 것을 아무도 모르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제가 아는 척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 계면쩍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만 말할 사람이 없어 답답했던 사람들이 진행자 혹은 청취자로서 팟캐스트 연애상담소를 들락거린다. 얼굴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익명성, 그러나 따뜻한 목소리로 화답해주는 정서적 측면 덕에 팟캐스트 연애상담소는 한동안 흥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교수(상담심리학)는 “종교인, 살롱의 마담들이 오래전부터 해왔던 역할인데 기술과 시대의 변화로 매체가 달라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야매 상담’인 셈이에요. 이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전문적이진 않지만 경험에서 얻은 보편타당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대체로 따뜻하게 보듬어줘서 상처를 직면하지 않아도 되니 싸고 빠르게 위로받을 수 있는 경로인 거죠.” 가장 보편적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기만 한 사랑의 미로가 팟캐스트에서 한동안 펼쳐질 듯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