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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인권

[기고] 증세 없는 보편복지론의 운명 / 김영한

by 부산중구마중물 2013. 1. 16.

등록 : 2013.01.15 19:19 수정 : 2013.01.15 19:19

 

대선이 끝난 연말 국회에서 전에 볼 수 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여야가 예산안에 합의한 것이다. 더욱 의외의 풍경은 복지예산을 애초 정부가 신청한 금액보다 2조2000억원이나 더 써도 좋다고 여야가 합의하여 증액을 해준 것이다. 그 결과 2013년 국가 총예산인 342조원 중 100조원 이상이 복지예산으로 배정되었는데, 이렇게 후한 인심으로 외관상 우리나라가 보편적 복지국가인 것처럼 보이게 한 여야 정치인들은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들인가?

 

이미 2013년 예산 배정이 마무리된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서민사회보험 지원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2014년부터 예정된 4대 중증질환 치료비 국가부담, 기초연금 도입, 고교 무상교육, 초등학교 온종일 학교 등의 보편적 복지 사업의 합리적인 예산확보방안까지 마련한 정치인들이라면, 그들은 정말 ‘선한 사마리아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서늘한 현실은, 내년부터 예상되는 기하급수적인 재정부담 증가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2013년도의 복지예산 증액이 재정적자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합리적인 세수확대방안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고작 비과세 및 조세감면 축소 등 간접증세안이 제시되었지만, 실제 예상되는 재정부담 증가액에 비하면 턱없는 계산이다. 즉 앞뒤가 맞지 않는 셈법을 근거로 ‘선한 사마리아인’ 행세만 하고 싶어하는, 실상은 ‘나쁜 사마리아인’에 가까워 보인다.

 

이미 약속한 보편적 복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국민에게 설득하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만약 고소득층 등 기득권층의 저항이 두려워 부가가치세와 같은 간접세의 수입을 높이는 방식으로 예산을 충당하는 꼼수를 부릴 경우, 이러한 보편적 복지가 결과적으로 빈부격차 및 사회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은 자명하다.

 

보편적 복지 체제로 가는 유일한 길은, 불요불급한 예산낭비를 최소화하는 노력과 함께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밖에 없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만약 고소득층의 조세저항을 설득할 정치적 진정성이 없다면, 이 ‘대책 없는’ 보편적 복지 슬로건은 지속가능한 정책목표가 아니라 단지 대선용 득표 전략이었음이 분명하다.

 

비슷한 시기에 대선을 치른 우리나라와 미국을 비교해보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발견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에서는 진보정권이 당선된 뒤 보수-진보의 간극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보수정권 당선 후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모두 보편적 복지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걱정되는 점은 보편적 복지 정책을 실행할 방법, 즉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부유층에 대한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누구도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의 진보정권은 ‘재정절벽’의 위기에 처해서도 고소득층의 세율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진실을 유권자들에게 설득하려는 노력을 굽히지 않았다. 이 점이 우리와 그네들의 차이다.

 

6000여년의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비용이 지불되지 않은 편익은 없었다. 희생이 없는 역사발전이 없었음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 선거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선거가 끝난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분열된 우리 사회의 생채기를 치유하려는 보편적 복지 정책은 부유층 등 기득권층의 ‘희생적 기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제 조세감면혜택 축소나 지하경제 양성화와 같은 대책 없는 논의가 아니라 증세에 대한 부유층의 동의를 얻어내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그럴 정치적 역량과 진정성이 없다면 ‘보편적 복지’ 운운하는 정치적 위선은 4대강 사업의 실패보다도 훨씬 빨리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김영한 성균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