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중구여(1)
1.경북 군위에서 셋째로 태어나다.
난 1964년(갑진년) 음력 9월 15일 새벽 4시 반 고향인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선곡리 980번지(현재, 경북 우보면 원꼴길 8의 9)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철도청(현, KORAIL)에 근무하셨다. 어머니는 영천이 고향이었고 영천띠기(댁)로 불리웠고 5형제의 장남에게 시집을 오신 셈이었다. 어릴 때 추억은 4~5세경 까지는 얼핏얼핏 나지만 그 이전의 기억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나질 않는다. 당시 어머닌 도련님들의 등쌀에 상당히 많은 마음 고생을 하신 것으로 기억은 하지만 어머니께선 그런 고통을 제게 말씀하시진 않으셨고 단지 전해오는 소리로 잠시잠시 들었을 뿐이다. 대구 반야월에 사시는 막내 삼촌은 원꼴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고등학교(영남상고, 지금 서여고 자리)를 다녔으니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로서 어찌 표현을 하리오. 그래도 나중에 제일 정이 많고 재주가 많았던 삼촌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대구 반여월에 살고 계신다.
어릴 적 형님(1950년생)과는 터울이 심해 상당히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 누나, 여동생과 하루하루가 힘든 나날이었다. 형님은 영도 남고에 다닐 때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혈압 등 지병으로 지금 창선동 대각사 부근의 춘해병원에 오랜 기간 입원해 계실 때였다. 한참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한 나이에 어머닌 병실에서 병마와 다투고 계셨으니 나름 짜증도 났으리라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엇나가지는 않지만 형님은 좀 별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대학교 다닐 때 씨가리라 불리는 동네 깡패(요즘으로 치면 일진 두목)에게 가스라이팅 당해 집에 돈이 되는 물건이란 물건은 다 가져가 잡혀 먹고 돈으로 바꾸어 그 놈에게 갖다 바쳤다. 그 도중에 가족들에게 고통을 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계속 이어짐)
#중구영도구공공정책전략연구소 #내사랑중구여 #오경석자서전
내가 이 글을 써나가는 이유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겠지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며, 후대 나의 자손들이 이글을 대면할 때 아~~~이분이 그 때 이런 생각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생각이 자신이 살아가는 고단한 삶의 한가운데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옹달샘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잘못 기술된 점은 고쳐주시기 바란다. 특히 누나와 누이동생의 수정작업이 많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씨가리는 못된 짓을 일삼다가 똘마니들과 산에 놀러 갔다
발을 헛디뎌 죽은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당시 어렸던 나는 발칙하게도 그리
생각지 않고, 그래서 죽은 게 아니겠지 누가 떠밀어서 죽였겠지 라고 생각을
했으니 어찌보면 당시 많이 조숙했던 것으로 생각한다.